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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솜사탕 Aug 24. 2023

잊고있던 본진의 알고리즘은 new본진을 싣고

*커버이미지는 세븐틴 left & right 릴레이댄스 영상을 캡처해 사용했습니다. 링크는 글 맨 아래.

나는 마치 다중인격자처럼 여러 개의 덕후로서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아이돌 덕후로서의 내 경력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99년부터 시작된다. 길고 긴 내 덕질 이력엔 세대별로 본진이 차곡차곡 쌓여있고, 천운에 가깝게도 이들 모두 큰 사고(돌판에서는 ‘병크’라 칭하는) 를 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각 본진의 팬으로서의 정체성을 병렬로 어째저째 이어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내 주변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덕후로서의 내 정체성은 캐럿일 것이다(캐럿은 세븐틴의 팬덤명으로, ‘혹시.. 당근이세요?’의 그 캐럿은 아니고 세븐틴 데뷔곡의 ‘흉내낼 수 없는 세븐틴 캐럿’이라는 가사에서 따왔다). 가장 최근의 본진이고, 꽤나 요란스럽게 덕질을 해오고 있기 때문에, 만약 누군가 내가 캐럿인 사실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내가 캐럿이 된 건, 내가 인스피릿(인피니트의 팬덤명)이어서였다. 전남친이 현남친을 소개해준 것만 같은,  그래서 결국 둘 다와 만남을 이어가게 된 할리우드 재질의 이 입덕 스토리에는 유튜브 알고리즘과 코로나를 빼놓을 수 없다.




사회인 7~8년차쯤에 접어든 2021년 초, 번아웃이 왔다.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었는데 원체 나라는 사람이 일을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스트레스도 좀 있었는지 어느 순간 무기력함이 신체 증상으로 나타났다. 안그래도 잘 누워있는 나로서는, 몸도 안좋고 정신도 지쳤기 때문에 더욱 필사적으로 누워있는 시기를 보냈다. 마침 코로나 시기라 기나긴 재택을 하고 있었기에 누워지내기엔 더할나위 없는 시기였다.


현대인은 누워있으면 뭘 할까? 2021년 당시 현대인들은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봤다. 특히 유튜브를 떠돌던 많은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알고리즘에 종종 휘말리곤 했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례로 한때 나는 요리하는 유튜브를 종종 보곤 했는데, 그 당시 K-네티즌들에겐 달고나 커피를 휘적여 먹는 게 유행했다. 유튜브에겐 나 역시 K-네티즌이기 때문에 ‘요리영상을 즐겨보는 한국사람인 나+휘저어 먹는 커피를 좋아하는 한국인‘라는 공식을 적용해버린건지, 어느순간 나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방식으로 휘저어서 버터를 만드는 영상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국에서 만든 영상의 댓글엔 나와 같이 알쏭달쏭한 알고리즘에 이끌려온 수많은 고국 사람들이 모여 어리둥절해 했다.


이런 혼란의 시기, 갓반인으로 살고 있던 내 알고리즘에 불현듯 익숙한 썸네일이 떴다. 2010년도 중반, 인피니트를 열심히 덕질하던 당시의 내 웃음버튼이었던 영상이었다. 남우현이 귀신 꿈꿨다는 애교를 망해버리는 영상인데, 2021년은 그 영상을 안본지는 5년도 더 넘은 때였다. 유튜브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스크롤을 주륵주륵 내리던 나에게 그 웃음버튼 영상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너, 이거 좋아하지 않았니...?


기억의 힘은 너무나 강력하다(이 주제에 대한 글을 조만간 쓸 계획이다). 나는 그 영상을 다시 보고 낄낄 웃었고, 그렇게 2015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스스로 갓반인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며 기억 저편에 묻어둔 추억속의 인피니트 노래들을 다시 듣고 인피니트의 옛 리얼리티 예능을  복습하기 시작했다. 아, 유튜브의 관점에서 다시 서술하겠다: (new) 유튜브가 나라는 인간을 조종할 수 있는 '인피니트'(이)라는 새로운 알고리즘을(를) 습득했습니다.




인피니트 나오는 옛날 방송 오랜만에 다시 보려고 새로운 OTT 정기결제도 시작하고, 내 자차를 인피니트 콘서트장으로 만든지 한달 정도 됐을 때 유튜브는 드디어 습득한 알고리즘을 실행했다.


부교수님의 케이팝 강의를 내 피드에 띄운 것이다.


