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종 전력에도 고작 벌금형이라니! ㅂㄷㅂㄷ
"피고인은 삼성워치 5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피해자로부터 돈을 받더라도 이를 생활비 등으로 사용할 계획이었으므로, 처음부터 피해자에게 물건을 보내줄 의사나 능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피고인 명의의 G은행 계좌로 123,000원을 송금받은 것을 비롯하여 총 9회에 걸쳐 합계 1,091,000원을 송금받았다."
삼성워치 5 외에도 루미녹스 시계, 포터리 셔츠, 솔리드 옴므 티셔츠, 스톤아일랜드 바지, 폴로 셔츠, 파타고니아 바람막이, 테니스 가방 등을 판매한다는 글을 중고나라 등에 올리고 돈을 받은 뒤 물건을 보낸 척 연기하다가, 경찰에 신고 혹은 더치트에 사기꾼이라고 번호를 등록하면, 그제야 돈을 돌려주는 사기를 쳤던 파렴치한을 법정에 세우기까지의 지난했던 이야기를 풀어본다.
사기를 당한건 남자친구. 수법은 이랬다. 처음에는 우체국 택배 수거를 신청했는데, 크기가 커서 가져가지 않았다는 둥 핑계에 핑계가 꼬리를 문다. 며칠 뒤 대뜸 자기도 사기에 이용당했다며 돈을 환불해줄테니 계좌번호를 부르라고 한다. 이때 경찰서에 진정서 접수 여부를 물었는데, 신고한 사람에게는 돈을 돌려주고 그러지 않은 사람의 돈은 그대로 꿀꺽하는 식이다.
사기 신고는 인터넷으로도 할 수 있지만, 신고 후 경찰서를 방문해야 조사가 시작된다. 그제야 입건된다는 뜻. 이런 이유로 프랑스에서 2022년 12월 사기를 당했지만 1년 뒤 귀국하고 나서 접수를 할 수 있었다. 경찰서 방문을 앞두고 사기꾼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던 중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피해자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카톡방에서는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 퇴장을 당하지 않는다.
방에 들어가서 증거자료를 제출하니 이놈이 이미 기소돼 재판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후로 한동안 대화가 없었는데, 이틀 연속 같은 수법으로 사기를 당했다는 피해자들이 등장했다. 활동을 재개한 것. 이 과정에서 번호를 바꾸고 잠적한 사기꾼의 새로운 전화번호를 알게 됐다. 번호를 저장해도 카카오톡에는 뜨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 받겠지? 하면서도 번호를 눌러봤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난 뒤 스피커 반대편에서 "여보세요?" 소리가 나오자 무방비 상태였던 나도 당황했다. <OOO 씨 맞냐고> 물어보니 그렇단다. 대본을 준비하지 못한지라 다짜고짜 <왜 물건을 안 보내냐>고 물었다. 당황할법한 전개인데도, 이 사람은 그런 기색 없이 무슨 물건이냐고 태연하게 되묻는다. 워낙 사기를 많이 쳐서 기억조차 못하는 듯했다.
그 와중에 "자기 번호는 어떻게 알았냐"라고 따진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까 나오더라> 하니 "그게 말이 되냐"며 적반하장으로 화를 낸다. <엄 그건 검색 능력의 차이인 것 같은데요?> 실실 웃으면서 대꾸했다. 할 말을 잃었는지 화제를 바꾼다. "본인 일도 아닌데 왜 화를 내느냐", "무슨 관계냐"라고 물어보길래 <친구>라고만 답했다. 내 정보는 최소한으로 노출해야 하니까.
이어 <왜 사기를 치냐>, <돈 내놔라> 와다다다 쏟아내니 "나이도 많은 노처녀가 히스테리를 부린다"라고 도발을 한다. "나 결혼했는데?"라고 거짓으로 답하니 "결혼한 게 니 인생 최대 업적인가 보네"라고 비아냥 거리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이런 식으로 골을 질러서 상대를 흥분하게 만든 뒤 욕이라도 하면 녹취가 있다며 협박할 모양새라, 끝까지 존댓말로 말발을 세웠다.
확인해 보고 연락 주겠다며 전화를 끊더니 그 사이 내 번호를 저장해서 카카오톡 사진을 확인했나 보다. "친구가 아니라 부부시네요 사진 보니깐. 이게 뭐라고 거짓말을 하세요 참나. 15분에 전화 걸 테니 받으세요. 변호사 하고 통화하고 전화하겠습니다. 나이 드실 만큼 드신 것 같은데 예의 좀 차리고요. 뭔 얘기 듣고 화가 잔뜩 난지 모르겠는데". 참고로 난 결혼하지 않았지만 반응이 재밌어서 냅뒀다.
변호사 드립에 변호사 번호를 달라하니 다시 전화를 걸어와 궤변을 늘어놓는다. "올해 2월에 법원에 공탁을 걸어놨고 받아가라고 문자를 뿌렸는데 안 찾아간 사람 잘못"이란다. 애초에 신고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공탁을 받아갈 수가 없으니 이 자체도 헛소리다. 하지만 어디까지 개소리를 하려나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나는 피싱 전화가 오면 속으로 '아싸!'를 외치며 녹음 버튼을 누르는 스타일이다.
다음은 그와 주고받은 일방적인 티키타카.
(1) 공탁을 걸어놓은 관할 법원이 어디냐고 물어봤다.
→ (관할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지) 답이 없다.
(2) 그럼 어디 사냐고 하니까 그쪽은 어디 사냐고 되묻는다. 서울이라니 자기도 서울 산단다.
