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는 싶고 시간은 없어서 한동안 새벽에 일어났다. 5시에 일어나서 책 읽거나 글을 쓰다가 아이가 깨면 부랴부랴 아침을 차려서 먹이고 등원 준비를 했다. 한두 시간의 고요가 너무나 절실했다. 아침잠이 많아서 오죽하면 학창 시절에 엄마께 “너는 잠 때문에 망할 거다”라는 말을 듣던 내가 새벽 기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는 ‘미라클 모닝’을 하다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지금은 추워서 7시에 일어난다. 졸음은 이기겠는데 추위는 못 이기겠기에 이불 속에 머문다. 그래서 아이들 재우고 밤에 글을 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밤 12시가 훌쩍 넘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면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지만 작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가정 보육을 하는 날이 많기도 했고, 둘째 꿈별이가 월~금 내내 재활치료를 받기 때문에 아이들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은 점심 식사 시간을 포함해서 두세 시간 남짓이다. 그래서 점심을 대충 빵이나 라면으로 때우거나 아예 먹지 않을 때도 많다. 세상에서 제때 밥 먹는 게 제일 중요하던 나였는데, 밥 먹는 시간 안 주고 일 시키는 상사에게 속으로 저주를 퍼붓던 나였는데, 내 시간이 너무 없으니 밥도 마다하고 책 보고 글 쓰게 되었다.
첫째 고래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바로 치료실에 갔다가 다시 운전해서 꿈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두세 시간을 확보할 수 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날이 많다. 꿈별이는 주로 치료를 받는 대학병원 9개과에 정기적으로 검진을 가야 하고 다른 대학병원의 재활의학과와 가까운 소아과도 다니기 때문에 오후 시간에 병원 진료를 보는 날이 많다. 첫째 역시 치과나 소아과를 갈 때가 있기 때문에 그 짧은 오후 시간을 오롯이 내 시간으로 보내는 날은 매우 드물다. 자동차 검진을 받거나, 은행이나 행정복지센터에 가서 볼 일을 보는 등의 잡다한 일도 그 시간에 처리해야 한다. 내 몸이 아플 때는 정형외과나 한의원도 들러야 한다.
퇴근한 남편이 “낮에 뭐 했어?”라고 물으면 피가 거꾸로 솟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상 사람들은 전업 엄마는 아이들 어린이집 보내고 6시간 동안 땡가땡가 노는 줄 아는 모양이다. 건강한 고래 한 명 키울 때도 그 시간 중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지금은 거의 없다고 봐야 타당하다.
그런 와중에 책을 읽고 글을 쓰려니 늘 시간에 쫓긴다. 아이들 잘 때 한두 시간, 아이들 없을 때 두세 시간, 아이들 하원하고 나서 잘 놀아주면 그 옆에서 10분, 30분… 그렇게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글을 쓴다. 블로그에 일기 같은 글도 쓰고, 책 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에 대한 공들인 리뷰도 쓰고, 조각보 원고도 쓴다. 컴퓨터 앞에 앉을 시간이 도저히 안 나면 아이를 재우면서 어둠 속에서 핸드폰 메모장을 연다. 글감 리스트도 정리하고, 한두 문장씩 글을 쓰기도 한다.
주변에서는 왜 사서 고생을 하냐고 나무란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고 그 시간에 살림이나 애들 집밥 해주는 데 더 신경 쓰라는 조언도 종종 들린다. 가족들은 “몸이 아프다면서 왜 그 시간에 자거나 쉬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냐”고 성화다. 그런데 시간을 쪼개고 틈을 내서 내 시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스트레스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아 신경이 곤두선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소리 지르게 된다. 발에 채는 빨래거리에 공연히 발길질하게 된다. 설거지를 간신히 그릇 깨지지 않을 정도로 과격하게 하게 된다(그러다 깨기도 한다).
사실 살기 위해 쓰는 거다. 친구를 만날 시간도 없고 전처럼 육아 동지들과 소소한 일상 채팅을 할 여유도 없는 내가, 토해내고 쏟아내는 글쓰기마저 하지 않으면 진작 베란다 밖으로 뛰어내렸을지 모르는 일이다. 20대 때 읽은 아멜리 노통브 소설 중 글을 쓰던 주인공이 ‘자살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는 대목이 있었는데 그때는 허세 가득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 문장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은유 작가는 <다가오는 말들>에서 “자꾸 몸에 들러붙는 생각, 솟아나는 얘기, 복받치는 불행”(145쪽)을 쓴다고 했다. 그게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든 쓰게 된다. 전업 엄마라 시간이 많아서 쓰는 게 아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쓴다.
