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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솜사탕 Oct 21. 2023

우리의 취향은 평행선을 달려: 아이돌 덕질 계보 추적기

달력상 날짜만 9월일뿐, 여전히 K-무더위가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던 2023년 9월의 어느날. 현재는 캐럿이지만 최초에는 팬지오디였던 나와, 현재는 아미지만 역시 최초에는 팬지오디였던 내 친구는 함께 인천 송도에서 열린 'KBS 대기획 god ㅇㅁㄷ 지오디' 콘서트장에 도착했다.


KBS는 코로나가 시작되었던 해부터인가, 몇년 전부터 명절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만한 가수를 초대해 콘서트를 열어왔다. '명절', '국민', '대기획' 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 콘서트, 올해의 주인공은 god였다. 나훈아, 심수봉, 임영웅, 송골매에 이어 god가 이름을 올린 이 어마어마한 라인업을 곱씹으며, 20년따리 아이돌 덕후 둘은 일종의 웅장함 비스무리한 걸 느끼며 스탠딩석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무더위속 체력과 도파민을 등가교환한지 두어시간 지났을 때쯤, 이 역사적인 콘서트를 축하하기 위한 축하 메시지 영상이 나왔다. 처음에는 박진영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둘 다 깔깔 웃었다. 그러다 방시혁이 나왔다. 웃음기가 사라졌다. 우리는 갑자기 숙연해졌고,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해버린다.


아, 나의 20년간 이어진 이 덕질 취향은 사실상 방시혁이 만들어낸 것이구나. 20년 동안 우리는 저 사람의 취향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내 취향이란 도대체 뭘까?




아이돌 덕질 세계에 한 번이라도 발을 담가본 적이 있다면 SM 아이돌을 향한 내리사랑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말 그대로 SM 소속 아이돌을 세대별로 쭈욱 좋아해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오늘 소개할 이 친구는 초등학교 시절 신화로 시작해, 동방신기와 샤이니를 거쳐 현재는 NCT에 정착한 SM 내리사랑의 전형 그 자체다.


이 친구 역시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신화에 입덕했다고 하니, 덕질이라는 행위를 최초로 한 시점이 나와 엇비슷했을 것이다. 그리고 30대가 된 지금까지도 개인사로 인한 크고작은 부침은 있었겠으나, 어쨌든 지금까지 꾸준하게 덕질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우리는 동시대에 함께 덕질을 해온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평행세계를 살아왔다.


나: god - 인피니트 - 세븐틴

친구: 신화 - 동방신기 - 샤이니 - NCT


친구는 완벽한 SM 남자아이돌 내리사랑의 길을 차분히 걸어왔다(엑소는 빠져있는데, 이건 그녀의 개인적인 또다른 취향관이 작동했다). 반면 나는 20년의 덕질 인생에서 한 번도 SM 아이돌을 덕질할 수준까지 빠져본 적이 없다. 물론 케이팝 애호가로서 SM 아이돌에 대한 잔잔한 호감과 관심이 왜 없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SM 아이돌을 향한 마음에서 단 한번도 입덕의 신호라 할 수 있는 비장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건 친구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꾸준히 케이팝에만 반응하는 귀를 장착한 채 살아왔기 때문에, SM 외의 아이돌의 세계에도 관심을 가져오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녀의 덕질 대상은 늘 SM 안에서 한정됐다.


우리의 덕질 계보는 이렇게 시작부터 완전히 다른 평행 세계를 걷기 시작한다.




사실 나는 오랫동안 아이돌을 덕질해 온 사람들의 미감과 취향 영역을 꽤나 신뢰하는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케이팝 아이돌을 둘러싼 모든 결과물은 사실 그 시대의 가장 핫하고 트렌디한 모든 것을 종합한 산물이다. 아이돌 덕질을 시작한 순간, 누구나 이 '미감'의 영역에 자신만의 시야를 갖게 된다. 혹자는 이것을 어린 여자(애)들의 취향이라고 비웃지만, 사실 모든 유행은 1020 여성을 무시하고선 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나는 이 비웃음을 그저 은은한 dog소리로 치부하겠다.


이렇게 트렌드의 첨단을 달리는 케이팝 아이돌 산업 속에서, 아이돌 덕후들은 한술 더 뜬다. 그때그때의 '헤메코(헤어, 메이크업, 코디)'는 언제나 아이돌 덕질 세계에 뜨거운 논쟁을 던져준다. 아이돌 팬들은 매 무대마다 이번의 헤메코가 얼마나 컨셉과 잘 맞는지 혹은 동떨어졌는지, 얼마나 이 멤버 개개인의 매력을 살리거나 혹은 죽여버리는지 분자 단위로 분석한다. 그리고 이게 성에 차지 않으면 X(과거의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올리고 소속사에 항의를 쏟아부으며 공론화 시킨다. 자본력이 상당하신 해외 팬들은 아예 소속사 앞에 이 문제로 항의트럭을 보내기도 한다.


