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덕질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1999년의 막바지 겨울 어느날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 곧 5학년으로의 진학을 눈앞에 두고 있던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아빠 서재방으로 들어갔다. 당시 집에는 거실 말고 서재 방에도 작은 TV가 하나 있었고,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나는 만화영화와 가요프로그램을 볼 때면 늘 서재방으로 갔다. 그 해 가을에는 이정현이 '와'라는 엄청난 노래를 들고 나와서 나는 늘 집에서 '와'를 따라 췄으며(근처에 사시던 할머니가 종종 집에 오시곤 했는데, 나는 할머니를 앞에 앉혀두고 늘 강제로 나의 '와' 공연을 보시게 했다), 그보다 앞서 그 해 봄에는 핑클이 '영원한 사랑'이라는 가요계의 길이 남을 명곡으로 컴백을 했었기에 당시 나는 늘 핑클의 성유리 언니처럼 크겠다는 다짐을 하고 지내던 때였다.
가요를 유난히 좋아했던 그 소녀는 본인이 커서 20년 묵은 케이팝 고인물이 될 것이며, 그날이 자신의 덕질 역사가 시작되는 첫 번째 날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평소처럼 어김없이 인기가요를 틀었다.
그렇게 만나게 된 노래, 바로 god의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였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나는 내 생각에도 남들보다는 조금 더 자신감은 있고 겁은 없던 아이였던 것 같다. 부모님도 그런 내 캐릭터를 직감한(?) 것인지 유독 나에게 자립심을 기르는 퀘스트를 자주 던져주신 기억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혼자서 버스를 타고 일산에서 영등포까지 오게 한다거나 양양에 있는 외할머니집까지 혼자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경험을 쌓게 한다던가(예전엔 속초에 공항이 있었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덕분에 이런저런 세상 물정을 초딩치고는 빠르게 이해했으며, 관심이 있는 것이라면 스스로 야무지게 찾아다니는 적극적인 초딩으로 클 수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3학년 언저리에 아빠가 소개해준 '인터넷'이라는 것으로 그 당시 가장 좋아하던 세일러문 그림을 종종 (벅차올라하며) 찾아보던 그 초딩은, 초등학교 고학년의 첫 시작이라 할 수 있는 4학년이 되었을 땐 이미 꽤나 능숙하게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쥬니어 네이버에서 회원 수 기준으로 10위권 안에 드는 초등학생 친구 만들기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으며(이 카페는 나의 게으름으로 인해 방치되었고 소멸해 버렸다), 학교 친구들과는 관심 있는 연예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교환일기를 이메일로 쓰고 있었다. 정말 될성 부를 덕후의 떡잎이 아닌가 싶다.
'난 계상 오빠와 결혼할 것이다'라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믿음을 가지게 된 초딩은 2000년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덕질을 시작한다. 모두가 새천년이 시작되었다며 크게 기뻐하던 때였다. 나도 내 미래의 남편을 만나게 되어 기뻤다. 이미 인터넷을 빠릿빠릿하게 휘젓고 다니던 그 초딩은 '소울메이트'라는 god 팬 사이트를 찾아냈다. 계상과 데니의 커플링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모여있는 팬 사이트였다. 당시에는 커플링이 뭔지는 잘 몰랐지만, 나는 뼛속부터 얼굴을 따지는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내 눈에 가장 비주얼 멤버로 보이던 계상과 데니를 특히 더 좋아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팬사이트에서는 계상과 데니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사진과, 이 사진을 포토샵으로 화려하게 꾸민 '축전'이라고 하는 이미지가 가득했다. '덴상'을 주제로 한 팬픽들이 연재됐으며, 나처럼 아직은 동성 커플링이 어색한 사람들을 위해 이성애 팬픽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왜냐면 내가 썼기 때문이다...). god의 방송 스케줄에 따라 다양한 후기와 감상이 올라왔으며, 이를 살펴보던 나는 오프라인 덕질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다.
'팬 모임'을 하게 되면서, 나는 돌이킬 수 없는 덕질의 세계로 신나게 다이빙했다.
