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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코타운 Dec 04. 2016

북해에서 만난 고래

노르웨이 트롬소에서 만난 오르카와 험프백

어두운 밤하늘을 녹색의 빛으로 밝히는 오로라를 봤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비단결 커튼은 끊임없이 잔물결 치며 허공을 갈랐다. 때로는 폭풍이 몰아치 듯 휘감아 돌면서 사라지고 나타나길 반복했다. 오로라 헌터는 찬란하게 빛나는 오로라를 봤다. 이제 남은 시간은 '덤'처럼 느껴졌다. (오로라헌터, 작정하고 떠난 여행)



이젠 보너스를 챙길 차례였다. 우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로라를 보는 것 이외에 어떤 계획도 준비도 없었다. 관광안내센터에 들러 브로셔를 들고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벽난로의 온기 주변에 모여 우리는 개썰매, 사미 부족 방문하기, 얼음낚시, 스키, 피요르드 트래킹, 고래 관찰 등 트롬소가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이런~~~, 개썰매가 단연 인기였다만, 실제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올 해는 유달리 눈이 오지 않아 눈과 관련된 프로그램은 운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의 영향을 여기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12월이 다되어 가는 데 눈이 쌓이지 않는 북극이라니. 우린 자연스럽게 고래 관찰로 의견이 모아졌다.


스칸딕호텔 부근 항구에서 바라본 트롬소 다리



이른 새벽부터 길을 나서 다시 관광안내소에서 들렀다. 대부분의 고래 관찰 보트는 이미 9시에 출발한 후였다. 이른 새벽부터 서둘렀지만 스벤스비(Svensby)에서 나오는 페리를 시간때문에 9시가 지난 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10시 출발하는 마지막 보트에 아직 자리가 남아있었다. 가격은 1,200 크로네(약 17만 원). 반나절 프로그램으로는 무척이나 비싸게 느껴졌지만, 시내를 배회하며 하루를 보내고 싶진 않았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목숨 같은 휴가와 피 같은 돈을 소진한 게 얼마인데...."


안내에 따라 스칸딕 호텔(Scandic Ishavshotel) 뒤편에 있는 선착장으로 갔다. 트롬소의 명물인 연육교가 바로 보이는 곳에 배가 정박하고 있었다. 춥고 우울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과하게 밝고 친절한 젊은 여자 직원의 안내를 따라 보트에 올랐다.


우리 일행 이외에도 태국에서 온 가족들, 프랑스와 대만에서 온 학생들, 그리고 미국에서 온 연인 등 이미 10여 명의 외국인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곧이어 우리를 안내할 다그(Dag) 대표가 배에 올랐다.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그녀는 유창한 영어로 우리가 향해가는 목적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끔씩 자신의 인생 이야기도 곁들였다.


트롬소에서 배를 타고 약 1시간 거리의 크발뢰이바겐(Kvaløyvågen)으로 이동 중


고래 관찰을 떠난 항로


직장 생활을 하던 다그는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도시의 사무실 보다는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북극의 이야기를 트롬소를 찾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감 있게 이야기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과감하게 시도하고 보는 거죠. 혹시 그런 순간을 맞닥뜨리면 그냥 하세요.

우리가 향해가는 곳은 크발뢰이바겐(Kvaløyvågen)이었다. 다그는 '크발(Kval)'이란 단어가 고래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예전부터 이 지역은 고래가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곳이었고, 고래 해안으로 불리었다.


크발뢰이바겐까지 이르는 길은 1시간이 더 걸렸다. 갑판에서 북극해의 찬바람을 맞으며 피요르드 해안을 느껴보았다. 라그나로스브록이 바이킹 배를 타고 노를 저어 지나갔을 만한 길이었다. 항로 주변의 풍경은 평범하게 느껴졌다. 깍어지른 듯한 링겐알프스를 매일 아침마다 보다보니 나지막하고 별 특징없는 이곳의 피요르드 풍경은 어떤 감흥을 일으키기엔 약했다. 바닷바람이 무척이나 차게 느껴졌다. 나는 선실로 들어와 따뜻한 차 한 잔과 크루아상으로 긴장을 누그려 드렸다. 그리고 그녀가 하는 고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고래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사람들



다그는 내가 농업분야에서 왔다고 하자 스발바르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발바르(노르웨이 령), 국제종자저장소(Seed Vault)가 있는 곳으로 이곳 트롬소에서는 배로 4일이 걸리는 거리이다. 그린란드와 트롬소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바이킹들이 자주 방문했던 아이슬란드 역시 배로 4일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풍랑으로 길을 잃은 바이킹들이 아마도 스발바르 섬을 최초로 발견하지 않았을까, 역사학자들은 그렇게 추정한다.


