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이미지는 세븐틴 멤버 원우의 인스타그램에서 퍼왔습니다. 이 글의 시점과는 상관없는 최근 사진이나, 이 글에 원우가 언급되므로 커버로 사용해봤습니다.
입덕의 순간은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약간 비장한 축에 가깝다. 덕질 용어에서 자신의 덕질 대상을 '본진'이라는 전쟁 용어를 빌려 칭하는 것은 덕질의 많은 것을 함의한다.
조져질 결심, 그것도 기꺼이 조져질 결심.
입덕의 순간, 덕후들은 이 결심을 마음에 심는다.
나는 팬과 덕후는 매우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 기준에서 매우 다른 개념인 이 두가지는 종종 혼용되곤 하는데, 팬 정도의 감정인데 스스로를 '덕후'라고 칭하거나 덕후인데도 본인이 '팬' 정도에 그친다고 과소평가하는 경우다. 아마 둘 다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칭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두개의 표현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싶다. 스스로가 '팬'으로서의 자신을 인식할 때와 '덕후'로서 자신을 인식할 때 느끼는 감정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후자는 거의 위기감에 가깝다.
예를 들어 나는 르세라핌이 시원시원하면서도 힙하게 스포티한 느낌을 살리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들의 공식 유튜브 채널을 팔로우하면서 멤버들의 특징이나 개성을 익히며 즐거웠으며, 안무 영상을 자주 찾아보다가 급기야는 안티프래자일 춤을 배우기도 했다.
사람 외에도 사물이나 무형적인 것의 팬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이슬란드(국가)가 주는 느낌을 좋아해서 아이슬란드에 팬심을 가지고 있다고도 표현하면... 물론 상당히 어색하다. 그래도 내가 아이슬란드라는 나라에 가지는 감정이 어느정도인지 대강 그 수준이 전달될 것이다. 고등학교 때의 나는 프리미어리그를 밤새가며 보는 축구 팬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나는 어떤 일러스트레이터의 팬이며, 어떤 작가의 팬이며, 어떤 브랜드의 팬이다. 다시 아이돌에 한정해서 보자면 나는 웬만한 남자 아이돌 그룹에 한명씩은 다 최애가 있으며, 그 중 몇명에 대해서는 관심을 넘어선 팬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무언가의 덕후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한정적이다. 나는 르세라핌이나 아이슬란드 때문에 비장함을 느끼진 않는다. 하지만 세븐틴 입덕을 인정한 순간, 나는 비장함을 느꼈다.
지난 글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세븐틴을 인지하고 난 이후 두달 정도의 입덕 부정기를 거쳤다. 두달이면 길진 않지만, 그렇다고 짧다고 할 수도 없는 기간이다. 너무 좋고, 계속 보고 싶은데, 그 감정을 필사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간이 두달'이나' 된 것이다. 물론 나 나름대로 이들에 대한 감정을 애써 외면한 몇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애들이 너무 어리다. 맏형들이 95년생이고 막내는 심지어 99년생이다. 막내랑 나랑 10년이나 차이난다. 내가 얘네랑 결혼할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이정도 나이차이는 U-Gyo-Girl로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애들이 너무 많다. 멤버가 13명이라는 것은 생일도 13개고, 굿즈도 13종이고, 직캠도 13개고, 개인활동도 13개란 뜻이다. 13명을 모두 받아들이면(=파고들다가는) 내 인생이 망할 것 같다.
왜 망할 것 같냐면, 나는 한번 빠져들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덕후의 DNA를 타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좋아서 벅차오르는 감정을 두 달이나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당시 나는 지난 글에서 쓴 것 처럼 Left & Right 릴레이댄스 영상을 매일 최소 세번 이상 본 것을 포함해, 탁탁 맞는 발소리가 쾌감을 더하는 안무영상, 무대영상 등을 보며 벅차오르는 감정이 부풀어오르다 못해 증식함을 느끼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난 이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노래와 춤을 좋아할 뿐이야"라고 가스라이팅한 기간이었다. 멤버의 얼굴을 구분하거나 이름을 익히려는 노력도 일부러 전혀 하지 않았다. 그냥 '세븐틴들'로 뭉뚱그렸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평소처럼 누워서 Left & Right 를 무심하게 추고 있는 원우(물론 그 당시엔 그 멤버가 원우인줄 몰랐다)를 반복해서 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 유체이탈을 하듯이, 그 구간만 반복재생하는 나의 모습을 인지하게 됐다. 이미 내 일상은 이 영상을 보는 것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당분간의 일상도 이 상태가 유지될 것이다. 깊은 깨달음이 왔다.
