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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코타운 Jan 03. 2017

그래야 되는 줄 알았다

우리시대 여자들의 이야기 <82년생 김지영>

<82년생 김지영> 그녀가 살아가는 세상도 그렇게 크게 바뀌진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여자로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일지, 경상도에서 아들로 자란 내가 이해하긴 벅찬 일인지도 모르겠다.


60년대생 김지영들은 "아들이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고, 그게 가족 모두의 성공과 행복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을 살았다. 아들들이 공부를 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동안 딸들은 그 뒷바라지를 했다. 요즈음은 외국인 노동자들도 외면할 열악한 공장에서 하루 16시간을 일했고, 벌집같은 기숙사와 벌집보다 더한 셋방에서 살면서 모은 돈들은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로 보태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치켜세울 줄만 알았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성공한 동생들이 공부 못한 누나를 위해서 쥐꼬리만 한 부모 재산이라도 양보했다는 미덕은 짧지 않은 인생이지만 들은 적 없다. 그 시절 김지영은 어머니로서 며느리로서 온갖 궂은일을 다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라오스의 농촌마을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소녀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어릴 적 기억들이 다시 소환되었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기억들이다.


수학여행을 가는 대신 과수원에서 젓과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고 자랑하던 누나는 그 후 몇십 년을 어머니에게 한탄하듯 말했다. "나도 정말 수학여행을 가고 싶었어." 누나는 아마도 그때 내게 화를 많이 냈던 것 같다. 나는 누나 덕에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그나마 대학에서 설부른 낭만이라도 찾았다.


마을에 살던 또 다른 김지영은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도회지 공장으로 나갔다. 꿈 많던 소녀였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철들고부터 동생들을 업어서 키워야 했고, 들일 나간 엄마를 대신해 점심을 차리고 저녁을 차렸다. 예쁜 옷 한번 입어본 적 없었고 예쁜 구두 한번 신어 본 적 없었다. 물 긷고 빨래하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고향을 떠날 때 눈물을 훔치던 그 뒷모습이 아련히 기억날 뿐이다. 누구에게도 사랑이란 걸 받아 본 적도 없었고, 그런 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아마도 그 김지영도 <82년생 김지영>에 등장하는 엄마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사리 손으로 벌은 돈으로 냉장고며 TV며 사 보냈다는 이야길 간간히 전해 들었다.


어릴 적부터 고향을 떠나 부모님들 뒷바라지를 했던 60년대생 김지영은 어느 날 깨닫는다. 동생들이 모두 성공한 이후에도 "사랑하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는 자신들에게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들은 또다시 억척스럽게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라오스의 시골마을, 세자매가 나무를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80년대생 김지영들은 어떠했을까? 지금 내 직장에서도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에 대해서 한 번도 그들의 삶을 돌아보진 못했다. 애써 외면하지 않아도 우리나라에서 사는 여느 남자들처럼 자연스럽게 무관심하게 각인되었다.


조남주 작가는 <82년생 김지영>에서 우리가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일들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동시대 여성들의 삶 속에서 담담히 그려낸다. 남자들이 농담 삼아했던 의미 없는 말과 사려 없는 행동이 여자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지를 부드럽고 간결한 문체 속에 담아냈다.


<82년생 김지영>의 표지


엄마이기 전에 사람이고 여자이기 전에 같이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들에게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음을 살아가고 싶은 인생이 있음을 일깨운다. 그들이 포기해야 했던 삶이 그래야만 했던 것일 뿐,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게 결코 아니라고 읇조인다. 그리고 그 포기는 82년생 김지영에게도 변하지 않은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한다.

우리는 직장을 포기하고 주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길 꺼려한다. 그들이 포기한 삶에 대해 기회비용으로 인정하길 꺼려한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모차에 커피 한 잔이 손에 들려있다고 맘충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공원의 남자들처럼, 시시껄렁한 농담을 유머라고 하는 광고사 부장처럼 여자들의 삶을 너무 쉽게 재단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나의 오래된 습관이 이 책 한 권으로 바뀌진 않겠지만 우리시대 수많은 김지영의 삶에 존경과 감사를 표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나는 어머니, 누나, 그리고 아내 등 수많은 여자들의 희생과 도움으로 여기 서 있다. 그들에게 감사한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많은 것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던 많은 것들, 그렇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준 조남주 작가에게 감사한다.



다음은 <82년생 김지영>에 일부가 소개되었던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노래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도 꿈이 있다. 라오스 사바나켓의 한 초등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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