→ 거짓말이다. 수사는 지방 경찰서에서 진행 중이니, 이 놈은 그 경찰서의 관할구역에 거주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3) 그럼 서울에 총 5개의 법원이 있는데 그중 어디냐고 물었다
→ 또 답이 없다.
(4) 서울에는 중앙지법, 동부지법, 서부지법, 남부지법, 북부지법이 있는데, 이중에 어디냐고 5지선다로 물었다.
→ 여윽시 답이 없다.
그러더니 트집을 잡고 싶었는지 또 인식 공격에 들어간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한테 왜 그렇게 무례하냐"라고 한다. 오호라, <몇 살인데 그러시냐> 물으니 "스물다섯"이라더라. <어?! 나는 슴셋인데!!>라고 하니까 비웃으면서 "카톡 사진을 봤다며 구라 치지 말라"라고. <나 원래 노안인데!!> 하니까 또 말을 못 잇더니 "오늘 오후 5시 전에 입금해 줄 테니 기다리라"며 짜증을 확 내고 전화를 끊었다.
'슴셋 드립'에서부터 희열을 느낀 나는 이 사기꾼을 가만히 두고 싶지 않았다. 계속 문자를 보냈다. <변호사 번호 주세요, 제가 통화하게요>, <공탁한 법원이랑 사건번호도 알려주세요, 사건번호만 주시면 됩니다 나머진 알아서 할게요>. 그랬더니 답이 왔다. "뭔 이딴 식으로 무례한 사람이 뭔 짓 할 줄 알고 내가 번호 넘겨 줍니까 23살이니 말장난이나 하고".
숨도 쉬지 않고 답을 보냈다. <13살이에요 사실>, <자기가 한 행동은 모르고 무례 운운하시는 게 재밌네요>. 20분 뒤 답이 없어서 또 문자를 보냈다. <근데 공탁이 뭔지는 아시죠?>, <공탁 공고 보려면 사건 번호가 필요해요>, <공탁은 공고기간이 지났어도 검색이 가능하답니다>, <공탁 네이버에 검색하고 계신 건가요>, <네이버보다 대법원 홈페이지 보시는 게 나을 거예요> 하고 대법원 링크를 보냈다.
드디어 답이 왔다! "아까 통화 끊자마자 입금 못 받으신 것 확인해서 이미 입금했고 나도 통장 명의 도용당한 피해자인데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고집부리는 13살 분한테 제가 뭐라고 대답할까요?"라고 하기에, <피해자의 알 권리랄까요?>라고 응수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과 달리 입금은 이뤄지지 않았고, 몇 차례 문자 폭탄을 투하한 끝에 은행 계좌에 돈이 들어왔다. 고작 8만5천원이었다.
입금을 확인하기 전에 <아휴 말이 안 통하네요 그냥 기소 의견으로 송치해 달라고 할게요>, <이번에는 직접 사건번호 받아서 공판도 챙겨보겠습니다>라고 문자를 보내니 바로 전화가 오길래 거절하고 차단을 박았다. 경찰에 고소할 때 이미 기소됐다는 사실을 알렸으나, 수사관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몇 달간 수사에 진전은 없는 듯했다. 그러다 어느 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사기꾼이 지금 경찰서에 출석했는데, 돈을 돌려주고 사과를 하고 싶단다. 피해자가 너무 많아서 누구한테 돈을 돌려줬고, 안 돌려줬고를 구별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나 보다. 법원에 합의했다고 주장하려고 사과하는 거라면 필요 없고, 강력한 처벌을 원하니 기소 의견을 달아 검찰에 송치해 달라고 했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법원에서 진행 중인 기존 사건에 병합된 채로 재판이 진행됐다.
참고로 사기꾼이 사기를 치고나서 돈을 돌려줬어도 피해자를 기망했다는 범죄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기는 반의사불벌죄가 아니다. 즉, 고소 후에 변제가 이뤄져도 기소될 수 있다. 번거롭더라도, 소액이라도, 사기를 당했을 때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이유다. 수사 단계에서 합의금을 주면서 합의서를 써달라고 할 수도 있다. 이때 합의금을 받지 않고 처벌을 원한다는 의사를 밝히면 되는 거다.
공소장 접수는 2023년 7월이었지만 2025년 1월 1심 재판 결과가 나오기까지 1년 6개월 동안 이 사기꾼은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사기를 치고 다녔다. 피해자 카톡방에 수십 명이 들락날락거렸고, 그때마다 나는 열심히 정보를 제공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려면, 먼저 경찰에 고소하고 추후 돈을 돌려받더라도 고소를 취하하지 않는 게 좋다고 했으나 이에 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했다.
계속 사기를 치고 다니는 와중에도 이 사기꾼은 선고 기일이 다가오자 법원에 반성문을 제출했다. 도대체 뭐라고 지껄였을까? 그 내용이 너무 궁금하다. 그리고 법원은 이를 유리한 정상으로 인정했다. 동종 전력으로 과거 벌금형을 받았기에, 이번에는 법정 구속을 기대했으나 최종 결과는 수백만 원 대 벌금형에 그쳤다. 이 돈을 안내면 10만 원을 1일로 환산한 기간 노역장에 유치한다고.
당연히 법원에서는 검사가 기소한 내용 외에 이 사기꾼이 하고 다닌 짓을 알 길이 없겠지. 알았더라면 판결문에 "피고인이 잘못을 인정하며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점"이라는 표현을 담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장담하건대 이 사기꾼은 앞으로도 계속 사기를 치고 다닐 것이다. 혹시라도 피해자가 있다면 반드시 경찰에 신고해 주길. 그래야 어제보다는 내일이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