일산에 살던 나는, 소울메이트에서 만난 일산에 있는 중고등학생 언니들과 함께 모임을 만들어 공개방송 일정을 챙기기 시작했다. 여의도에 있는 KBS와 MBC(상암으로 이사가기 전), 등촌동에 있는 SBS 공개방송홀을 이 언니들과 함께 찾아갔다. 당시에는 이러한 팬클럽 모임마다 '팸(패밀리)'라고 칭하며 팸 이름을 짓고, 팸 이름과 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멤버들의 사진을 담은 명함을 공개방송마다 뿌리고 다녔다. 당연히 나도 이 명함을 뿌리는 일에 동참했는데, 그때마다 언니들이 몇 살이냐고 물어봤다. 12살이던 나는 거의 매번 가장 어린 축에 속했고, 내 나이를 들은 언니들은 열이면 열 모두 '벌써 god를 좋아하다니 기특하다'며 칭찬을 해줬다. 덕후들의 칭찬에 어린 덕후는 날아갈 듯 뿌듯했고, 교복을 입고선 멤버들에 대한 이야기를 유창하게 풀어놓는 그 언니들을 속으로 동경했다. 아직 교복을 입으려면 1년도 넘게 더 기다려야 하는 나이였다. 언니들의 아이돌에 대한 지식은 학교에서 반 친구들과 나누는 이야기에 비하면 그 깊이와 폭이 비교할 수 없었다. 더 많은 언니들과 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초반에서 밝혔듯 나는 굉장히 행동력이 빠른 초딩이었다. 더 많은 언니들과 친구를 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오프라인 모임에 나갔다. 우리 팸과 같이 활동을 하던 다른 팸 두어개는 명동에서 윤계상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카페에서 종종 '정모'를 열었고, 거기서 늘 언니들이 심각하게 팬클럽 활동과 계획에 대한 논의를 이어갈 때 가슴 두근거려하며 회의의 머릿수를 채웠다. 언니들은 늘 간식을 가져와줬고, 축전을 만드는 포토샵 팁도 알려줬다.
god가 컴백 준비를 하느라 잠시 공백기가 있을 때, 그 언니들과 만나지 못했지만 우리는 펜팔로 편지를 이어가며 우정을 나눴다. 그 중 같은 팸이지만 대구에 사는 같은 팸의 한 고등학생 언니가 기억이 난다. 나는 그 언니의 얼굴을 딱 한번 밖에 본 적이 없지만, 그리고 그 언니와 나는 초등학교 5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이라는 나이차이가 났지만, 꾸준하게 나한테 답장을 써줬다. 편지의 대부분은 god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가끔 나는 그 편지에서 고민도 털어놓을 때가 있었다.
나는 가상의 여주인공을 두고 남주는 윤계상, 서브남주를 데니로 한 팬픽도 썼는데, 당시 나의 롤모델이었던 작가 언니가 있었다. 이성애 팬픽을 기가 막히게 잘 쓰는 언니여서 그 언니의 팬픽이 뜰 때마다 나는 또 다른 팬레터를 썼다. 그리고 그 언니를 따라 팬픽을 썼다. 수업시간엔 공책에다 초안을 썼고, 집에와서는 그걸 인터넷으로 옮겨 쓰며 어색한 부분을 수정했다. 인터넷에 다 올리면 초안을 쓴 공책은 같은 반 god 팬인 친구들에게 읽으라고 돌렸다. 나중에 이 소설은 다른 반 아이들까지 빌려서 볼 정도로 나름 인기를 끌었고, 인터넷에서도 적지 않은 조회수를 기록했었다(비슷한 에피소드가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 나왔을 때, 나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나의 롤모델이었던 작가 언니는 어린 덕후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해줬고, 다음 팬픽에 대한 조언도 해줬다. 학습지도 풀고, 피아노 연습도 해야했지만 그런 일상은 덕후를 방해할 수 없다. 나는 이 언니들과 교류하는 즐거움을 놓지 못못하고 덕분에 더욱 커져가는 윤계상을 향한 마음을 감출 생각 없이 열정적으로 덕질을 해나갔다. 덕질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건, 이 언니들 덕분이었다.
god는 나에게 첫 덕질의 대상이었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같이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어린 나에게 알려준 대상이기도 했다.
세븐틴의 입덕을 인정했을 때, 나는 이미 적지 않은 연차가 찬 30대 초반의 직장인이었다. '아이돌 보기'가 아닌 '아이 돌보기'에 가까운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자연스러운 나이가 되었다. 유유상종이라고 나의 절친들은 아이돌을 비롯해 서브컬처에 꽤나 가까운 친구들이었고 각자의 덕질을 하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중 세븐틴의 팬은 없었다.
혼자서 영상을 보고, 혼자서 노래를 듣고, 혼자서 세븐틴의 대단함을 곱씹는 덕질의 나날이 3개월 정도 이어졌다. 심심했다. 이 재미를 더 나누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영업도 해봤지만 그들에게 세븐틴에 대한 호감을 심어주는 데에 그쳤다. 인터넷에서 친구를 찾는 방법도 물론 있었지만, 그 당시 나는 아직 스스로 세븐틴을 충분히 잘 모른다고 생각해 트위터에서 '트친'을 만들었다가 실수할까봐 겁이 났다. 하지만 나는 이미 경험적으로 god 덕질을 오래도록 즐겁게 할 수 있던 원동력이 '친구들(언니들)'이라는 것을 체득한 사람이었다. 세븐틴을 알아가는 재미로 당시의 혼자하는 덕질 역시 재밌었지만, 더 재밌게 할 방법이 있다고 확신한 이유였다.