그렇지만 스발바르 섬을 처음 기록한 사람들은 네덜란드 인들이다. 1594년 탐험가 바렌츠(Willem Barentsz)는 머큐리호를 타고 북극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항해를 시작했다. 그들은 바다표범을 사냥했고, 북극곰도 포획했다. 화란인들은 동쪽으로 가는 북극항로를 찾는 데는 실패했지만 정밀한 북극해의 지도를 만들었다. 바렌츠는 항해 도중에 마주친 수천 마리 고래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비극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바렌츠의 북극해 항해지도 (Map of Willem Barentsz third voyage @wikipedia)


대항해 시대, 동방에 이르는 항로를 찾기 위해 스페인은 아메리카로 떠났고 네덜란드는 북극해를 탐험했다.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자 했던 서구인들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두 번의 항해는 새로운 비극을 잉태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구세계는 스페인의 정복자들에 의해 처참하게 몰락했고, 스발바르 인근 바다를 가득 채웠던 고래들 역시 비슷한 운명을 벗어나진 못했다.


네덜란드, 영국, 덴마크 등 서구의 포경선들이 바렌츠의 항해지도를 따라 고래사냥에 나섰다. 숨쉬기 위해 물위로 올라왔던 고래들은 포경선의 작살에 스려져갔다. 유럽인들은 인근 섬에 거대한 솥을 걸고 고래를 해체하고 끓여서 기름을 추출했다. 고래기름은 석유가 나오기 전까지 서구 사회의 밤을 밝하는 연료였다.


트롬소에서 고래 고기는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식품이었다. 포경선들은 기름만 채취하고 고기는 싸게 팔았기 때문이다. 다그는 고래 고기가 풍족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핀네스(Finnes)의 고래 스테이크 레스토랑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신선한 고래고기를 맛볼 수 있는 곳이라고.


고래를 더 이상 잡지는 않는다. 국제포경규제협약에 따라 1980년대부터 상업적인 포경을 전면 금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노르웨이는 여전히 고래를 잡는다. 밍크고래에 한해 연간 4-5백 마리의 고래를 잡는다. 이를 위해 다섯 척 정도의 포경선이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 일본도 과학연구라는 명목으로 밍크 고래를 사냥한다. 다그는 고래를 사냥하는 것은 노르웨이의 전통문화라고 강조한다. 북극의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선조들의 삶의 방식이었다고.


북극 밍크 고래(Arctic Mink Whale)의 개체 수는 다시 회복되어 50만 마리를 넘어가고 있다. 다그는 연간 천여 마리의 포획이 밍크 고래의 개체 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부탁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보트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보트 사이로 간간히 물기둥이 뿜어져 나오는 게 보였다. 비싼 돈을 내고 왔는 데 고래를 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은 금세 사라졌다.


오르카, 눈 옆의 희색 무늬가 특징적이다. 이 흰색 무늬로 개체를 구분한다.



가장 먼저 오르카(Orca)가 보였다. 오르카는 가장 큰 돌고래류에 속하는 데 '킬러 고래'로 불린다. 실제로 고래를 공격해서 사냥을 하기도 한다. 오르카는 하루에 5백 마리의 청어를 먹어 치운다. 여러 마리가 떼를 지어 청어 떼를 사냥하는 데, 거대한 공기방울 커튼으로 청어 떼를 감싼 후 한 마리씩 잡아먹는다. 수십 마리의 오르카가 섬 사이의 굴곡진 만을 따라 바삐 이동하며 청어 떼를 몰고 다녔다.



