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은 도전할 만한 미래 산업인가?
이 글은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주최한 2021년 J-Connect Day에서 발표한 내용을 간추려 다시 적었습니다.
경로 의존성이란 한 번 어느 발전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게 밝혀지더라도 계속 고수하려는 경향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오래된 산업은 경로 의존성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이게 안정감으로 주기도 하지만 변화를 불편하게 느끼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다. 농업도 예외는 아니다. 어찌 보면 가장 오래된 산업인 만큼 가장 큰 경로 의존성을 나타내는 게 당연하다.
하나의 산업이 발전 경로를 바꾸기 위해서는 충분한 인프라 구축과 사회의 변화 속도를 반영한 교육의 변화가 필요하다. 말이 쉽지 이게 현실적으로 잘 안된다. 대부분은 문제 인식 자체를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경로를 바꾸려면 이익 집단의 이해와 합의도 필요하다. 모든 산업은 시간이 지나면 이익집단이 형성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경로 의존성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드는 예가 영국의 "적기 조례"이다. 산업혁명 시절 자동차가 처음 개발되었을 때, 자동차로 인해 마부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자 강하게 저항했다. 결국 정부는 '적기 조례'라는 걸 제정해서 이익 집단의 저항을 피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자동차가 대세가 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상대적으로 저항이 없는 경쟁국에서 앞서 나가면서 결국 '적기 조례'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과거 산업혁명 시대와 같이 농업도 지금 변화의 기로에 서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탄소중립이라는 전 지구적 어젠다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농업의 미래를 논하려면 경로 의존성을 벗어나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1970년대에는 국민의 40%가 농민이었다. 그 이전에는 대부분이 농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50년이 지난 지금 농민은 인구 대비 4%를 겨우 넘는 수준이다. 예전 농업 종사자는 대체로 젊은 청년들이었다. 우리나라는 젊었다. 그런데 지금 농촌은 65세 이상이 절반을 넘어간다. 농가수도 꾸준히 줄어 약 250만이 넘어가던 농가는 지금은 100만으로 줄어들었다. 이것도 농촌을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정부의 지원 정책이 있어서 가능했다.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농업의 비중도 30%에서 1.6%로 감소했다.
농업에서 큰 이슈 중 하나는 식량자급률 문제이다. 1970년대 곡물자급률은 거의 100%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21% 정도이다. 식량자급률은 45%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식량자급률을 높이기가 굉장히 어렵다. 아래 그래프에 보이듯 농업 산업 구조가 이전에는 식량 작물이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지금 식량 작물은 원예, 축산에 비해 비중이 크게 줄었다. 식량작물의 면적당 소득이 낮다 보니 누군가 농업에 새로 진입할 때 식량작물보다 원예작물 또는 축산업에 종사할 가능성이 높다. 농지는 도시개발이나 공업용지로 계속 전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식량작물 재배 면적이 늘어날 수 있을까?
지금 우리 농업에서 큰 이슈 중 하나는 탄소중립이다. 탄소중립은 향후 10년 간 농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외적 요인이 될 것이다. 2021년 우리나라는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까지 줄이는 국가 NDC 목표를 발표하고 UN에 제출했다. 2018년 기준 온실가스(GHG) 배출량은 7억 2천만 톤, 2030년에는 3억 톤 정도를 줄여서 약 4억 3천만 톤만 배출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탄소중립 목표 연도인 2050년에는 8천만 톤까지 줄이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1]
농업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은 2018년 기준 약 2,470만 톤, 국가 배출량 대비 3.45%에 불과하다. 2030년까지 배출 목표는 1,800만 톤으로 2022년 기준 8년 안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670만 톤을 줄여야 한다. 비율로는 27.1%를 줄이는 것이라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지만, 2050년까지 탄소배출 감축 목표량의 72%에 달한다. 농업 분야는 탄소중립에서 굉장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일 수 있을까?
선진국에서는 농업 분야 탄소배출량 감축 방안으로 육류 소비를 줄이자는 운동이 일고 있다. 축산의 탄소배출량이 일반 작물재배에 비해 더 크기 때문이다. 영국 사례를 보면, 아래 그래프의 보라색 영역이 축산물 소비와 음식물 쓰레기 감축을 나타나는 데, 축산물 소비를 줄이는 게 전체 온실가스 감축량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독일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 역시 비슷한 경로를 따라가고 있다.
이에 따라 시장도 변하고 있다. 세계 육류 소비 시장 전망을 보면 2030년까지 약 28% 정도가 대체단백질식품(대체육)이 기존 육류를 대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고, 2040년에는 약 60%까지 기존 육류를 대체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탄소 중립 실현 과정에서 축산업은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는 농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푸드시스템(food system) 관점에서 보면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소비자와 생산자의 역할이 동시에 중요해진다. 소비자는 음식물 쓰레기 감축, 탄소배출량이 많은 식재료에서 탄소배출량이 적은 식재료로의 전환 등 식생활을 바꾸는 것으로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생산자는 정밀농업 기술의 적용을 통해서 생산성 향상과 온실가스 배출량을 동시에 추구해나갈 수 있다.