헤메코에 대한 아이돌 덕후들의 집착은 관계자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는 30대가 되고 나서 나도 몰랐던 어떤 취미를 발견했는데, 그건 바로 '나자신 사진 촬영'이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해외 스냅 촬영과 스튜디오 컨셉 촬영을 포함해 무려 6번의 나자신 사진 촬영을 진행했다. 그중 아이돌이나 화보 컨셉의 촬영을 진행하면 실제 아이돌 메이크업을 담당한 경험이 있는 선생님에게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을 일이 종종 생긴다. 한번은 메이크업을 받으며 메이크업 선생님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눴는데, 이 선생님이 세븐틴이 한 때 다니던 샵에 적지 않은 기간 근무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오호라! 저 거기 너무 잘 알아요!" 어떻게 아냐고 되묻길래 내가 사실 세븐틴 팬이라고 했다. 그분의 안색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아, 그럼 저 싫어하시겠어요. 팬들이 저희 싫어했잖아요." 참고로 그날 메이크업은 역대급으로 잘 돼서, 나는 따로 인생네컷 사진도 여러장 남겼다.


잠시 이야기가 나의 tmi로 새버렸지만, 어쨌든 아이돌 덕후들은 '보이는 것'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 매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어떠한 요소가 필수적인지 혹은 불필요한지 자신만의 기준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실 이런 미적 기준과 취향은 단순히 보이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는 우리 애가 이런 헤메코일 때 제일 좋아', '이런 착장에서 이런 분위기일 때 (좋아서) 돌아버릴 것 같아' 정도의 미적 감상은 그 아이돌의 전체적인 컨셉까지 확장된다. 여기서 핵심적인 요소는 당연히 음악, 그리고 멤버와 그룹의 캐릭터다. 이 주접스럽고도 광활한 영역을 아우른 덕후 개개인의 감상을 깊게 파고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자신의 심장이 어떤 지점에서 가장 격하게 반응하는지 그 본질을 깨닫게 되는, 다시 말해 자신이 가진 '취향의 원점'을 파악하는 행위에 가까워지게 된다.


그렇다면, 나와 친구가 나란히 달려온 이 덕질 계보의 평행선도 파악해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취향은 어디서부터 갈라진 걸까?




스스로에 대해 관심과 애정이 매우 많은 나 역시 당연히 나의 덕질 계보에 대해 고찰아닌 고찰을 해본 적이 있다. 나는 왜 god를 좋아했을까? 나는 왜 인피니트에 빠졌을까? 나는 왜 세븐틴이 이렇게나 기특해서 미칠 것 같을까?


일단 나는 뭔가 꼬질꼬질한 애들이 자기들끼리 좋다고 엉켜서 지내면서 나오는 단체로서의 관계성 재미(가끔 티격태격 싸워주면 그 재미가 더욱 극대화된다)에 매우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꼬질꼬질함'인데, '이 세계에서는 화려한 아이돌인 내가 집안에서는 하찮은 꼬질남?'의 갭에서 오는 재미다. 실제로 내가 거쳐온 세 그룹 모두 아이돌 리얼리티 예능 혹은 자체 예능 콘텐츠로 유명한 그룹들이다. 꼬질하면서도 하찮은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와글와글 관계를 쌓아올려가며 스스로를 발견해가는 과정이 너무나 재미있다.


음악적인 면에서 보자면, 나는 곡이 주는 서사에 굉장히 쉽게 빠져들고 감흥을 얻는 편인 것 같다. god의 노래는 마치 이야기하듯 스토리가 담긴 곡으로 유명하고, 인피니트는 타이틀 곡에서는 케이팝 역사상 최고의 '집착돌'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수록곡에서는 서정적이고 아련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매번 벅차오르게 한다. 세븐틴은 말해 뭐하겠는가. 세븐틴은 어떤 인위적인 세계관 구축 없이, 멜로디와 가사만으로 '세븐틴의 색깔'을 만들고 그 색깔을 결국 그룹의 세계관으로 만들어버린 미친 재능을 가진 우지(세븐틴의 노래는 모두 멤버 우지에게서 나온다)라는 천재를 보유한 그룹이다. 이걸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어쨌든 나는 어떤 청량하면서도 서정적인 느낌이 있어야 반응하는 귀와 심장을 가진 사람이다.


