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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솜사탕 Sep 08. 2023

무대, 예능, 연기…그 중의 제일은 본업이라

나라는 인간이 요란하게 덕질을 하는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현생까지 내팽개치고 덕질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아니다. 당연히 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입으로는 일하기 싫다 집에가고 싶다 징징거릴지언정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나름대로 성실하게 K직장인의 본분을 다하고 있다. 물론 나는 쓸데없이 양심적인 사람이므로 업무 시간의 상당 부분, 머릿속에선 덕질을 포함한 여러가지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부인할 순 없겠다.


어쨌거나 대부분의 덕후가 나처럼 자신의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현생과 덕질에 적당히 배분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현생의 상당부분이 예측하기 힘들 때 생긴다. 10대나 20대 초반처럼 현생이 학업일 경우, 정해진 학사 일정이나 시험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덕질에 몰두할 수 있을 때와 몰두해서는 안될 때를 (일단 이성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직장인의 경우에는 자신의 앞날을 잘 모를 때가 더 많다. 평소라면 한가했을 시기에 갑자기 새로운 프로젝트나 이슈가 들이닥치거나, 예상치 못한 인사이동이 생긴다거나, 상사나 팀원이 바뀌면서 새롭게 맞춰야 하는 일들이 늘어나거나, 갑자기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바람이 쓸데없이 전 산업분야를 강타한다던가 등등....의 셀 수 없이 많은 거지같은 이유로 덕질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시기가 예상치 못하게 생기곤 한다. 사람이 가진 자원은 한정적인지라, 덕질에 멀어진 이 기간 동안 어쩔 수 없이 본진에게 소홀해질 수밖엔 없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시기에 주로 멘탈이 잘 털리거나(나의 멘탈은 바스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체력이 방전되어 쉽사리 무언가에 집중하지 못하는 반수면상태를 겪곤 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덕질을 위한 떡밥은 쉬지 않고 튀어나온다. 결국 현생이 쓸데없이 무거워진 이 시기에는 수많은 떡밥을 다 챙기지 못한 채, 눈 앞에서 떡밥이 시시각각 밀려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 세븐틴은 특히나 소속사에서 챙겨주는 영상도 많고, 멤버들도 쉴 새 없이 라이브 방송을 비롯해 온갖 SNS에 뭔가를 업로드하는 등 떡밥이 많기로 소문난 그룹이다. 밀리는 떡밥들을 언제 다 챙겨보나 싶어 막막함이 앞섰다. '이 기간이 끝나면 봐야지' 했지만 K직장인의 현실은 그다지 녹록지 않다. 떡밥을 놓치니 커뮤니티나 트위터에서 일어나는 대화에도 끼기가 어려웠다. 랜선에 떠다니는 수많은 캐럿들 사이에서 소외되는 기분이 들었다. 눈에서 세븐틴이 조금씩 멀어져 갔다. 이렇게 잠깐 덕질을 쉬어가려무나, 라고 나의 이성이 속삭였다. 이성의 속삭임에 수긍하려던 찰나였다.





감정이 다시 내 머리채를 잡고 덕질의 세계로 끌고 왔다. 잠시 머리를 식히겠다고, 그나마 밀린 영상 중에 못 봤던 무대 영상을 본 직후였다.


이 무대를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애들을 어떻게 잠시 쉬어가? 이 곡을 이렇게 새롭게 풀어내는 애들을 어떻게 쉬어가? 현생 따위가 조금 바쁘다고 지금이 덕질을 쉬엄쉬엄할 시간인가 고민했던 나 자신아, 제정신이니? 애들은 쉬엄쉬엄 하지 않는데 내가 뭐라고?


내 감정이 나한테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래, 틀린 말이 하나도 없구나. 휴덕해야 하나 싶었던 마음은 빠르게 접는다. 어차피 피곤할 거라면 그냥 덕질까지 하면서 피곤하자고 생각한다. 물론 이성적인 생각일 리 없다. 지금은 이성이 완전히 후퇴한 순간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면 그렇지, 내 인생에서 이성이 이렇게 쉽게 이길리가 없다.



내가 만약 잠깐 본 영상이 예능 콘텐츠였다면, '하하 얘네는 역시 어딜 가도 웃겨' 하고 눈물을 훔치며 다시 현생의 구렁텅이로 들어갔을 것이다. 화보 콘텐츠였다면 '안그래도 미쳐버린 비주얼을 꾸며놓으니 더 미쳐있군' 하고 감탄하며 역시나 다시 현생의 구렁텅이로 들어갔을 것이다. 연기와 관련된 콘텐츠라면 '아쉽지만 이번에는 못 보고, 나중에 몰아봐야지' 하고선 현생의 구렁텅이에 빠진 채 아예 보는 것 조차 미뤘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대 영상은 다르다. 무대는 현생에 지쳐 바짝 말라버린 아이돌 덕후의 가슴에 물탱크를 수천대 부어버린다. 아이돌이 본업을 잘하는 것을 보고선 그냥 현생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건 덕후가 아니다. 본업의 힘은 이렇게 강하다.



