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위해 행복해져야겠다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번역, 문예출판사, 2019년, 232쪽
스무 살, 부모님께 남자 친구를 소개한 자리에서 아빠가 숙제를 내셨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둘 다 독후감을 써서 메일로 보내라고. 나는 크면서 늘상 겪는 일이었기에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었는데 당시 남친에게는 충격적이고 버거운 부담이었을 것이다. 일찌감치 읽고 휘갈겨 써서 메일을 보낸 나와 달리 그는 기한이 다 될 때까지 다 읽지도 못했고, 자신이 밤새 책을 읽는데 내가 다른 친구들과 술 먹고 놀았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 (진작 읽던지 그럼.) 여친 아버지에게 독후감 숙제를 내야 하다니 그가 부당하다고 느낄 만도 하지만, 싫은 일도 나를 위해 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에 과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지 않고 강 건너 불구경했다. 그는 데이트 중 피씨방에서 겨우겨우 독후감을 마무리 지어 약속한 날에 보냈고, 아빠는 그의 독후감을 읽고 '네가 이렇게 형편없는 글을 쓰는 애를 만날 줄은 몰랐다. 실망했다.'고 말씀하셨다. 다행히 그는 지금의 내 남편이 아니다. 아빠도 너무 실망한 나머지 이후에는 내 연애 상대에게 그런 숙제를 내지 않으셨다.
고전이라는 이 책은 내게 딱 그 정도의 의미였다. 전 남친을 애먹인 책. 내 감상은 '재미없네, 별로네' 정도였다. 뭐 당연한 얘기를 이렇게 구구절절 써놨어, 하는 생각이 강했다. 두꺼운 책도 아니라서 휘리릭 읽고 휙 던져버렸다. "자본주의와 사랑"이라는 주제로 책을 함께 읽고 나누고 있는 매실 독서단에서 이 책을 읽는다고 했을 때 이번 주는 제대로 쉬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는데 웬걸, 두세장 넘기기도 전에 무릎을 치며 끄덕이기 시작했다. 스무 살의 내가 휙 읽고 던져버릴 수 있었던 건 이 책에 쓰여있는 단어들을 소리 내 읽을 줄만 알았지 담긴 의미는 하나도 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랑도 해보고, 결혼도 해보고, 아이도 낳아 키워보고 20여 년이 지나 다시 읽은 이 책은 과연 고전일 수밖에 없다고 탄복을 하게 만들었다.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손으로 내용을 받아 적으며 공부하듯이 읽었다. 그리고 그간의 삶을 돌아보았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와 지금 나는 어떻게 다른가. 별로라고 여겼던 이 책의 내용을 나는 얼마나 실천하며 살았나. 그동안 내가 한 사랑은 과연 '성숙한 사랑'이었을까. 여기 쓰인 것만 실천해도 정말 성숙한 사람으로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실행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20여 년 만에 다시 읽은 지금의 감상이다.
