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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솜사탕 Aug 29. 2023

누가 덕후가 될 상인가: 저기 벅차오르는 중인 사람요

커버 이미지는 이 글에 등장한 세븐틴의 일본 신곡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이다. 링크는 맨 아래에.


아이돌 덕질에 대한 세간의 잡다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내 주변에는 나의 요란한 덕질을 취향으로 존중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다. 가장 가까이는 우리 부모님이 그러한데, 속으론 어떠하실지 모르겠으나(사실 잘 알겠다) 감사하게도 나에게는 '너가 좋으면 됐지 뭐'라며 철딱서니 없는 나의 취향을 존중하고, 버텨주신다(이것이 바로 존버의 숭고한 모습일까?). 본인 스스로가 무언가의 덕후인 친구들을 제외하고, 덕질과는 거리가 먼 나머지의 내 친구들도 내가 혼자서 주절거리는 덕질 이야기를 알아서 잘 흘려보내며 나와의 가까운 우정을 유지해주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서 종종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나의 덕후 친구들 또한 이 표현을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고 한다.

"나는 너처럼 뭔가를 그렇게까지 좋아한 적은 없는 것 같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겠지만, 이 문장의 포인트는 '그렇게까지'다. 좋아하는 정도가 어떤 의미에서든 '투머치'라는 거다. 덕후와 비(非)덕후를 가르는 기준이 있다면, 아마도 이 부사에 담긴 '좋아하는 정도'라 해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이 정도는 아마 누구나 알 것이다.


두 번째 포인트가 있다. '~한 적이 없다'는 표현이다. 나는 바로 여기가 덕후와 덕후가 아닌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지점이라고 본다. 덕후들은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그것을 "매번" 그렇게까지 좋아한다. 하지만 덕후가 아닌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좋아한 '적이 없다'. 좋아하는 것을 그렇게까지 '매번' 좋아할 수밖에 없는 DNA가 덕후에겐 있다.


왜 나는, 그리고 왜 나랑 같은 덕후들은 좋아하는 것을 '매번'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운명을 타고난 걸까?




트위터에서는 꽤나 유명한 오타쿠의 단계 구분법이 있다. 좋아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감정에 따라 오타쿠의 심각도를 구분한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노벨덕후상을 받아야 될 정도의 통찰이라 본다.


귀여움: 그럴 수 있음

사랑스러움: 아직 그럴 수 있음

애틋함: 위험함

벅차오름: 돌이킬 수 없음


대부분의 덕후들은 애틋함을 넘어서(이 단계에서 위험을 감지한 이들이 입덕 부정기를 갖게 되는 것 같다), 벅차오르는 상태에 이르러 있다.


'큰 감격이나 기쁨으로 가슴이 몹시 뿌듯하여 오다'. 벅차오름의 사전적 정의다. 누구나 각자의 벅차오르는 순간이 있겠지만, 덕후의 경우에는 이 감정이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 시도때도 없이 느껴진다는 것이 문제다.


예를 들어,


나는 우지가 내놓은 새로운 노래를 들을 때 말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감격에 찬다(세븐틴의 모든 노래는 부산시 수영구에서 태어난 천재 모차르트인 멤버 우지에게서 나온다). 이를 다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군무로 펼쳐내는 세븐틴의 안무와 안무를 기어코 비집고 뚫고 나오는 라이브의 생생함을 보고들으며 뿌듯해서 감당이 안될 것 같은 마음을 갖는다. 그 기쁨의 순간, 본인의 끼를 주체하지 못하고 스마트폰의 액정 밖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은 본투비 아이돌 호시(호시는 세븐틴 퍼포먼스 유닛의 수장을 맡고 있다)를 보며 뿌듯함에 가슴이 뻐렁치다 못해 결국 이런 감상을 내뱉는다. "호시 내가 낳을걸".


물론 내가 낳았으면 호시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벅차오르는 감정이 단순히 감정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감상을 좀 더 곱씹기 위해, 조금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 덕후들은 기어코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나노단위로 뜯어보기 시작한다. 이전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입덕한 순간 '망했다'고 느끼는 것과도 비슷한데, 덕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몇 번이고 다시 봐야 하기에 일상에 다소간의 지장이 생겨버린다. 남들은 슬램덩크를 한번 보고 "아, 정말 재밌었어. 추억이 생각나네 (^^)"라며 한 번의 관람으로 멈추는 것을, 덕후는 그걸 기어코 사운드가 좋은 상영관, 화면이 더 와이드한 상영관 등 영화관의 종류를 바꿔가고 때로는 같이 영화를 보는 동반인을 바꿔가면서 N회차 관람을 한다. 그걸로도 부족함을 느끼는 게 흔한 덕후의 정신상태다.


