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은 세계 최대 쌀 수입국입니다. 1970년대 짧은 기간 동안 국내 쌀 수요를 넘어설 만큼 쌀 생산이 늘어났지만 1980년대 초 쌀 생산량이 잠시 급감한 이후부터 쌀 수입국으로 전락했습니다. 그 이후 계속 쌀을 수입했습니다. 1980년대 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관심이 많았지만 그에 관한 자료는 찾지를 못했습니다. 아마도 기상재해가 크게 작용했겠죠.
농업계 선배들은 필리핀이 쌀 산업을 등한시하면서 붕괴했다고 말합니다. 언론 기사에도 종종 인용됩니다. 우리나라에서 필리핀은 쌀 산업을 지켜야 하는 논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할까요?
아마도 여기에는 1970년대 말 쌀이 남아돌자 쌀 기반시설에 대한 투자를 줄였고, 그래서 쌀농사가 급격하게 붕괴했다는 시나리오가 가능하겠죠. 그렇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가끔 급격한 쌀 생산 감소가 발생했던 시기가 있습니다. 1971-1973, 1981-1983, 1997-1998년입니다(그래프를 보고 추정이라 연도는 약간 차이 있음). 그렇지만 쌀 생산량은 꾸준히 늘었습니다.
필리핀의 쌀 수입이 늘어난 것도 결국 인구 증가가 가장 큰 원인으로 추정됩니다. 1960년대 2600만이던 인구가 2020년에는 1억 1천만 명으로 늘었습니다. 쌀 수요도 늘었지만, 당연히 쌀 생산량도 꾸준히 늘었습니다. 최근의 평균 연간 쌀 생산량은 1,860만 톤으로 우리나라의 5배가 넘습니다. 인구는 우리나라 대비 2배가 좀 더 되니 굉장히 많은 것이죠. 그리고 생산성도 나쁘지 않습니다. 헥타르당 4톤 정도로 동남아 국가들 중에는 베트남(5.7톤/ha) 다음입니다. 관개 비율은 60% 정도입니다(베트남 90%). 이 수치를 보면 필리핀이 농업 투자에 적극적이었다고 말하긴 어렵겠죠(3).
가끔 급격한 쌀 생산량 감소가 있기는 했지만 필리핀의 쌀 생산량은 꾸준히 늘었습니다. 국민 1인당 쌀 생산량은 우리나라의 1.6배입니다. 필리핀의 쌀 산업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필리핀이 쌀을 수입해야만 하는 이유는 첫째는 인구증가, 둘째는 우리나라처럼 육류나 수입 밀의 소비량이 적기 때문이겠죠. 이건 국민소득의 문제로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입니다.
필리핀은 쌀 가격 안정을 위해 쌀 수입 권한을 정부기관인 국립식품협회(NFA)에만 줍니다. 제한된 양만을 수입하도록 했습니다. 당연히 필리핀의 쌀 가격은 국제 시세보다는 높게 형성됩니다. 이렇게 수십 년 동안 계속되어 왔었죠. 그런데 최근 필리핀의 쌀 산업 정책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쌀을 관세화했습니다.
링크한 기사는 2019년 2월 필리핀의 쌀 관세화 법(RTL)이 통과된 후 필리핀 농업과 국민 생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시아재단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니 이 기사의 시각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대개 무슨 논쟁이 있었을지는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필리핀 국민들은 대개 12~25%의 수입을 곡물을 구매하는 데 사용합니다. 엄청난 지출로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은 쌀값으로 지출되는 돈이겠죠. 그렇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값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논리가 부딪힙니다. 하나는 국내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쌀 수입을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 다른 하나는 쌀 수입량을 늘려서 국민들의 생활비 부담을 낮추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죠.
쌀 가격 통제 시스템을 자유화하고 경쟁을 도입한다는 건 엄청난 도전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엄청난 반대가 있었겠죠. 두테르트 대통령은 관세화와 쌀 시장 가격 자유화를 도입합니다. 국립식품협회(NFA)에서 독점하던 쌀 수입을 35% 관세로 대체해버린 것이죠. 당연히 쌀 수입량이 늘어나면서 수입 쌀 가격은 낮아지고, 국내 농가에 타격이 있을 것이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걸 보완하기 위해 쌀 경쟁력 강화 기금(RCEF)을 만들었습니다. 쌀 관세로부터 충당이 되었는데, 연간 PHP 100억 페소(2400억 원)가 배정됩니다. 기계화, 종자, 신용지원, 기술교육, 기술개발 등에 지원됩니다. 필리핀 농부들은 잘 대응하고 있을까요?
이 정책이 단기적인 부작용은 있었지만 수백만 명의 필리핀 사람들이 더 낮은 값에 쌀을 살 수 있도록 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었고, 필리핀 쌀 생산업은 경쟁력을 갖춘 산업으로 도약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 간의 보호무역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생산성 향상, 농장 수확량 증가, 비용 절감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죠.
필리핀의 실험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현재까지는 그리 비관적이지는 않습니다. RTL이 통과된 후 필리핀은 세계 최대 쌀 수입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필리핀 국내의 쌀 가격을 낮출 수 있었습니다. 자국내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데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농촌, 농가의 소득이겠죠. 결국 생산성을 높여서 베트남 쌀과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단기적인 타격을 받겠지만 곧 회복할 것이다라는 기대는 현재까지는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필리핀을 농업에 대한 투자를 등한시해서 실패한 케이스로 알고 있습니다. 2008년 글로벌 식량위기가 발생했을 때는 쌀을 수입한다고 큰 난리를 치루기도 했습니다. 정권이 존망의 위기로까지 몰렸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필리핀이 주식 산업에 자유시장 경쟁을 도입해 성공한 사례로 발돋움 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계속 지켜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농업을 등한시해서 쌀 수입국으로 전락했다고 단순화하기에는 어렵지 않을까요? 우리는 필리핀보다 얼마나 더 잘 하고 있을까요?
그밖에 고려할 사항
필리핀의 농업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Masagana 99 프로그램부터 들여다 봐야합니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녹색혁명과 비슷한 쌀 증산 정책입니다. 그외 필리핀의 농업은 다른 개도국과 마찬가지로 지주와 소농의 문제도 겹쳐있고, 여기에 농업금융의 실패, 정치 부패 등 복잡한 사회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식 들이닥치는 자연재해도 역할을 합니다. 기상재해와 경제위기에 회복탄력성이 떨어지는 것도 한 원인이겠죠. 장기적으로는 관개시설과 경지정리, 기계화, 기상재해에 대비한 보험제도 등에 얼마나 돈을 쓰냐가 관건으로 생각됩니다.
1) Why did the Philippine Government fail to Meet Domestic Consumption Needs?
2) Fighting the Good Fight: The Case of the Philippine Rice Sector
3) Philippines - Rice production in the five Southeast Asian countries, Vietnam, Thailand, Myanmar, Philippines, and Cambodia
4) Rice and Philippine Politics
5) Masagana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