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지성의 시대에도 여전히 천재를 말하는 사람들
한 때 "한 사람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라는 말이 회자되던 때가 있었다. 삼성이 인재경영을 외치면서 전국적으로 유행했었다. 그때는 한 명의 천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수많은 TV 프로그램과 강연에서 봐야만 했다. 수많은 성공사례에 나 역시 깊이 공감했었다.
나중에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는 게 밝혀졌지만 "인재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기업도 있었다. 그 회사의 수장은 자식을 위해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광풍이 몰아칠 때는 한 명의 인재가 정말 세상을 바꾸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수많은 지도자들이 "인재제일주의"를 입에 달고 살던 시절이었다. 한바탕 광풍이 지난 후 지난 일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전문가도 등장한다. 전 한겨레경제연구소 이원재 소장은 "한 명의 인재가 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에서 인재제일주의 회사가 어떻게 말아먹었는지를 실감 나게 보여주었다.
90년대 말 세계적 전략컨설팅회사 맥킨지는 “인재 전쟁”이라는 제목의 대형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전 세계의 맥킨지 컨설턴트들은 각국의 기업들을 직접 방문해 인재 관리 정책에 대한 대대적 조사를 벌인다. (중략) 가장 큰 차이는 인재 관리였다. 인재를 체계적으로 확보하고 관리하는 회사는 승자였고 그렇지 않은 회사는 패자였다.
이런 조사를 바탕으로 맥킨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가장 훌륭한 인재를 뽑는 데 전력투구해라. 그리고 그 인재들이 조직에서 빛을 발할 수 있게 하라. 자원을 소수 인재에게 집중시켜라. 그래야 무한경쟁의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맥킨지의 조언을 가장 열심히 따른 회사는 아이러니 하게도 "엔론"이었다. 엔론의 인재경영은 세계 경제사에 유래 없는 극적인 파산을 초래했다. 파산 전까지 엔론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는 회사였다.
2001년 12월 2일 파산 전까지 엔론은 약 2만 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2000년 매출 1,110억 달러를 달성한 세계 주요 전기, 천연가스, 통신 및 제지 기업의 하나였다. 《포춘》지는 엔론을 6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했다. (위키백과)
IMF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인재경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성과주의가 사회 전반에 효율성을 개선하는 무기로 등장했다. 민간기업에서는 성과연봉제가 확산되었고, S, A, B, C, D (수, 우, 미, 양, 가) 평가시스템이 공공기관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우리나라는 연공서열 사회에서 성과주의 사회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이원재 소장의 주장처럼 "스타가 될 수 없지만 시스템에 꾸준히 기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우리 사회에서 점점 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정작 합리적이고 겸손하고 이웃과 조직을 걱정하는 ‘인재’들"에게 성과주의는 재앙이 되었다. 나는 그 글에 달린 댓글에 더 관심이 갔다.
일시적으로 진짜 천재가 나올 수는 있겠지만, 그 천재 효과는 사회적 바탕이 없으면 금방 무너지는 모래성에 불과하다. 축구에 비유하면, 브라질팀에서 호나우도가 나오고 프랑스 팀에서 지단이 나오는 것이지, FIFA 랭킹 100위 국가에서 천재선수가 나올 수 없는 이치다.
우리는 여전히 천재에 열광하고 성과주의를 더욱 공고히 해나가고 있지만 그 혜택을 본 것 같지는 않다. GDP 대비 정부 R&D 예산 비중 1위, 세계 6위의 정부의 R&D 예산 규모(137억 달러, 약 15조 원)이지만 노벨상이 아니더라도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가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그리 많이 보지는 못했다.
미국 수재들은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 경쟁하기가 힘들어. 우리 교육방식의 문제야.
"천재 과학자의 뼈아픈 독백"이란 기사에서 천재 과학자가 했다는 말이다. 이 기사의 저자는 이 말이 가지는 권위를 부연하기 위해 독백의 주인공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를 길게 설명했다.
그는 후배들에겐 `공부의 신`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천재 과학자이다. 70년 경기고 수석졸업, 대입 예비고사 전국 수석, 그리고 서울대 수석입학. 소위 그 시절 3관왕의 영예를 누렸던 선배이다. 미국 버클리 유학 시에도 시험은 수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글을 맺는다.
오늘 한국교육과 연구의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 같은 수재가 힘들다고 한다면 정말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창의적 교육과 연구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이 답을 내놓기 전에는 한국의 노벨상 수상은 아직도 요원하다.
나는 이 기사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했다. 아인슈타인도 우리나라에서는 성적부진반에서 나머지 공부했을 것이다, 라는 게 가장 흔한 농담인 나라 아닌가. 창의성을 살리기 위해 괴짜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넘어서, 괴짜 양성소라도 만들어야 할판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들었다.
"서울대 교수 30년 생활을 정리하고 올해 포스텍으로 부임"한 분이나, 이 기사를 쓰신 분들 모두 내로라하는 대학의 교수이다. 그런데 교육자들은 우리 교육이 이렇게 되는데 책임이 없을까? 그 교육환경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 교육자들은 무엇을 했던가라는 뒷맛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20조 원이 넘는 돈이 헛되이 쓰인다고 걱정했다면, 연구 대신에 그 환경을 바꾸는 게 먼저 아니었을까? 학력고사 성적이 별로 좋지 못했던 나도 생각할 수 있는 쉬운 일을 왜 천재들은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 기사를 보고 한 페친은 이렇게 주장한다. 천재의 시대가 끝이 난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천재 타령이나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 연구비를 쓰고도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지 못하지 않냐"는 핀잔이었다. 그리고 주장을 이어간다. "천재가 허용되는 사회, 그리고 될 때까지 밀어주는 사회"가 필요한 것이지 천재의 탄생을 기원하는 것은 의미 없다, 라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평범한 학생들이 모여서 하는 프로젝트에서도 천재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다. 미국에 간 우리나라 학생들의 문제는 그룹 워킹에 약해서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결론적으로 위의 두 케이스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천재적이란 것은 사후적으로나 이해되는 것이지, 태어날 때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맥킨지의 연구결과 역시 사후적인 분석에 불과하다. 화살을 쏜 후 과녁을 그려 넣은 것과 같이 전형적인 '선택 편향'이 만들어낸 오류일 뿐이다.
이것과는 별개로 우리나라는 참~ 권위에 약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페북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직에 있을 때는 활발히 활동한다. 주변의 사람들도 홍보성 글에 "좋아요"를 누른다. 현직에서 떠나면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런저런 소식을 열심히 전하던 분들은 갑자기 활동이 뜸해진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더 극적이다.
반응이 없다.
이래서인지 사람들은 그렇게 자리를 탐하는지도 모른다. 자리가 사라지면 그 사람의 인격도 사라진다. 우리나라에서 관계란 것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자리 대 위치"의 관계만 존재하는 듯하다. 자리란 어떤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출발점이 아니라 내가 도달해야 하는 목표일 뿐이다.
이런 사회에서 창의성이 싹틀 수 있을까? 그럼 위의 기사처럼 우리나라에는 희망이 없는 것일까? 나 역시 그렇다는 것에 동의한다.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해서 높은 자리가 필요한 사회, 탄식을 하더라도 천재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는 사회에서 어떤 창의적인 토론이 가능할까? 스스로의 평범함에 대해 한탄을 해야만 하는 조직에서 우리는 무슨 상상을 할 수 있을까?
자리가 목표인 나라, 다양한 시각이 아니라 자리가 토론하는 나라, 한탄마저도 천재의 전유물이 된 나라에서 노벨상을 꿈꾸는 분들의 천진함이 그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