성과주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세상에 살다 보니 자신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 자기가 본 것, 경험한 것을 너무 신뢰해서도 안된다는 것도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속에 메아리치는 어떤 것들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니라고 해도 침묵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든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은 페친인 홍O주 박사의 글을 보고서다. 내 블로그가 지향하듯이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하는 의미도 있다.
홍 박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초등교육부터 성인의 직무 평가까지, 수월성은 인간 활동의 성과를 재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때 수월 또는 우수하다는 것은 평가대상 집단 내에서 앞서있는 정도로 측정된다. 그러한 수월성 개념 하에, 100점에서 0점까지, 수우미양가, SABCD의 인간 측정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사회 패러다임 하에서, 인간은 남들보다 앞서기 위한 선행학습,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한 수단의 목적화, 목적의 수단화, 더 좋은 인센티브의 목적화를 추구하게 된다. 다시 말해 100점을 맞기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이지, 어떤 목표와 꿈을 달성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내가 이 이야기에 꽂힌 것은 평가제도 때문이다. 우리 직장의 평가제도 역시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받았던 수우미양가의 평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제도는 초등학교에서도 오래전에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공공조직에서는 선진제도로 들여왔다. 아마도 그 제도가 초등학교에서 사라져 가던 그 무렵에 선진국 - 주로 미국 -의 평가방법론을 벤치마킹하면서 도입된 것이다. 그 당시 SERI의 보고서를 보면 성급한 성과제도 도입의 문제점에 대해 우려하고 있지만 반드시 도입해야 할 제도라고 강조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SERI의 보고서처럼 문제를 보완하고 도입했을까, 아니면 성급히 겉모습을 베끼기에 충실했을까? SERI에서 그 보고서를 쓴 연구원은 우리나라에 대한 깊은 인식과 이해가 있었을까. 우리는 그 결과를 세월호와 MERS 사태에서 여실히 보고 있다.
성과주의 제도를 도입할 당시 나는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었다. 동료들 대부분은 이런 성과주의와 인센티브의 연계가 타당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성과급을 많이 받은 사람은 일정 부분 다시 돌려줘서 약간은 공평하게 나누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최근 지자체에서 성과급을 직원들끼리 나누는 일을 뉴스에서 다루기도 했는데(1), 이 분들 참 대단하다는 게 첫 느낌이었다. 내부 시스템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불합리해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번 생각해보자.
승진대상자가 좋은 평가를 받는 게 단위 조직에서는 무조건 유리하다. 그 승진대상자가 승진해야 차순위 대상자가 기회를 잡아 승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순서대로 되지 않으면 다른 팀과의 경쟁에서 팀 전체가 낙오하게 된다. 정직하게 제도를 따랐기 때문에 모두가 패자가 되는 이런 상황을 누가 원할까. 죄수의 딜레마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다. 강제하니 따르지 않을 수 없고, 따르자니 승진대상자가 무조건 인센티브를 다 가져가는 문제가 생긴다. 한 번에 승진하면 다행이지만, 몇 번 고배를 마시면 다른 동료들은 모두 죽어난다.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어떤 이유에서건 평가는 공정하기 어렵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에서 성과주의는 비판받고 있다. 머크의 핵심 임원은 “R&D는 철학이고 문화다. 평가나 측정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연구원이 평가의 대상이 되면 피평가자는 측정기준에 맞는 행동만 하게 된다(2). 창의적이어야 할 연구원이 실적 달성을 위한 회사원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게 우리나라 대학과 연구소 전반에 지난 10여 년간 일어난 일이다. 연구예산도 늘어나고 논문 편수도 늘었지만,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의미 있는 발전을 했다는 평가는 어디에도 없다. 모두들 우리나라 과학의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뿐이다.
이게 세계적인 기업 마이크로소프트에게도 일어난 일이다. 논픽션 작가 커트 아이헨월드(Kurt Eichenwald)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전·현직 임직원들을 인터뷰하고 내부 자료를 검토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스택 랭킹이 회사를 망치고 직원들을 떠나가게 했다. 직원들의 경쟁의식을 높이려고 도입한 제도가 협업 분위기를 망쳐놨다. 직원들은 구글 등 떠오르는 IT 강자들과 경쟁하지 않았다. 대신 내부 동료들과 경쟁했다. 한 부서에서 성과를 내더라도 기계적 비율에 따라 하위등급 직원이 나왔다. 관리자들의 내부 권력투쟁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평가가 관리자에게 얼마나 잘 보이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폐단도 드러났다."(3)
이러한 제도를 도입했던 스티브 발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잃어버린 십 년을 가져왔다. 2013년 말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스택 랭킹 제도를 폐지했다. 그 이후부터 비로소 사람들의 눈에 마이크로소프트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은다. 2015년 마이크로소프트는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거인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성과주의가 조직을 망치는 5가지 이유라는 블로그 글에는 성과주의가 가져오는 부정적인 면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4).
단기 성과주의 - ‘내일 일은 난 몰라요’
개인/부서 이기주의의 발현 - ‘적은 경쟁사가 아닌 내부에’
도전정신의 상실 - ‘우리에겐 실패란 없다.’
실제 성과가 아닌 내부 보여주기 활동 - ‘보기 좋은 것이 평가도 좋다’
기대했던 효과의 부재 - ‘상처뿐인 영광’
수많은 사례들이 성과주의 종말을 이야기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공고하다. 빙하시대를 뒤덮은 얼음처럼 두껍게 우리 사회 전반을 짓누르고 있다. 장기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길을 잃었고, 얄팍한 지식과 소소한 성과만을 전리품으로 쳉기는 사이 우리는 세계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다.