당시 나에 대해 짧게 설명하자면, 인피니트 이후 한동안 덕질을 하지 않았기에 나는 스스로를 갓반인이자 머글로 착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 때의 나는 돌판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새로운 돌판 지식에 무지했다. 당연히 난 부교수님이 누구인지 몰랐으며, 부교수님이 케이팝에 빠삭한 부승관이라는 사람이며, 승관이 세븐틴의 멤버라는 사실은 더더욱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마도) 장르를 불문하고 덕질을 하는 판에서는 덕질을 하지 않는 일반인을 머글이라고 칭하거나, 덕질에 허우적거리는 덕후와는 달리 일상생활을 잘 살고 있다는 뜻으로 ‘갓(god)+일반인=갓반인’이라고 부른다.


등장인물에 대한 정보는 전무한 채 케이팝 강의엔 인피니트가 빠질 수 없다는 자부심과, 케이팝 강의는 또 뭘까 하는 호기심에 그 영상을 클릭했다. 그리고 원래 습관대로 댓글부터 읽기 시작했다. 인스피릿의 뽕이 차오른다는 류의 댓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영상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영상에는 화장기없는 동글동글한 아이가 나오고 있었다.


부교수님이란 아이는 이런저런 2010년대의 케이팝을 소개했다. 영상이 너무 길었다. 댓글의 도움을 받아 인피니트가 나온다는 구간으로 바로 넘어갔다. 뭘 들을까 하다가, 그 아이는 Bad를 골랐다. 그리고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발언을 한다. 정확한 고증을 위해 그 영상을 다시 보고 워딩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건 제가 알기로 알파벳인가? 알파벳 작곡팀이신 것 같아요. (인피니트 ‘bad'의 작곡가를 기억해내는 부교수님)

뮤비 이렇게 거울보는 (bad 뮤비 명장면을 묘사하는 부교수님)

우현 선배님 해도 되나요?(우리 부교수님 하고싶은 거 다해)

그 무대에서는 “내게 갈게~~에~~“ 이르케 하자나요. 아 알잖아요!! ㅠㅠ (알지알지ㅠㅠㅠㅠㅠㅠㅠ이쯤에선 나도 부교수님과 같이 감격하고 있는 상태)


얘는 왜 이런 걸 알지? 혼란스러웠다. 이 동그란 아이는 덕후가 벅차오르는 모먼트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이어지는 다른 곡 소개를 봤다. 내 최애곡 라스트로미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근데 이거 알지? 시작하자마자 워우워우 예이 바로 나온다? 바로 준비해야지 알겠지?


캐럿이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한 인스피릿으로서 내가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노래는 인트로부터 덕후를 후드려 팬다. 이 동그란 귀여운 아이는 이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벅차오르는 손동작을 하며 노래를 따라불렀다.


...? 넌 누군데 ...? 어째서..? 이런 포인트를 알고 있니?


검색해보니 이 아이는 세븐틴의 멤버였다. 세븐틴 이름만 몇번 들어봤는데 누군지 몰라서 검색해봤다. 승관과 예쁘게 생긴 남자애들 몇명이 나온, 문명특급의 광란의 케이팝 메들리편이 가장 먼저 떴다. 그걸 보며 그 근래 들어 가장 많이 웃은 것 같다.


얘네... 왜 웃기지? 본업은 잘하는 애들인가?


다시 검색해봤다. 다람쥐같이 생긴 아이가 있는 썸네일이 떴다. 다람쥐 같은 아이가 귀여워서 클릭했더니 노래가 마음에 들었고, 멤버가 줄줄이 나오는데 춤선이 쫄깃쫄깃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애들 얼굴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약 두달 간 이 영상만 체감상 200번은 넘게 본 것 같다. 이 영상의 제목은 [릴레이댄스] SEVENTEEN(세븐틴) - Left & Right (4k). 입덕 부정기가 지나간 두어달 후에나 알게되었지만 이 다람쥐같은 아이는 정한이.


짧지 않은 세븐틴 입덕 부정기의 시작이었다.




이 글에 나오는 영상들이 궁금하다면 여기로.

* 저의 입덕의 포문을 연 세븐틴 left and right 릴레이댄스: https://youtu.be/CrYiVQz3G5Q?si=HrkHEVcrywaZoktF​​

* 문명특급 광란의 케이팝 편: https://youtu.be/p5rSisUDTts?si=K5iGudsasvDdLe1L​​

* 부교수님의 케이팝 강의 중 본문에 나온 인피니트 부분만 있는 영상: https://youtu.be/lzDSjiX9toQ?si=P9iNPMvmnjLv_rCJ​​​

​* 5년만에 날 인스피릿으로 돌아가게 만든 회심의 알고리즘, 남우현의 망한 귀신꿈애교: https://youtu.be/QwJWnjZ1Y-0?si=D6652-ar1627ldiQ​​​



이전 01화 “그래봤자 걔네는 너 존재도 몰라” 예, 저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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