이렇게 기존의 농업체계에서 정밀농업으로 생산성이 높아지면 그만큼 토지를 농업용지에서 자연생태계로 돌려줄 수 있게 된다. 결국 시민들의 라이프스타일 변화까지 모든 것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국가의 탄소중립과 생태적 지속 가능성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를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탄소중립 시대에 지속 가능한 농촌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결국은 그 변화를 만들어 나갈 사람이다.
좋은 기술을 개발하고 많이 투자하더라도 결국 혁신은 사람이 만들어간다. 그 혁신을 이끌어갈 주체가 필요하다. 더군다나 농업 기술 패러다임이 디지털 중심으로 재편되어가는 시점에서는 디지털에 익숙한 일꾼이 현장에 필요하다. 디지털에 익숙한 청년들일 수밖에 없다.
귀농, 귀촌 인구가 늘어난다고는 하지만, 사실 농촌에서 2-30대 청년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청년들이 농업에 관심을 가지고 농촌에 정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정부에서도 이런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의성군은 "청년 스마트팜"을 만들어 청년들에게 일정기간 온실을 임대해주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인건비의 일부도 지원한다. 상주군 “우공의 딸기정원” 같은 경우에도 경상북도와 함께 청년들이 딸기 재배를 배우고 독립해서 자신의 농장을 만들도록 돕고 있다. 여기에 참여하는 청년들은 우리의 딸기가 세계에 수출되는 걸 꿈꾼다. 농업을 도전할 만한 사업으로 바라본다.
농업이 청년들에게 도전할 만한 하나의 산업으로 보이려면 예전의 방법이 아닌, (경로의존성을 벗어난) 새로운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디지털 기술이다. 농업기술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미 논에 농약을 칠 때 농사용 드론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농촌 일손이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업용 로봇도 수년 내 활용되기 시작할 것이라 예상된다.
농촌 인구가 감소하며 버스 노선이 대부분 줄어들고 있다. 농촌지역의 접근성을 개선해야 청년들이 유입 될 수 있는데, 도로망을 확충하거나 고속철도를 신설하는 인프라 중심의 접근은 면단위 시골에서는 크게 효용성을 느끼기 어렵다. 그렇지만 자율주행 차량이 등장하면 이러한 문제점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농업, 농촌의 미래는 디지털 기술을 얼마나 빨리 받아들일 것인지가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농촌지역에 디지털 인프라의 구축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게임이나 온라인 쇼핑 등 온라인 기반 라이프스타일이 기본이 된 청년들이 농촌에서 살기 위해서는 인터넷 망이 잘 구축될 필요도 있다. 정리하자면, 농업계에서는 농업과 농촌의 미래를 그릴 때 농촌의 디지털 혁신을 위한 인프라 구축과 실행 주체 형성을 위한 청년 정책을 동시에 논의해야 한다.
예전에는 농촌으로 가는 사람들은 모두 농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농민의 수는 앞으로도 계속 줄어들 것이다. 우리나라는 여러 지원정책을 통해 농가수를 100만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독일은 우리나라 농경지의 10배 면적을 약 30만 농가가 경영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인구 구조를 보면 10년, 20년 내에 농가 숫자가 절반 이상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로봇 스타트업 ‘트랩틱 Traptic’는 AI 기술이 접목된 딸기 수확 로봇을 상용화했다. 로봇 팔이 딸기를 인식해서 익은 딸기를 수확한다. 이 로봇은 굉장히 비싸기 때문에 농가가 구매하거나 임대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수는 없다. 대신, 딸기 수확량 100kg당 수수료처럼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이다. 농가에서 로봇의 수확 서비스를 구매함으로써 딸기 수확 비용이 얼마가 들어갈지 예상할 수 있다.
이처럼 미래에는 농사일 상당 부분이 외주 회사들이 하는, 농업 서비스 시장으로 이전할 것이다. 이미 농촌에는 이런 서비스가 일반적으로 제공되고 있다. 농약은 드론 운영 회사와 계약해서 살포하고 있다. 농약 살포는 이미 외주화가 됐다. 나중에는 파종을 하거나 모내기를 할 때, 수확할 때 다양한 로봇 기술과 디지털 기술이 적용될 것이다. 또한, 이런 농업 기술 서비스를 전문으로 하는 스타트업이 농촌 지역에 생겨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농민은 농장의 경영과 농산물의 품질, 고객에 집중하면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시대로 변해갈 것이다. 문제는 기술 변화에 비해 농업 문화가 따라가지 못하는, 기술과 문화의 괴리감이다.