덕질을 같이 할 친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런 내게 마치 소개팅처럼 덕메(덕후+메이트)를 소개해주겠다는 제안이 온다. 이전 편에서 소개했던 한 아이돌을 9년째 파고있다는 그 친구에게서였다. "덕질은 혼자 하면 재미가 없어". 맞는 말만 하는 그녀는 자신의 친구의 친구를 소개했다. 그 사람이 세븐틴을 좋아한다고 했다. 내 번호를 넘겨도 되냐고 물어봤고 제발 넘겨달라고 했다. "번호 넘겼어!", 친구에게 답장이 왔다. 소개팅을 해도 이거보단 덜 떨릴 것 같았다. 한참을 두근두근 긴장하고 있던 나에게 모르는 사람에게서 카톡 하나가 왔다.
13명의 세븐틴이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나도 13명의 아이들이 활짝 웃는 또다른 단체사진으로 화답했다. 2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지금의 덕메를 나는 그렇게 만났다.
나보다 1년 정도 먼저 세븐틴에 입덕한 이 덕메는 나에게 1년 덕후 선배로서 내가 놓치면 안될 필수적인 정보(반드시 봐야하는 영상)를 끊임없이 쏟아 부어줬고, 나는 그 덕분에 더욱 빠른 스피드로 세븐틴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팬미팅이나 콘서트 같은 오프라인같은 이벤트가 없더라도 이 친구를 가끔 따로 만나기도 했다. 한 번은 에스쿱스의 생일을 맞아 오후 반차를 쓰고 함께 홍대와 합정에 있는 생일 카페를 돌았다(그리고 둘 다 코로나에 걸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날 생각난 세븐틴에 대한 감상을 나눴고, 끊이지 않는 세븐틴의 떡밥을 그녀와 같이 샅샅이 훑어보며 즐거워했다. 그 중 최고의 떡밥은 역시 컴백 떡밥이다.
세븐틴 팬들은 모두 인정할텐데, 'Rock with you'가 담겨 있는 세븐틴의 미니 9집 'ATTACA'는 명반 그 자체다. 이 앨범의 컨셉 포토와 티저 영상이 떴을 때, 그리고 하이라이트 메들리 영상이 떴을 때 이 덕메와 나는 새벽이 되거나 말거나 도파민에 돌아버린 상태에서 진정할 수 없는 흥분의 감상을 나눴다. 오프라인 팬미팅이나 콘서트를 간 것을 제외하고, 세븐틴 입덕 후 가장 재미있던 덕질의 순간도 바로 이 새벽이었다.
다음 날 회사에서 나는 몹시 힘들겠지만,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의 벅차오름을 인터넷 커뮤니티나 틑위터를 통해 익명의 누군가들에게 쏟아내는 것이 아닌, 실체가 있는 친구에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런 나의 감상을 귀찮아하지 않고 두배 세배의 주접으로 되돌려주는 덕메가 생겼다니, 그리고 그 덕메와 덕질하는 대상이 바로 세븐틴 너네라니, 어떻게 이런 축복이 나에게!
대화의 주제는 아직도 여전히 80% 이상은 세븐틴이지만, 조금씩 서로의 다른 이야기도 알게 됐다. 각자가 일터에서 어떤 고민이 있는지 나눴고, 같이 욕도 했다. 세븐틴 덕분에 인생의 어떤 새로운 목표가 생겼는지도 나눴다. 일본어를 배워야겠다는 막연한 다짐을 실행에 옮길 수 있던 데에도 이 친구의 지분이 포함되어 있다.
덕질을 하다보면 안타깝게도 가끔 슬픈 일이 생기곤 하는데, 그럴 때에도 이 친구랑 위로아닌 위로를 나누며 멘탈을 복구시킬 수 있었다. 덕질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예상치 못한 불상사가 생겼을 때 탈덕을 하든 흐린 눈을 하고 넘어가든 필사적으로 쉴드를 치든, 본인의 녹아내린 멘탈을 빠르게 복구하는 것은 즐겁고 건강한 덕질에서 꽤 중요한 요소다.
혼자서 세븐틴 덕질을 해도 나는 재밌어했을 것이다. 일단 노래와 춤과 비주얼과 관계성과 모든 것이 이토록 내 취향이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덕메가 있어서 그 재미는 딱 두배가 되고 슬픔은 딱 절반이 됐다.
기쁨은 함께 나누면 더 커지고 슬픔은 더 작아진다는 -말은 덕질에도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같이 하는 덕질은 혼자 하는 덕질보다 무조건 더 유익하고 무조건 더 재미있다. 나 재밌자고 하는 덕질, 혼자하지 말고 꼭 같이 해야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