반대로 나는 뭔가 굉장히 처음부터 잘 정형화된 모습으로 탄생한 아이돌에 큰 흥미를 느끼질 못한다. 어딘가 맨들맨들하고 도련님같은 느낌을 받는데, 그게 나에겐 재미 요소로 작용하질 않는다. 빈틈 없이 꽉찬 사운드에 그룹이 지닌 컨셉을 돋보이게 만드는 강한(?) 가사로 대표되는 SMP(SM Music Performance라고 불리우는 SM 소속 그룹들이 자주 하는 음악 컨셉을 일컫는 말이다)에 반응하지 않는 것도 위에 상술한 이유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내 친구는 이 지점에서 나와 정확하게 갈라졌다. 내가 '넌 도대체 SM 아이돌의 어떤 점이 좋아서 이런 내리사랑 외길을 걷고 있냐'고 질문하자, 정확하게 내가 생각하는 나의 취향의 원점과는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는 취향의 원점을 답하기 시작했다.


이 친구는, 마치 온실 속에서 아주 정확하고도 한 톨의 흠 없이 매끈하게 가꾸어진 형태의 아이돌에 매력을 느낀다. 준비 과정의 어떤 것들이 꼬질하게 드러나면 오히려 매력이 반감된다. 내가 맨들맨들하고 도련님같다고 느껴서 크게 반응하지 않는 그 포인트가, 이 친구에게는 정확하게 자신의 심장이 반응하는 매력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SMP에 반응한다. 특히 반응하는 작곡가도 있다(심지어 해외 작곡진까지). SMP를 좋아하다 못해 각 그룹의 SMP에 대한 분석까지 가능하게 된 그녀는 SMP 안에서도 본인만의 취향과 기준이 생겼단다. 그리고 이에 부합하지 못한 엑소는 SM 아이돌 그룹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덕질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부연설명이 덧붙여졌다.


여기까지 들으면서 우리는, "와, 우리는 진짜 취향이 절대 겹치지 않겠다"며 신기해했다. 취향 존중의 세계에서, 그녀와 나의 취향의 원점은 아예 다른 세상과 지점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반응하는 취향의 시작점이 이토록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너무나 다르기에 형성되는 공감대가 있다는 것도 재밌었다. 우리의 주변인들도 비슷했다. 내 주변에는 30대 캐럿이 몇 있는데, 이들 중에 상당수가 god의 팬이기도 하며 살면서 한번도 SM 아이돌을 덕질한 적이 없다. 반면 그녀 주변에는 자신과 같은 SM 내리사랑 소녀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른 우리에게도 엄청난 공통점이 있었다.


"본업 존잘이어야해."


'무대'라는 본업을 못하는 아이돌, 평행세계에 사는 덕후 둘 모두 이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이건 나와 친구의 사례이기 때문에 이걸 모든 아이돌 덕후들의 계보를 나누는 일반화 잣대로 활용해서는 매우매우매우 곤란하다.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건 세븐틴 덕후의 취향은 다 이렇다거나, SM 내리사랑 소녀들이 전부 어떤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아니다. 자신의 취향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면, 자신이 어떤 지점에서 매력을 느끼는지 그 취향의 원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지점에 따라서 덕질의 계보가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아이돌 덕후의 관점에서 꽤나 흥미롭게 다가웠다.


이게 덕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반응할 수밖에 없는 각각의 취향의 원점은, 극명하게 달라지는 덕질 계보 만큼이나 완전히 다른 서로의 선택으로 이어질 것이다. 실제로 나의 일상과 인생 곳곳에서, 이런 취향의 원점이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쳐오고 있었다. '아, 그래서 내가 이런 걸 좋아하고 이런 선택을 해왔구나'라는 자잘한 느낌표가 머리에 떠올랐다. 30대 중반의 나는 실제로 어떤 시점의 나의 선택을 다시 이해할 수 있었다.


덕질은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게 한다.

 



이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나는 더 흥미로운 말을 그녀에게서 듣고야 만다.


"내 취향은 사실 이수만 취향인 것 같아."


이건, god 송도 콘서트에서 내가 아미 친구와 함께 "결국 우리의 취향은 방시혁의 취향인 것"이라고 깨달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각자가 살고 있는 서로의 평행세계에서 각각 깨달은 말이라는 것 뿐이다.


아니 케이팝의 아버지들, 당신들은 대체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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