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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솜사탕 Sep 11. 2023

제 최애는 회전초밥처럼 매일 돌아가며 바뀝니다

1999년부터 2023년까지 덕질을 해온 고인물로서, (아이)돌판 덕질의 변화를 여러 측면에서 실감하곤 한다. 이러한 변화 대부분은 기술과 판로(혹은 상술)의 발전에서 온 것이다. 이중 상대적으로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면, 그건 대체로 아이돌을 향한 덕후의 감정에 대한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아이돌을 향한 주접의 끝에 결국 '(너무 좋아서) 죽고싶다'는 표현이 들어가는 것을 꼽을 수 있겠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1세대 아이돌팬 주접짤을 보면 '안데니 자결대'라는 짤이 있다. 지금도 의아하긴한데 도대체 왜 자결을 하나 싶지만, 아마도 너무 좋아서 죽어버리고 싶다는 세기말 특유의 격한 감정이 섞인 주접일 것이다. 지금은 저 정도로 격하지는 않고 오히려 드립의 느낌이 더 강하지만, 너무 (좋은 의미로) 엄청난 사진이나 영상을 봤을 때 'ㅇㅇ죽을게'라는 표현들을 하곤 한다.


왜 죽음을 언급할까? 너무 귀여운 것을 보면 '깨물고 싶어, 뽀사버리고 싶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자신이 느낀 격한 감정과는 반대에 있는 것을 표현해야 그 균형이 맞춰지기 때문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줏어들은 적이 있다. 무언가가 너무 귀엽거나 멋있으면 반대로 극단적인 감각을 생각하게 된다는 뜻인 것 같은데, 이 말이 맞다면 아마도 덕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향한 감정이 너무 깊다못해 극단적으로 '이렇게 좋다니 죽어버려야겠어'라는 주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좋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결국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으로 가버리는' 덕후들의 마음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셈이다. 나도 세븐틴의 무대를 보면서 종종 '죽어버리고 싶다'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의 진짜 뜻은 '안 죽고 오래오래 질기게 살아남아서 내 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이 무대를 돌려보고 싶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이돌을 향한 덕후의 감정'에도 예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확연히 다른 것이 있다. '최애'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1세대 때 개인팬(갠팬)들은 스스로를 '갠밍아웃'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1세대 팬이라고 그룹의 모두를 공평하게 똑같은 정도의 마음으로 좋아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룹에서 특별히 더 좋아하는 멤버가 있더라도, 전제는 그 그룹의 팬이라는 데 있었다. 예를 들어 11살~13살의 나는 윤계상과 일방적으로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으나, 팬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은 너무나 확실하게도 윤계상 개인팬이 아닌 god팬인 '팬지오디'였다. 그룹은 그냥 그렇고 별 관심 없는데, 그 그룹 중 한 멤버만 좋다? 그건 본인의 마음 속으로만 삼켜야 했다. 팬덤 안에서든 밖에서든 집단주의가 엄청나게 강했던 시기였다. 이게 좋은지 나쁜지 가치 판단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그때는 그런 분위기였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날 '최애'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보니 '최애'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건 2015년 즈음이라 한다. 물론 '최애' 개념에 해당하는 마음은 당연히 2015년 이전에도 있었다. 그때는 '누굴 제일 좋아해?'라는 구구절절한 의문문이 '최애'라는 당돌한 단어를 표현하는 대체어였다. '최애'라는 개념이 등장하던 시기 스스로 생각해봤다. 당시는 인피니트 덕질에 몰두해있을 할 때였다. 내 최애는 누구일까? 떠오르는 멤버가 있었는데 문제는 그 멤버가 한명이 아니었다. 별게 다 혼란스럽다 싶지만, 여튼 그 당시의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얼마 후, 돌판의 패러다임을 완전하게 뒤바꾼 프로그램이 나온다. 이 프로그램 이후로 '나는 그룹엔 (별/큰/그닥/완전히) 관심 없고, 특정 멤버=내 최애만 좋아하는 개인팬'임을 당당하게 드러내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시대가 온다.


그 프로그램은 누구나 예상하겠지만 프로듀스101이다.




프로듀스 시리즈에 대해 이 글에서 논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건 부담스러워서 할 수 없다. 이 주제는 내 글과 같은 잡스러운 개인적 tmi가 난무한 에세이보다는, 아이돌과 케이팝의 흐름에 대해 심도 있고 진지하게 다루는 논문들이 해를 거듭하고 계속 새로운 논점을 던져야 하는 주제라 생각한다. 조작엔딩이기는 했으나 이 프로그램이 한국 아이돌판에 끼친 영향이 너무 크기에, 이 산업과 문화를 학술적으로 뜯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두고두고 연구해야 할 대상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한다.

 

프로듀스 시리즈는 누구나 다 알다시피 국민 프로듀서님들이 자신의 최애에게 투표해 데뷔길을 걷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물론 어떤 멤버들과 그룹이 되느냐도 중요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픽이 데뷔하는 것'이다. 내가 픽한 최애가 데뷔에 실패한다? 이 프로그램을 볼 이유가 없다. 내 최애가 데뷔하지 못한 판에 이 프로그램에서 파생된 그룹이 누가 있든 관심도 없고, 좋아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은 전국민적인 히트를 쳐버린다. 내 주변 또래 여성들 모두가 자기를 '0프'라고 칭하고 있었다.


