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수미' 왕좌와 대한민국 농업 R&D의 잃어버린 고리
'수미', 지난 50년간 한국의 식탁을 지켜온 감자입니다. 하지만 이제 이 노장도 힘이 빠졌습니다. 품종은 늙었고 기후는 바뀌었습니다. 진즉에 후계자에게 왕좌를 넘겨줬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 병해충 저항성은 떨어지고 기후 위기엔 속수무책이 되었습니다.
이건 단순히 감자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농업 R&D 시스템의 고질적 문제를 지적하고 싶어서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본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번 말하지만 단순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수미는 1961년 미국 위스콘신대학교에서 개발된 '수페리어(Superior)'라는 품종입니다. 1975년에 도입되어 1978년 장려품종으로 결정됐죠. '빼어난 맛(秀味)'이라는 뜻의 이름엔 원품종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980년 이후 수미의 독주가 시작됩니다. 조생종인 수미는 봄·가을 이모작이 가능했고, 전국 어디서나 일정한 수확량을 보장하는 '재배 안정성'이 탁월했습니다. 껍질이 두껍고 단단해 장거리 수송과 저장에 유리했으며, 찌개·조림·볶음 등 한국식 조리에 두루 어울리는 중간점질 특성으로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수미는 전분 함량이 약 13% 수준으로 낮아 포슬포슬한 맛이 적고 가공성이 떨어집니다. 당분이 높아 그냥 튀기면 갈변하기 때문에 감자칩을 만들려면 저온 진공 프라이어라는 고비용 설비가 필요합니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수미칩'을 성공시킨 농심의 집념은 대단합니다. 경영진이 농업에 진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농업계는 최소한 감사패라도 하나 드려야 합니다.
40년이 넘으면서 수미는 바이러스에 약해졌고 생산성도 떨어졌습니다. 고온다습해진 여름 기후는 수미의 역병 취약성을 더 부각시켰죠. 입맛이 세분화되며 두백(분질), 홍영(기능성) 등이 시장을 파고들었지만, 수미는 여전히 60% 수준의 점유율을 유지합니다. 이는 종서 공급 시스템과 수미에 익숙해진 유통 시장의 거대한 '관성' 때문입니다.
그럴수록 피해는 누적되겠죠.
이 관성을 깰 후계자로 기대받은 것이 농진청이 개발한 '다미'였습니다. 수량성은 수미보다 5% 좋고, 전분 함량은 15%에 달해 식용과 가공용 모두 적합했습니다. 고온 생리장해에도 강해 수미를 대체할 1순위 후보였습니다.
개발진은 2005년부터 7년간 육종하고, 3년간 4개 지역에서 적응성 시험을 거쳐 2019년 논문을 냈습니다. 2022년 언론은 '45년 수미 시대의 종언'을 예고했고, 2023년 공식 출시와 분양 계획까지 발표됐습니다. 실제 민간에 보급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장도 변했습니다. 기업 및 외식 시장 비중이 40%까지 커지며 규격과 품질이 중요해졌습니다. 한 기업이 국산 가공용 감자를 찾던 중 '다미'를 추천받았고, 여러 농가에서 실증재배를 하며 농심 등과 함께 연구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재배 3년 차에 돌연변이가 발생하며 품질과 균질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결국 사업화는 포기되었습니다.
그 사이 오리온의 두백·선농, 농심의 대선·농심 22호, 그리고 미국 품종 대서(Atlantic, 1976년 개발)가 가공 시장을 선점했습니다. 국산 품종은 수백 종이 개발됐고 추백처럼 일부 선전하는 품종도 있지만, 국가 기관의 옄구 역량에 비해 시장 확산은 다소 미약합니다. 오히려 민간 기업의 품종 이름만 가끔 들릴 뿐입니다.
다미는 개발 후 3년 정도의 제한적인 현장 실증만 거치고 상업화를 시도했습니다. 과연 충분했을까요? 새로운 품종을 계속 '개발'하는 노력보다, 유망한 품종을 '대규모 농가 실증'을 통해 검증하고 다듬는 데 집중했다면 어땠을까요?
수미를 도입한지 벌써 50년이 지났지만 왜 아직 국내 환경에 적합한 대표 감자 품종이 없을까? 이건 한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고민을 해야 합니다. 아니면 감자마저도 시장을 상당부분 잃을 겁니다.
품종 개발은 신약의 화학물질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 물질이 약이 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드는 '임상시험'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감자 역시 실험실의 수치가 아니라 광범위한 농가 실증을 통해 산업적 안정성을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시스템은 '실증'과 ‘산업화’를 연구의 연장으로 보지 않습니다.
매년 씨감자 기술을 해외에 전파한다는 뉴스는 나오지만, 정작 국내 시장의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연구가 실험실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키위 등 다른 품목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별 연구자의 성과를 넘어, 산업적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전략적 접근과 혁신이 절실합니다.
누군가는 농업 현장의 실증재배를 연구로 인정하고, 실험실 연구비보다 더 많은 예산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품종은 등록한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6천억 원 넘게 쓴 골든시드 프로젝트에도 불구하고 왜 변변한 종자 기업 하나 없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학자의 옳은 소리가 반드시 산업 전략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분들은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이해관계자이기도 합니다.
'수미' 같은 품종 하나만 제대로 정착시켜도 한국 감자 산업은 향후 30년을 다시 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시스템은 품종 개발까지만 R&D로 보고, 시장에 안착시키는 과정은 외면합니다. 이제 KPI를 '등록 건수'가 아닌 '시장 점유율'과 '산업 기여도'로 바꾸어야 합니다.
농업 R&D 예산을 아무리 투입해도 지금의 방식으로는 결과가 뻔합니다. 연구(R&D)란 무엇인지 그 본질을 다시 생각해 볼 때입니다. 산업적 전략 없는 연구는 공허한 예산 낭비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농업의 미래는 실험실의 데이터가 아니라, 농장에서 시장에서 증명되는 성과에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