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엄마 아빠에게 뭘 사달라는 말을 못 했다.
나때는(..) 지금 나오는 것 보다 허접한 야들야들한 코디 스티커, 예쁜 무늬가 있는 색종이들, 다이어리, 다꾸를 위한 모든 반짝이고 말랑한 스티커 등등 이런 게 갖고 싶었다. 다이어리 속지 중 예쁜 것들을 교환하는 것이 우정의 증표였고, 코디스티커 한두판이면 한 시간 가상 공주놀이는 뚝딱이었다. 요즘 초딩을 보니 갖고노는 것들의 질만 좋아졌지, 대략 비슷하게 노는 것 같아 웃기더라.
아무튼 나는 다이어리도 없었고, 엄마가 코디스티커 하나 사주냐고 했을 때도 본능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어떻게 애들하고 놀 때면 기증받은(??) 아이템을 바꾸고 바꾸고 해서 창조경제를 실현했어서 딱히 불편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엄마가 사주는 것만 쓰다보니 배부른 소리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난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필통도 멋없고, 가방도 Jansports 매고싶은데 이상한 거고, 나도 로엠걸즈(공주풍 소녀 의류브랜드) 입고싶은데 초록색 칠부바지나 입히고.. 진짜 어려운 집에 비하면 말도 안되는 불평이긴한데 그래도 갖고싶은 걸 말하지 못하는 소녀의 상대적 불만은 있을 수 있으니까 뭐.
그러다가 5학년쯤 되었나, 나도 조금은 당돌한 나이가 되었고 그때 유행하던 부르부르 강아지 캐릭터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부루부루라고 읽던가, 그 달달 떨고있는 흰 강아지를 기억하시나요. 1학기가 시작하기 전 한겨울에 엄마가 이마트에서 공책을 몇권 사다주긴 했는데, 이상하게 그 때는 그 파스텔색 공책을 가지지 못하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문구점을 몇번씩 오가면서 어찌나 눈에 밟혔는지...
(이 두근거림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쇼핑>이라는 것이었다)
마침 외할아버지가 집에 오셔서 학교갈 때 필요한 건 없냐고 하시길래, 눈 쌓인 거리를 할아버지 손잡고 숨가쁘게 걸어가 드디어 부루부루 공책을 4권이나 장만했다!파스텔 색깔별로 연노랑, 하늘색, 연보라색, 연분홍색이 있었고 몇달 동안 꿈꿔온 예쁜 공책을 가지게 되니 얼마나 행복하고 마음이 든든했는지..반짝거리는 공책을 책상에 쌓아두고있으니 공부고 뭐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러고 문제는 이틀 정도 후였는데,
엄마는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기적 잡도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별 것 아닌 것으로 시작해서 약 세시간 동안 메인으로 삼은 것은 '이 추운데 늙은 할아버지를 저기까지 데려가서 공책이나 사달라고 하다니 넌 그러고도 인간 새끼냐, 공책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아주 눈에 뵈는 게 없냐' 는 것이었다. 순화해서 써놨지만 인간쓰레기, 개같은 년, 너네 성씨들은 인간도 아니다 등등 늘 그렇듯 할 수 있는 모든 욕설 레파토리가 반복되었는데, 웬지 나도 그 순간에는 '이 추운 날 할아버지를 거기까지 데려가서'에 꽂혀서 내가 정말 물욕에 눈이 먼 몹쓸 년이 된 것 같고, 할아버지가 불쌍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해서 진심으로 반성하며 오열했다. 이런게 진짜 가스라이팅인지, 그 순간부터 웬지 부루부루 공책만 보면 한숨이 나오고 더이상 예뻐보이기는커녕 찢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나중에 생각할수록, 아니 할아버지가 그때 아무리 늙어도 우리집까지 자전거도 타고오시고 했는데 마치 내가 100살 노인을 눈보라에 질질 끌고 간 것도 아니고..고작 500원짜리 공책 4권 샀다고 할아버지 간이라도 빼먹은 양, 없는 살림에 혼자 1등석 비행기표라도 끊은 양 인간도 아닌 무엇이라고 3시간을 개패듯이 팬 건 너무하지 않나.
내가 유일하게 한 번 갖고싶었던 걸로 그렇게 인격이 말살되어버리고 나서 나는 더 원하는 건 우물쭈물 말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험난한 세상을 거치며 원하는 것만 잘 얘기하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가 말한 늙고 가엾은 할아버지는 지금도 멀쩡히 서울까지 오셔서 점심을 드시고 가시고, 거의 매달 20만원 정도씩 나에게서 용돈을 받고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