앱스토어에 '위버스'를 검색했다(이미 '위버스'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 망조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일종의 공식 팬클럽이라 할 수 있는 세븐틴 유료 멤버십에 가입했다.
주변인들에게 종종 간증하듯 풀어놓는, 내가 입덕을 '겸허하게' 인정한 순간이었다. 앞으로 내 일상은 얘네로 조져질 것이다. 단순히 굿즈를 사고 오프라인 일정을 뛰면서 체력과 비용을 소모할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조절하는 스위치가 13개가 더 생긴 것이다. 강한 벅차오름과 행복을 느끼면서 내가 조져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오히려 좋아. 어서와, 얘들아.
그리고 나는 입덕을 인정한 2021년 5월 1일의 밤(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입덕한 순간 유료 멤버십에 가입했고 그 기록이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13명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매칭하는 것은 물론, 목소리까지 구분하는 레벨에 순식간에 이르른다. 이미 무의식 중에 내 뇌가 얘네를 좋아하다못해 스스로 학습해버렸나보다. 입덕 부정기란 이렇게 부질 없다.
덕후들의 입덕썰(주로 트위터나 커뮤니티에서 찾아볼 수 있다)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망했다', '조졌다', 기타 등등의 욕설들이다.
우리는 모두 국어 시간에 배웠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다. 고로 강한 부정의 표현은 지나치게 행복해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덕후들의 경우에는 실제로 일상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조져질' 것임을 예측한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그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이 글을 쓰기 직전, 한 아이돌을 9년째 파고 있는 절친한 친구이자 덕후에게 언제 너의 본진의 덕후가 되었다고 느꼈냐고 물어봤다. 그녀의 답에 핵심이 담겨 있기에, 그대로 옮겨온다.
"제일 강한 뭔가 '아 조졌다' 싶었던 건, 얘네의 기쁜 일이 내 기쁨을 지배하게 됐을 때?"
덕후란 이런 것이다. 입덕은 이런 감정을 받아들이고, 감당할 결심을 하는 단계인 것이다.
이 글이 행여나 팬이나 덕후라는 두 가지 개념에 대해 각각 비하하거나 특정 개념이 더 우월하다고 표현한 것으로 오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디까지나 이건 그냥 내가 나눈 개념이고 내 기준을 썰로 푼 것 뿐이다.
하지만 혹시나 내 개념에 약간 흥미가 있거나 공감이 된다거나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족이지만 '내 기준' 팬과 덕후를 자가진단하는 기준을 남겨본다.
너무 좋아요! 최고!!! 앞으로도 자주 (찾아)봐야지!!!!^-^ (주로 웃고 있는 편, 행복하고 야들야들한 이모지를 쓰는 경우가 많음): 축하합니다. 당신은 아직 특정한 무언가에 호감을 가지고 있을뿐인 일반인입니다.
진짜 너무 좋다! ㅠㅠ 이것도 사고 저것도 소장하고 여기도 가보고 저것도 해봐야지!! (종종 눈물을 흘리며, 감상평을 주변에 나누곤 함): 당신은 그 대상의 팬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즐겁게 팬심을 채워나가세요.
미친...이렇게 좋은게 맞나...망했다…내 인생 너네가 조져도 좋아....끝까지 가보자.... (이모지며 이모티콘이며 다 사라진 담백한 텍스트 상태): 유감입니다. 당신은 덕후입니다.
여기 어딘가에 속하든, 혹은 속하지 않든, 무언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우리 모두 무언가를 좋아하며 행복하게 삽시다! 오늘의 글은 공익광고협의회의 협찬으로 제작되었을 리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