돌이켜보면 전에도 늘 무언가를 쓰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건 다운증후군을 가진 꿈별이를 만나면서부터다. 상상조차하지 못했던 큰 고통을 감당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동시에 내가 여기에 있다고, 이렇게 피눈물 흘리며 있다고 세상에 알리는 외침이었다. 장애가 있지만 너무나 사랑스러운 내 아이가 이 세상에 있다고 소리치는 길이었다. 그런데 꿈별이를 맞이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정작 긴 시간을 내지 못하니 점점 꿈별이 이야기를 미루게 됐다. 오래 고민하고, 지난 상처에 눈물짓기도 하고, 적절한 단어를 고르다 보니 아이들 보며, 아이들 잘 때, 아이들 없을 때 짬을 내서 쓰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가장 쓰고 싶은 글을 쓸 시간이 제일 없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답답하고 조바심이 났다.
그러던 중 아이를 키우면서 글을 쓴 작가 니콜 굴로타의 <있는 그대로의 글쓰기>를 읽었다. 저자는 작가의 삶을 계절에 비유하는데 그중에 ‘양육의 계절’을 지나온 여정이 솔직하게 쓰여 있다.
방해받지 않는 시간? 그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152쪽)
글은 한 문장씩 쓰였다. 남은 점심시간 30분 동안, 자동차 시동을 끄기 전, 헨리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나오면서,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 위에서 스마트폰 메모 앱에 한 줄씩 입력하기도 했다.(153쪽)
이 계절 동안에는 글을 얼마나 썼는지, 매주 블로그 포스팅을 몇 번이나 했는지, 그 어떤 것에도 신경 쓰지 말자. 이 계절은 당신이 근본적으로 쉬운 것들, 매 순간마다 당신이 느끼는 것들만을 봐야 하는 시기다. 당신이 처한 상황상 도달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스스로를 힘들게 할 까닭은 없다.(157쪽)
만약 당신이 지금 아이를 달래면서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거나, 새벽 2시에 맞춰놓은 알람에 깨어나 젖병을 데우고 아이에게 먹이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쳐 있다면, 그 계절이 짧지 않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양육의 계절은 다른 계절에 비할 바 없이 길다. 최소한 몇 년이다. 그 몇 년을 맥없이 흐르게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잘 돌보면서, 도움을 청하면서, 감정에 솔직하면서, 현명하게 보내야 한다.(174쪽)
내 얘기였다. 나는 짧지 않은 양육의 계절을 지나고 있고, 꿈별이는 느리게 크는 아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긴 계절을 보낼 것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빨리 글을 써서 결과물을 내고 싶어서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대체 진짜 중요한 글은 언제 쓸 거냐고, 빨리 끝낼 수 있는 글만 자꾸 써서 언제 꿈별이 이야기를 진득하니 앉아서 쓸 거냐고, 나 자신을 다그치고 있었다. 내가 나를 돌보지 않고, 도움도 청하지 않으면서, 현명하지 않게 이 계절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것들을 선망하며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내 성취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직 너무 부족하다고, 아직 한참 멀었다고 폄하하고 있었다.
이 책을 보며 마음이 아팠고, 동시에 크나큰 위로를 받았다. 이 계절을 먼저 보내며, 내가 하듯이 스마트폰 메모 앱에 한 줄씩 쓰면서 끝내 책을 낸 작가가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어차피 내 이야기는 나만 쓸 수 있는데 빨리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조바심 낼 필요도 없고, 타인의 성취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나는 오로지 내 삶만 살 수 있기에, 내 글만 쓸 수 있기에, 누구와의 비교도 필요치 않다. 그저 이 계절을 지나고 있는 나를 온 힘을 다해 돌보고 사랑해 주는 것 외에 다른 일은 필요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루쯤 글을 쓰지 못해도, 블로그 포스팅을 못해도,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도, 나에게 필요한 쉼이었다고,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게 되었다. 추위 때문에 미라클 모닝을 포기하고도 자책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이 책 덕분이다.
나는 아직은 전업 엄마인 작가다. 내 시간의 대부분을 무급 돌봄 노동에 할애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쓰는 시간이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길 바라는, 숨 고르고 있는 작가다. 전업 엄마의 쓰기는 이토록 간절하고 처절하고 느리다. 꿈별이를 만나 시작하게 된 글쓰기는 꿈별이의 성장 속도만큼이나 더디다. 또래보다 늦어도 자기만의 속도로 매일매일 자라고 있는 꿈별이를 보며 나도 나만의 속도로 매일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에세이레터 <조각보> 27호(2021.1.26.)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