참고로 나는 이때 프로듀스101을 그닥 열성적으로 시청하지는 않았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했듯 당시의 나는 갓반인에 접어들었다고 단단히 착각했던 시기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와 이름이 비슷한 전소미를 늘 응원하고 있었으며, 시즌2때는 급기야 생각날 때마다 종종 황민현에게 투표를 하기는 했다. 도대체 갓반인이 되었다는 착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이 프로그램은 아이돌 덕심의 방향을 그룹보다는 개인, 즉 자신의 '최애'에 향하게 만들었다. '센터'라는 말도 이 때 등장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암묵적인 센터와, 모두가 묵인하는 파트 몰빵멤버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프로듀스101 이후로는 이런 마음들이 조금씩 자신의 속마음 바깥으로 적극 표출되기 시작했다. '내 최애가 센터가 되었으면 해', '내 최애가 가장 눈에 띄었으면 해'. 역시 이게 좋은지 나쁜지 가치 판단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그냥 그런 기조가 예전보다 강해졌다는 분위기를 말하는 거다. 그리고 이 분위기 속에서, '올팬'의 정체성이 특정멤버 개인의 팬으로서보다 더 강조되던 1~2세대 아이돌 팬인 나는 돌판 덕질 세상이 바뀌었음을 느낀다.


내 체감상, 그 이후부터 사람들은 종종 '최애가 누구냐'고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늘 고뇌에 빠졌다. 왜냐면.... 나는 내 최애가 누군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세븐틴에 입덕한 2021년, 아이돌 덕질 고인물이기 때문인지 나는 여전히 1세대 덕질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올팬'이 되지 않으면 스스로를 어떤 아이돌의 팬이라고 인식하기 어려운 몸으로 살아간지 십수년의 세월이 흘러있었다. 세븐틴도 마찬가지다. 두어달의 입덕 부정기 시절에서조차 '어쩌면, 나 얘네를 모두 통째로 품을 수 있을지도'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나곤 했다. 지금도 나는 가장 난감한 질문이 최애를 물어보는 질문이다. 그때마다 '내 마음속엔 13개의 방이 있어....'라고 아련하게 답하곤 했다. 하지만 사람인지라 좀 더 관심이 가고 좀 더 좋은 멤버가 왜 없을까. 물론 '최애는 누구야?'라고 물어보면 망설이지만, '제일 좋아하는 멤버가 누구야?'라고 구구절절 물어본다면 신나서 몇 배로 더 구구절절한 답변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처음에 내가 눈길이 가기 시작하고 호기심이 생긴 건 다람쥐처럼 생긴 정한이라는 아인데, 입덕 부정기 때 자꾸 보다보니 원우라는 애가 신경쓰이기 시작하는거야. 나중에 알았지. 원우가 신경쓰이면 그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라는 걸... 그렇게 세븐틴에 대한 나의 마음을 인정한 후, 입덕을 해서 좀더 본격적으로 파고드니까 진짜 매력있는건 에스쿱스더라고. 얘는 정말 리더가 될 자질이 충분한데, 무대는 까리하게 잘하면서도 멤버들끼리는 형같지 않고 막내처럼 까불거리는게 너무 귀여운 거야. 얘의 마음가짐과 애티튜드가 너무 멋있고 존경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근데 요즘엔 승관이가 제일 좋아.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어떤 시기를 스스로의 방식으로 씩씩하게 이겨낸 승관이가 너무 기특하고, 그걸 건강한 방식으로 팬들에게 표현해주고, 심지어는 멋지게 활동까지 복귀했는데 그와중에 비주얼이 부남보(부승관이 남자로 보여요) 그 자체야. 이 기특한 귤을 어떡해야 할까?"


정도로 내 대답을 써보았다. 그렇지만 이 대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근데 나 사실 애들 다 좋아해. 내 마음속엔 13개의 방이 있어...."

지긋지긋한 표현 미안합니다.




내가 봤을 때, 덕후들 - 특히 아이돌 덕후들은 정말 아주 사소하고 하찮기 그지 없는 부분에서조차 기어코 감탄할 것을 찾아내는 행복하고도 지독한 족속들이다. 노래를 할 때 손가락이 귀엽고, 춤을 출 때 그 멤버만 하는 어떤 표정이 짜릿하고, 찡그릴 때 미간이 멋있고, 이 구간에서 콧소리를 내는 것이 미쳤고, 눈 밑에 있는 점이 깜찍하다. 그래서 죽어버리고 싶다(=죽지 않고 오래오래 아주 질기게 살아남아서 이 프레임 단위의 대단함을 끝까지 감상하고 싶다). 이렇게 덕후들은 별 시시콜콜한 것을 캐치해가며 세상이 무너져도 행복하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 짓을 모든 멤버를 돌아가면서 하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대답하기가 참 곤란하다. 내 최애는 누굴까?


내 최애들은 회전초밥처럼 돌아가는 중이다. 나는 최애들의 회전초밥 레일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계속해서 좋은 점을 지독하게도 끄집어내고 있다. 어떨 때는 연어 초밥을 집었다가, 또 어느 날은 새우 초밥이었다가, 어떨 때는 폭신한 계란이 궁금해서 계란 초밥도 먹어본다. 내 최애들이 그렇다. 회전초밥처럼 돌아가며 바뀐다. 좋아하는 점이 계속해서 새롭게 생겨나거나 갱신된다. 이 에세이에서 내가 주구장창 주장하는 바가 바로 '좋아하면 행복하다'는 거다. 계속해서 새로운 멤버들의 새로운 좋은 점을 발견하고 새롭게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게 만들면서 기어코 덕후의 입에서 '행복하다'는 말이 나오게 만들어버린다.


끊임없이 돌아가면서 나한테 새로운 '좋아할 거리'를 던져놓곤 좋아 죽겠는 감정을 불피우는 내 아이돌들, 그리고 죽고싶을 정도로 좋지만 오히려 그러니까 죽지 않고 더 재밌게 살아서 이걸 제대로 끝까지 좋아해버리겠다는 나라는 덕후. 최애들이 돌아다니는 회전초밥 레일에선, 정말로 일상이 지루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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