다시 홍 박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성과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현시대를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창의성을 제약한다는 것이다. 창의성은 수월성을 평가하는 어떤 기준으로도 측정되지 못한다. 수월성은 선형 함수에 의해 예측되는 영역에서 달성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성과는 항상 전년대비의 함수일 뿐이다. 그에 비해 창의적인 것들은 불확실성이 높은 비선형적 영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예측이 어렵고 수치화는 더더욱 어렵다.
“수월성은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객관화/일반화를 할 수 있지만, 창의성은 불확실한 영역에서 오로지 주관적 판단에 근거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의견을 낼 수 있다.”
현재의 평가제도 하에서 토마스 에디슨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D를 받을 수밖에 없다. 창의성의 발현 과정은 대체로 실패의 과정이고, 성공하여 대박 날 확률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창의적 과정은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여정으로 실패로 정의할 수 없다. 그렇지만 현재의 성과주의 하에서는 지양해야 될 사례일 뿐이다. 성과주의는 창의적인 생각의 제초제이고, 장기적으로 사회의 역동성을 질식시킨다.
우리는 현재를 정의할 때 창조와 혁신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거 산업주의 시대의 패러다임인 성과주의에 집착하고 있다. 온 세상을 S-A-B-C-D로 나래비를 세우고 있다. 창의적인 사람에게서 꿈(비전)을 앗아가고 대신에 D라는 평가를 안긴다. 모두를 점수나 등급에 따라 분류하고 오로지 한 가지의 트랙에서만 경쟁하도록 부추긴다. 조직에는 갈등, 줄 서기, 무력감만을 번지르한 실적 뒤에 남긴다.
우리는 사소한 것(?), 당장 역효과가 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관대한 경향이 있다.
다음은 영국의 민요 정도 되는 노래 가사이다. 못 하나와 나라의 운명을 연결하는 것은 좀 과한 측면이 있지만, 커다란 사건의 배후에는 우리가 간과한 아주 작은 부분이 자리 잡고 있다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못 하나가 없어서 나라가 망하다>
For want of a nail the shoe was lost, 못 하나가 없어서 말편자가 망가졌다네,
for want of a shoe the horse was lost, 말편자가 없어서 말이 다쳤다네,
for want of a horse the knight was lost, 말이 다쳐서 기사가 부상당했다네,
for want of a knight the battle was lost, 기사가 부상당해 전투에서 졌다네,
for want of a battle the kingdom was lost. 전투에서 져서 나라가 망했다네.
So a kingdom was lost—all for want of a nail. 단지 못 하나가 없어서 나라가 망했단 말일세.
그런데 이 평가제도가 사소한 문제였을까? 이건 공공조직의 생리와 생태계를 완전히 바꾸는 대개혁이었다. 그런데 우린 얼마만큼 고민을 했을까. 이런 시스템이 우리 문화에 잘 맞을 것인지 진지한 고려가 있었을까. 이게 당장은 그럴싸해 보이고 어떤 문제도 드러나 보이지 않겠지만,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규정해서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마이크로스프트의 잃어버인 십 년이 성과주의 제도가 한 원인이라면, 우리의 지난한 10여 년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공공조직에 이 평가제도가 도입될 때 오늘의 이 무기력한 현실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은 성과와 평가만 남고 사물의 본질은 온데간데없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느낄 질 수가 없다. 너무나 공고해져서 이젠 어쩔 수도 없다는 좌절감이 든다.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문제를 찾고 값싼 대책을 남발하는 사이 진짜 범인은 우리의 등 뒤에서 웃음을 흘린다.
대안은 있는가? 물론 있다. 당장이라도 성과주의에 기반한 평가제도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이다. 어떤 개선을 하더라도 지금의 제도로는 수습이 불가능하다. 실패한 카드에 미련을 가질 이유도 없고, 손댄다고 더 좋아질 것도 없다.
다시 이 제도가 도입되던 2000년대 초로 돌아가 보자. 왜 이 제도를 도입하려고 했을까. 국민적 공감대를 얻었던 한 가지는 공무원들이 움직이지 않아서 IMF를 불러왔다는 비판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평가제도를 도입해서 공공조직을 혁신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우리가 마주하는 현재는 그때 내린 결정이 만들어낸 미래이다.
현재가 만족스러운가?
2013년 말 마이크로소프트는 성과평가제도를 완전히 폐지했다. 스티브 발머는 물러나고 인도 출신 사티아 나델라를 CEO로 임명했다. 스택 랭킹이 사라지자 내부 팀들 간 경쟁 대신 서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리지만 서로 비난만 할 뿐 문제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성과주의를 더욱 촘촘히, 공고히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이건 화풀이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세상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생태계 위에서 예민한 균형감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일부 잘못된 예를 침소봉대하여 과도한 통제를 도입하는 것, 이 성과주의는 역동적인 생태계에 처바른 콘크리트이다.
우리 상상력의 크기는 가장 바깥 집단의 자유도와 비례한다. 사회가 경직될수록 우리의 상상력은 쪼그라들고 창조적인 역량은 떨어진다. 현재의 성과주의 제도는 창의적인 인재를 수용할 수 있는 버퍼(buffer)를 없애 버렸다. 지금 되돌리지 않으면 우리는 또다시 세계의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사건의 지평선을 지나기 전에 이제 과감히 돌아서야 할 때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촘촘한 관리가 아니라 꿈과 이상이어야 한다.
(1) S·A등급이 받은 돈 거둬…B·C등급에 똑같이 분배…공무원 차등 성과급…뒤에선 'n분의 1'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5042126401
(2) “R&D는 철학이고 문화다. 평가나 측정의 대상이 아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2/29/2014122902289.html?main_column
(3) 경쟁보다 협업 - 마이크로소프트 상대평가 인사제도 폐지
(4) 성과주의가 조직을 망치는 5가지 이유 http://ppss.kr/archives/360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