우리 눈에는 보이진 않지만 물속에는 수십 미터 두께의 청어 때가 수 km에 걸쳐서 이동하고 있다. 오르카는 그들을 분리해서 가두고 한 마리씩 사냥을 한다. 고래들 사이에는 청어 부스러기를 먹으려는 갈매기 때가 분주히 날아다녔다.


평온해 보이는 바다, 수면 아래에서는 거대한 삶과 죽음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한두 시간 동안 보트는 계속해서 여기 나타났다 저기 나타났다 하는 고래들을 따라다녔다. 작살대신 배에 탄 사람들 손엔 카메라가 들려 있다는게 옛날과는 다른 점이라고나 할까. 거대한 포경산업은 수지맞는 생태관광으로 탈바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는 자신들의 먹이 활동에만 관심이 있을 뿐, 팬서비스는 없었다. 관광객들은 오르카를 보는 데 지쳐가고 있었다. 이런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왜 다른 고래는 안 보이는 걸까? 여기 분명히 혹등고래(Mumpback whale)도 있다고 했는데...


그때 다그가 "험프백, 2시 방향"이라고 외쳤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2시 방향의 선수로 이동했다. 바닷물에 젖은 갑판은 미끄러웠고 흔들림 때문에 중심을 잡기 쉽지 않았지만 개이치 않았다.


혹등고래가 먹이를 쫓아 물위로 뛰어 올랐다. 거대한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보트는 고래를 쫓았고, 나 역시 선수를 오가며 고래를 쫓았다. 그때 물 위로 쏫아 오르는 혹등고래 두 마리를 봤다. 거대한 입을 벌리며 물 위로 올랐던 고래는 주변 바다에 출렁이는 물결을 만들었다. 고래의 몸통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리고 우아하게 물속으로 다시 사라져갔다. 수직입수하는 다이버들의 오리발처럼 꼬리를 마지막으로 드러내고는  사라져버렸다. 혹등고래는 먹이섭취 기간 동안 하루 2톤 이상의 청어를 잡아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 고래해안에서 그들의 하루는 무척이나 바빴다.


혹등고래의 거대한 지느러미가 보인다.


길이만 10미터를 훨씬 넘어가는 거대한 혹등고래를 보고 나자 더 이상 오르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혹등고래가 만드는 물결에 비하면 오르카는 그냥 귀여운 파문처럼 느껴졌다.


혹등고래의 꼬리. 고래마다 특징적인 꼬리 무늬가 있다. 고래를 식별할 때는 이 꼬리의 무늬가 사람의 얼굴과 같은 역할을 한다.



혹등고래의 모습을 더 잘 잡아보고 싶었지만 더 이상 우리를 위해 나타나주지 않았다. 우린 이미 추위에 지쳤고 하나둘 선실로 들어갔다. 그때쯤 배는 다시 트롬소로 향했다.


인터넷에서 본 사진처럼 고래는 우리를 위해 멋진 점프를 보여주진 않았다. 먹이를 먹는데 열중했다. 고래들은 짧은 먹이 시즌이 끝나고 나면 번식을 위해 다시 남아메리카 해안까지 긴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 기간 동안 고래는 어떤 먹이활동도 하지 않고 이곳 바다에서 비축한 에너지만을 사용해 살아간다.   


유럽인들의 동방 항로 탐험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도 북극해의 고래에게도 비극이었다. 노르웨이 인들은 더 이상 고래 해안에서 고래를 잡지 않는다. 단지 고래의 먹이활동을 방해하지 않으려 멀찍이서 지켜볼 뿐이다. 오늘 그 자리에는 고래를 꽤나 잡았던 한국인들도 서있었다.


고래는 지능이 꽤나 높고 사회성이 강한 동물이다. 다그가 들려준 이야기의 잔상이 길게 남았다. 죽은 새끼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고래 이야기였다.


새끼가 죽으면 어미 고래는 그 새끼를 머리에 이고 며칠을 무리와 함께 다닌다. 무리 전체가 함께 슬퍼한다. 애도 기간이 끝나면 무리가 다함께 모여 그 새끼를 떠나보낸다. 고래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 위대한 생물이 드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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