읽으면서 흠칫흠칫 놀랐던 게 발도르프 교육의 근간인 루돌프 슈타이너의 인지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현대 사회의 사랑의 결여에 대한 비판,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한 훈련 방법, 자유를 바탕으로 사랑하는 것, 명상하고 현재에 집중하라는 지침 등 프롬과 슈타이너가 아는 사이였나 의문이 생길 정도로 비슷한 내용이 많았다. 찾아보니 슈타이너가 40년 먼저 태어났고 프롬은 나치 치하 독일을 탈출해 미국에서 살았으므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 당시 학계에서 널리 퍼진 개념이라 그런 것인지 철학 알못, 사회학 알못인 나는 알 방도가 없지만, 어쨌든 놀라웠다. 첫째를 낳고 5년 이상 인지학을 삶의 지침으로 삼고 살다 둘째를 낳고 독박 육아에 지쳐 내 육아원칙을 하나씩 버리면서 '발도르프 교육이고 나발이고 다 꺼지라 그래' 하는 모드였는데, 의외의 책에서 익히 알고 있던, 그러나 지키지 못하고 있던 삶의 태도에 대해 읽게 되니 반갑기도 하고 곤란하기도 했다.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한 훈련 방법들이 다 좋은 말이고 옳은 말임에 동의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회사를 다니거나 육아를 하면서는 도대체 실천할 수가 없는 것들이라는 불만이 고개를 드는 것 역시 이 책과 발도르프 교육의 공통점이다. 하루하루 아이들과 생존을 하는 것만으로 나를 다 갈아 넣고 있는데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해 뭘 더 어떻게 노력하라는 요구는 아무리 좋은 소리라도 허공에 흩어지고 만다. 실천하기 어렵다고 외면해버리면 그만인가 하면, 그것도 힘들다. 아예 동의를 하지 않으면 모를까 다 맞는 말이고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한 번 드니 행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마음 한 켠에 생겨버렸다. 그래서 입으로는, 손가락으로는 '발도르프 꺼져' 하면서도 한살림에서 장 보다가 지역 발도르프 학교 설명회 포스터를 보고 멈춰 서게 되고, 업데이트된 웹툰을 보면서 숟가락을 입에 넣다가 밥을 다 흘릴 때 현재에 집중하고 전념하지 않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프롬과 슈타이너가 지금 내 삶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면 나를 손가락질할까? 내 일과가 그들의 지침과 전혀 다르지만 왠지 나를 비난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프롬은 사회학자로서 개개인이 성숙한 사랑을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책을 쓰기도 했겠지만, 이렇게 되도록 사회를 개선시키자는 방향 제시를 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슈타이너 역시 아이들에게 이러한 교육이 좋다는 이상을 설파한 것이지 애쓰고 있는 엄마를 비난하기 위해 발도르프 교육을 정립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상을 향해서 사회가 변해가도록 개인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당장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숙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고 좌절하거나, 나나 타인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철학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가되, 일상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행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프롬이 말한 '합리적 신앙'의 실천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늘 스스로를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좋아하는 만화도 좋아하는 가수도 좋아하는 배우도 좋아하는 일도 좋아하는 취미도 많다. 이 책을 읽고 돌이켜 보면 자각하지 못하는 무의식 차원에서 분리 불안을 느끼고 집단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일이나 오락 형태와 합일을 추구하며 세상을 향해 사랑을 뿜어댔던 것 같다. 창조적 활동을 하며 대상과 하나가 되는 그 몰입감, 일체감도 사랑했다. 대인간적 사랑도 늘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럼 이 책에 나온대로 '사랑하며' 잘 산 걸까. 결정적으로 나는 나와의 사랑에 소홀했다. 주변 사람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 지가 원하는 걸 그렇게 줄창 요구하고 추구하며 사는 인간이 자기애가 부족하다고 고백하다니. 나는 명상의 중요성을 줄기차게 들으면서도 줄기차게 하지 않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더라도 어거지로 일정에 질질 끌려다녔으며, 물리적으로 아이들과 떨어져 혼자 있을 때조차 나 홀로 있지는 않았다.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았고, 폰을 놓더라도 책을 들고 있었다. 아이를 낳고 이런저런 공부를 하면서 알아차림을 제법 하게 되었다고 자만하기도 했는데 사실 깊이 있게 나를 마주하는 시간은 계속 피했다는 사실 역시 알아차리고 있었다. 가장 기본인 자기애 훈련이 안 되었기에, 그 바탕 위에 올려야 하는 지식을 더하고 다른 기술을 훈련한다고 해도 진정으로 성숙한 사랑에는 도달할 수가 없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둘째를 맞이하며 나와 가족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전혀 몰랐던 새로운 세상을 매일 알아가고 있다. 나에게 더 많은 사랑이 요구되지만 나는 어느 때보다 더 지쳐있고 에너지 고갈을 많이 느낀다. 이 시점에 이 책을 다시 읽은 것은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질 것인지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일단 가장 시급한 것은 내 안의 핵심을 만나고 사랑하는 일이다. 진짜 사랑을 하기 위해서 나는 쉬고 행복해져야겠다. 그래서 가족들과 아침을 먹고 세수를 하고 가방을 싸서 나와서 혼자 달달구리를 마시며 이 책 리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