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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림 Oct 28. 2021

있지만 없는 아이로 만드는 사람

<있지만 없는 아이들> 읽고 쓰기


"바보라서 그래요. 원래 모자란 애들이 고집이 ."



강사의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연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은 아집이고 편협한 거라고 말하면 재미가 없다고 느껴서 그런 걸까. 굳이 '바보', '모자란 애'가 소환되어 나왔다. 4~5년 전의 나였다면 피식 웃고 지나갔을 문장들이다. 핵심 주제가 되는 말도 아니고, 낮은 지적 능력을 비하하려는 의도를 갖고 한 말이 아님도 알고 있다. 그래도 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 아이가 지적장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보', '모자란 애', '병신' 등의 단어는 과거의 내가 자주 썼던 단어들이다. 나는 욕을 즐겨 했다. 바르고 고운 말, 예쁜 말 쓰는 여자애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상스럽고 발랑 까지고 싸가지 없는 계집애이길 택했다. 대학교 MT 때는 남자 후배가 내게 고기 구우라고 하기에 "이 병신 같은 게, 내가 여자라서 네가 처먹을 고기를 구워 대령해야 되겠냐"고 30분 동안 쌍욕을 해서 울렸다. 군기 잡으려는 갓 제대한 복학생 남선배에게도 악 지르며 욕했다. 여학생이 정원의 10%도 안 되는 공대에서 살아남는 나름의 방법은 남자보다 더 강한 마초가 되는 거였다. 함부로 건드리면 귀찮아지는 쌈닭으로 소문나자 적어도 내 면전에서 허튼소리를 하는 남자는 없어졌다. 그때 자주 쓰던 욕 중에 장애를 비하하는 표현이 많았다.



장애인식이 바닥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비장애인으로 살면서 장애인을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공교육 12년 동안 장애를 가진 친구를 만난 적이 없었다. 대학에 와서 동아리 선배 중에 한쪽 손이 없는 장애인을 만났지만 그 선배는 그쪽 소매를 늘 주머니에 넣고 다녀서 가까운 사람 외에는 장애 사실을 몰랐다. 이후로도 종종 지체장애인을 만난 적은 있지만 지적장애나 자폐성 장애를 가진 발달장애인을 만난 적은 없었다. 가까이서 만난 적이 없어도 장애 비하, 혐오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만난 적이 없기에 지적장애인의 존재를 인식하거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동네 바보 형'이 어딘가에 있겠지,라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여겼다.



둘째를 데리고 처음 재활의학과 진료를 보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비통하고 참담한데 진료를 기다리거나, 치료를 받으러 온 발달장애인, 장애 아동들, 그리고 그들의 보호자들의 웃는 모습이 너무 생경했다. 어눌한 발음으로 서로 인사를 건네는 성인 장애인들, 깔깔 웃는 보호자들, 서너 살부터 많게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걷기 위해 훈련을 받거나 교구를 손가락으로 잡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 등이 보였다. 치료사들은 친절하게 웃으며 격려하고 있었다.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어떻게 웃을 수 있지? 어떻게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슬프지 않은가? 괴롭지 않은가? 아니 그보다, 이 많은 장애인은 여태 다 어디 있었던 거지? 살면서 가장 많은 장애인을 본 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웃으면서 치료실을 다니게 됐다. 아이는 담당 치료사를 만나면 좋아서 팔을 벌려 파닥거리고, 의료진은 "아유 귀여워"라며 아이를 안아주고 치료를 시작한다. 복도에서 자주 마주치는 보호자와 웃으며 이야기도 하게 됐다. 치료실 다니는 게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이 될 즈음 알게 됐다. 발달장애인들은 병원이나 복지관 등에 격리되어 있기에 그동안 내가 마주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비장애 중심인 세상은 그들에게 너무나 불편해서 집 안, 시설 안, 병원 안에서 지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숨은 적이 없지만, 존재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자란 애'를 비하한 그 강사도 가까이에 지적장애를 가진 발달장애인이 있었다면 함부로 비하 표현을 쓰진 않았을 것이다. 그분 주변에는 똑똑하거나, 일반적인 수준의 상식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비장애인만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장애인이 있다고 해도 신체가 불편하지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만난 적이 없기에 잘 모를 테고, 잘 모르니까 비하를 하면서도 그 사실을 인지조차 못할 것이다. 둘째를 낳고 페이스북에서 장애 관련 인물이나 페이지를 팔로우하고 있는데 다른 장애 유형과 달리 발달장애인은 당사자가 SNS 활동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 가족이 대신 소식을 전한다. 발달장애인은 전체 장애인 중 10% 정도로 수가 적고, 당사자가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장애 인식이 더 열악하다. 분명 존재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거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언니를 둔 인친이 오늘 이런 글을 올렸다. "오늘은 언니 혼자 외출을 했는데 동네 단골 가게 이모와 미용실 디자이너가 친절히 대해줘서 '너무 행복한 날'이라고 즐거워했다. 언니는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만으로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는 엉엉 울어 버렸다. 가게에서, 미용실에서 받는 당연한 친절이 지적장애를 가진 누군가에겐 손에 꼽을 만큼 특별하고 행복한 일이라는 게 슬프고 화가 났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정은혜 캐리커처 작가는 대중교통으로 통학하다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한 뒤 시선 강박에 시달렸다고 했다. 눈에 보이지 말아야 하는 존재, 가게에 들어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만으로 불친절과 따가운 시선을 맞닥뜨려야 하는 존재가 내 아이의 미래라고 생각하면 목구멍을 돌덩이가 막고 있는 느낌이다.



미담 제조기인 국민 MC 유재석조차 2021년에도 여전히 정준하를 '바보 '이라고 놀린다. '바보', '병신', '모자란 '라는 표현을  내가 만난 강사도 무수히 많은 '선량한 차별주의자'  하나일 뿐이다. 나에게는 그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순간 박차고 일어나 "당신은 지금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을 비하했습니다. 그런 차별 표현은 삼가주시죠!"라고 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씁쓸한 미소를   분위기를 맞추며 앉아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장애를 가진  아이를 세상에 없는 존재로 만드는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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