이 지독한 반복이 가능한 이유는 좋아하는 것을 보고, 보는 것을 넘어서 뜯어볼 때마다 엄청난 벅차오름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극도로 취약한 사람들, 그렇기에 무언가를 매번 그렇게까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나는 덕후와 덕후가 아닌 사람들의 근본적 차이는 아마도 이 '벅차오름'에 대한 취약성에 있지 않을까 막연히 결론내렸다.



아마 내 글을 감사하게도 첫 편부터 읽은 사람이라면 내 글에서 자주 띄는 표현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바로 '벅차오름'이다. 나는 정말 자주 벅차오르는 사람이다. 모든 일을 마치고(때로는 마치지 않고 뭉갠 채로) 침대에 누워 본격적인 덕질을 할 때만 벅차오르지 않는다. 정말로 '시도 때도 없이' 벅차오른다.


그 일례로, 오늘 내가 벅차오른 순간을 소개한다.

나는 회사에서 종종 잠이 오는 사람이라 잠을 깨기 위해 노래를 들으며 일한다. 오늘도 도대체 답이 안나오는 제안서의 빈 화면을 채우지 못해 고통받으며 노래를 들었다. 세븐틴의 이번 일본 앨범에서 발표한 '今 -明日 世界が終わっても-' (Ima -Even if the world ends tomorrow)의 정한이 파트가 나왔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정한이가 세상의 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는 뮤직비디오 장면이 자동 재생된다.


아, 너희는 세상의 끝이 오더라도 우리에게 'last dance'를 추겠다고 해주는구나. 이 슬픈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밝게 이야기해주는 구나.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우지는 너무 천재다. 얘를 진짜 어떡하지? 어떻게 이런 노래를 만들지? 어떻게 이 가사에 이 멜로디를 붙였지? 어떻게 이런 노래를 이렇게 부르는 아이들을 내가 발견하게 되었을까? 인생이 이렇게 행복해도될까? 벅차오르는 마음에 머리에 피가 도는 느낌이 들고, 그 기운에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 모르겠지만 빈 PPT 화면을 빠르게 채워나간다. 대부분 개소리지만 괜찮아. 이 노래 다시 들으면서 날것의 개소리를 조금 더 정제된 개소리로 수정하면 되니까. 이 힘을 낼 수 있던 건 다 천재적인 우지 덕이다.



이 외에도 나는 종종 노래를 들으며 길을 걷다가 사연이 있는 여자처럼 이마를 짚기도 하고(너무 좋아서 그렇다), 자기 전 불을 끄고 무대영상을 보다가 벅차오르는 마음을 참지 못해 다시 불을 켜서 정자세로 바로 앉아 재감상하며 감탄하기도 한다. 최근 7년만에 열린 인피니트 콘서트에서 멤버들의 팬을 향한 그리움이 공연장 입구에서부터 얼마나 느껴졌다지 벅찬 감상을 랩하듯이 쏟아내다가 제풀에 지쳐 냉수를 들이키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힘들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하나도 힘들지 않다. 덕후의 마음속은 벅차오름으로 가득차 있다. 힘들다는 감정과는 완전한 대척점에 서서, 누구보다 꽉 차 있는 순간을 만끽하고 있다.




이전 글을 포함해 이 시리즈에는 종종 이 '벅차오른다'는 표현이 등장했고, 또 등장할텐데 이 감정이 이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이 느껴지면.... 지독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이것이 기쁨에 찬 덕후의 감상이니까.




혹시 내 MBTI를 짐작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네, 저는 극도의 N이자 극도의 F 맞습니다.  


이 글에서 언급한 세븐틴의 일본 신곡 뮤직비디오 今 -明日 世界が終わっても-' (Ima -Even if the world ends tomorrow(자막을 켜고 보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https://youtu.be/vvN4FgqNXwE?si=GO1sqJ0eoOK-MFX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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