사실 무대 말고도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만날 콘텐츠는 엄청 많다.


대표적인 활동이 예능이다. 요즘이야 TV 예능의 힘이 예전같지 못하지만, 2세대 아이돌이 활동하던 때만 해도 예능에 나가서 본인과 그룹을 동시에 유명하게 만드는 일들이 허다했다(아마도 '중소의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아이돌 그룹이 대거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세븐틴의 경우에도 기특한 승관이가 다양한 예능에서 활약하며, 세븐틴은 몰라도 '부승관'은 아는 사람들을 여럿 만드는 데 기여했다. 유튜브에서 다루는 예능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아이돌이 출연할 수 있는 유튜브 예능 콘텐츠도 덩달아 늘어났다.


연기나 뮤지컬도 빼놓을 수 없다. 이미 연기로 누구도 반박하기 어려운 커리어를 쌓은 아이돌들이 여럿 있다. 이런저런 아이돌 그룹의 멤버 면면을 보다보면 아예 소속사가 기획할 때부터 향후 연기를 시키려고 넣은 듯한 멤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연기 활동은 연기를 잘 한다는 전제 아래, 아이돌이 연예인으로서 본인의 인지도를 쌓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나 영화는 케이팝 문화보다 훨씬 더 대중적인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걔가 아이돌이었어?' 라는 반응을 들을 때도 있다. 물론 아이돌 팬으로선 꽤나 섭섭한 반응이긴 하지만, 덕후와 갓반인의 심정은 출발점부터가 다르므로 넘어가도록 한다. 가창력이 좋은 경우 뮤지컬에도 도전한다. 내가 병렬로 덕질하는 세 개 그룹 모두 뮤지컬 활동을 한 멤버들이 있다. 그 외에도 잡지나 광고 화보 촬영도 끊임없이 진행된다.


덕후로서는 그저 감사한 콘텐츠가 맞다. 우리 애 얼굴과 끼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살려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재미있는 건 몇 번씩이나 돌려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잠시간 덕질의 휴식기간을 가지려던 덕후를 다시 덕질의 세계로 회귀시키는 힘을 가진 콘텐츠는 무대가 유일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이돌이란 무엇인가. 이 쓸데없이 철학적인 질문 앞에서 아이돌의 본업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노래를 내는 가수이자, 그걸 그냥 앉아서 또는 서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노래에 맞는 댄스와 퍼포먼스를 입히는 퍼포머다. 이 모든 걸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의상과 헤어와 메이크업으로 노래를 감싸는 비주얼적인 장치를 풀세트로 장착하고 나와야 노래와 퍼포먼스가 가진 힘이 극대화된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동시에 각 멤버들은 끼와 매력을 드러내는 자신들만의 어떤 포인트를 살리면서도, 멤버들 간의 케미가 구석구석에서 배어나오도록 연출한다. 이 수많은 연출 뒤에는 그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연습이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걸 하나로 보이게 하는 게 무대다. 이 아이들이, 자신들의 본업을, 너무나 열심히, 그런데 기깔나게 잘 하는 이 모습이 무대에서 펼쳐진다. 그게 콘서트든, 음악방송이든, 무슨 지방에 행사든 상관없다. 아이돌은 무대에서 그 진가가 나오고, 무대가 곧 아이돌의 본업이다. 예능이고, 연기고, 뮤지컬이고, 화보고,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또는 부가적인 수익을 위해 하는 활동일뿐 아이돌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고 보는 이유다. 이 활동들에는 노래와, 퍼포먼스와, 이를 극대화하는 연출과, 무엇보다도 멤버들 간의 케미가 희미하다.


아이돌 덕후들은 이 사실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냥 자동으로 알고 있다. 무대를 보면서 느낀 벅차오르는 감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학습시켜버린 결과다. 그래서 수많은 아이돌 덕후들은 잠시 현생에 치여 덕질을 느슨하게 이어가거나, 혹은 아예 놓아버리다가도 어떤 '무대'가 뜨면 연어처럼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자기의 지친 일상에 다소 미진했던 '재미 요소'를 때려 붓기 시작한다. 그 힘으로 덕후들은 다시 험난한 K현실세계를 살아갈 것이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수많은 아이돌들의 바람이, 설사 그것이 입바른 소리라 할지언정, 진짜로 이뤄지게 만드는 힘은 무대에 있다.



만약에 덕후들이 보는 어떤 바이블같은 게 있다면, 아마 첫 장에는 이 말이 어울리지 않을까. '무대, 예능, 연기…그 중의 제일은 본업이라'. 예능이고 연기고 화보고 다 좋다. 떡밥 최고다. 하지만 그 중에 제일은 무조건 본업이다. '무대 잘하는 아이돌', 내가 생각하는 아이돌을 향한 최고의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글을 빌어 나의 본진들에게 전한다. 여러분들은 무대를 잘하다못해 아예 씹어드시는 아이돌입니다. 오래오래 멋짐이란 것이 폭발하는 무대 해주시는 은혜를 저에게 베풀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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