역시 경로 의존성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 디지털 시대가 오고 있다고 말한다. 디지털 시대에는 디지털 시대에 맞는 접근 방법이 존재한다. 지금까지는 농민이 농기계를 사서 농사를 짓는 게 일반적인 경로였다면, 앞으로는 이 경로가 바뀌게 된다. 경로 의존성을 벗어나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농민은 농기계가 아니라 농업 서비스를 구매해서 최상의 상품을 생산하고, 마케팅하는 경영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여전히 전통적인 농업이 수적으로는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겠지만, 점점 더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규모화된 농업을 하는 청년들이 대세로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그들은 농사뿐 아니라 농업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도 같이 해나갈 것이다.
미래 농업 현장에서 청년의 역할이 점점 더 커져 갈 것이다. 이 부분을 어떻게 청년들에게 인식시키고 농업을 도전할만한 산업으로 인식하게 만드느냐가 농업계의 큰 숙제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기술이 어떻게 변하느냐를 바라보고 있지만, 기술의 관점에서 그 기술이 바라보는 미래는 어떨까라는 생각도 한번 생각했으면 한다.
결국 미래 농업은 탄소중립 대응과 함께 시작된다. 식량안보, 생태계 복원, 농촌의 회복탄력성을 탄소중립 대응 과정 중에 만들어가야 한다.
식량안보, 생태계 복원, 농업의 회복탄력성,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임무가 농업계에 주어져 있다.
이를 위해서는 보통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뭔가 담대한 전환이 필요하다. 디지털 생태계로의 과감한 전환, 청년들이 살 만한 농촌 주거와 환경 개선, 농장규모의 한계를 극복하는 접근 방법론, 그 다음으로 글로벌한 시각 등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그중 하나로 식량안보를 살펴보자.
식량안보를 나타내는 식량안보지수(Global Food Security Index)는 4개의 지표로 구성된다. 경제적 접근 가능성(Affordability), 물리적으로 충분한 공급 역량(Availability), 품질과 안정성(Quality and Safety), 그리고 생태적인 지속가능성(Natural Resources and Resilience)이다. 우리나라가 이 중 높은 점수를 받은 항목은 Availability, 즉 충분한 공급량이다. 2021년 글로벌 식량안보 전체 순위는 32위인데 반해 공급역량 기준에서는 17위를 기록한다. 반면에 빈부격차로 인해 경제적 접근 가능성 점수가 낮게 나타나고 있고, 품질과 안정성, 생태적 지속가능성에서 오히려 나쁜 점수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식량이 부족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지만 실제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농업 R&D 예산으로 1조 원을 쓰고 있다. 이 정도 예산을 쓰는 나라는 많지 않다. 적극적인 투자로 훌륭한 농업 기술이 축적되고 있고, 좋은 품종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국내 시장이다. 예를 들어 기술이 경제성을 갖기 위해서는 충분한 (기술 소비) 시장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농업 기술 시장이 크지 않다 보니 R&D의 투자 효율성이 높지 않다.
그럼 기술 시장은 어떻게 확대할 수 있을까? 이때 등장하는 개념 중 하나가 글로벌 밸류체인(GVC)이다. 좋은 종자와 농기계는 대체로 선진국에서 개발한다. 그리고 이 기술을 활용해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역할은 대개 개도국에서 하게 되고, 농산물을 다시 가공해서 전 세계에 유통하는 단계는 다시 선진국 기업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농업도 글로벌 밸류체인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농업기술을 개도국에 이전해서 농업생산성을 향상하는 건 우리가 대부분 수입하고 있는 식량 공급망의 안정성을 높이는 데 중요하다. 이 경우 우리나라의 농산물 수입시장 규모는 준요한 레버리지로 작용할 것이다. 이 모두가 농업에 대해 우리가 가진 시각을 조금만 확장하면 된다.
탄소중립을 위한 기술투자는 우리나라에서는 투자 대비 효율성이 나오기 어렵다, 오히려 투자 대비 효과가 확실하게 나올 수 있는 국가에 탄소중립을 위한 기술과 농업 생산 시설, 그리고 품종까지 지원해서 해당 국가 농업생산 기반을 강화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글로벌 밸류체인을 통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구조가 만들어진다면 농업도 청년들이 도전할만한 성장 산업이라고 느끼지 않을까?
우리 농업은 충분한 성장 가능성이 있는 미래 산업이다.
[1] 지난 10월 18일 탄소중립위원회는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 ‘2030 국가 온실가스감축목표(NDC) 상향’ 등 2개 안건을 심의·의결했다. 정부 탄소중립 목표 최종안은 2030년 40% 감축·2050년 순배출량 0으로 만드는 넷제로를 목표로 한다. (출처: 정부 탄소중립 목표 최종안…2030년 40% 감축·2050년 순배출량 0,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 표제부 사진은 행사가 열렸던 제주시의 W360을 오르는 계단입니다. 옛날 제주 기상대를 리모델링한 건물이더군요. 옆으로는 제주성의 흔적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