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생라자르역 인근 엔터프라이즈에서 오전 9시에 픽업하기로 한 차가준비되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고 물었더니 1시간 30분을 부른다. 그 정도야 뭐, 프랑스에서는 길지 않은 대기 시간이니 기다리겠다고 했다. 마침 근처에 주말을 맞아 열린 벼룩시장이 있어서 구경하며 2시간을 보내다 다시 사무실에 찾아갔는데도 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려고 계획한 여행이었기에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환불이 되냐고 물어보니 당연히 된단다. 그럼 환불을 해주겠다는 문서를 달라고 하니, 전산에 입력을 완료했고 이메일로 연락을 주겠단다. 찜찜했지만 대기업인 데다, 자주 차를 빌렸던 브랜드인지라 믿고 떠났다. 이게 불행의 서막이었다.
2주일이 지나도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귀국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라 사무실로 찾아갔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 현금으로 돈을 돌려달라 했으나, 시스템상 불가능하단다. 적어도 환불을 해주겠다는 이메일이라도 보내달라고 하니, 영어로 앞뒤 문법 다 틀린 메일을 하나 보내줬다.의역해보자면 '예약이 지켜지지 않았으니 돈을 환불해 줄 것이다'라는 취지였다. 돌려받아야 할 돈은 103.42유로. 요즘 환율로 치면 15만 원 수준이다. 다시 2주가 지나 한국행 비행기를 탈 때까지 엔터프라이즈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흐름이었다.
파리에 남아있던 남자친구를 통해 독촉을 했다. 이번에는 차를 예약한 사이트(렌탈스닷컴)에서 돈을 받아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결제를 렌탈스닷컴에서 했기 때문이란다. 정작 렌탈스닷컴 측에서는 네가 당일에 연락했으면 돈을 환불해 주든, 다른 예약을 잡아주든 했을 텐데 이미 시간이 지나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단전부터 깊은 분노가 올라왔다. 앞뒤 안 가리고 바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전화비용 출혈이 상당했지만 이때 다시 본사 서비스센터에 연락을 해보겠다는 약속을 구두로 받고 전화를 끊었다. 또 한 번의 패착이었다.
잠들기 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정 무렵 스카이프로 5천500원에 100분 통화가 가능한 프로그램을 사서 엔터프라이즈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파리는 오후 4시, 5시쯤 업무를 마무리할 시점이었을 것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잠깐 기다리라면서 대기버튼을 누르고 돌려버린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전화를 끊고 다시 걸기를 반복했다. 14번째 전화에서 직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제발 그만 전화해달라고 했다. 지금 마감 중인데 아무 일도 못하겠다며.당장 네가 조치를 하지 않으면 나는 계속 전화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하니 오늘 안에 메일을 보내주겠다고 한다. 내일 아침 내가 눈 떴을 때 너의 메일이 와 있지 않으면 아침 8시부터 오늘처럼 똑같이 전화를 하겠다고 경고했다. 제발 자기 말을 믿어달란다. 그렇게 또 속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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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메일은 와 있었다. 통화한 직원이 본사 고객센터에 이 고객에게 환불을 해줘야 하니 답을 달라는 메일을 참조로 보냈다. 이 메일을 받은 날짜가10월 31일.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하고도 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틈틈이 퇴근시간에 전화를 걸었지만 스카이프에 충전한 시간을 다 쓸 때까지 진전이 없었다. 남자친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나 대신 싸워달라고 부탁했다. 수차례 시도한 끝에 남자친구가 드디어 환불을 해주겠다는 말을 들었다는데, 계좌번호도 물어보지 않았단다. 갈길이 멀구나! 일단 메일로 계좌번호를 보내놨다. 명백한 엔터프라이즈 직원의 잘못인데도 원인제공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피해자만 동분서주한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이제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존심의 싸움이 돼버렸다. 여기서 지면 지난 3년간 프랑스 행정과 싸워온 나의 레거시가 무너진다는 생각만이 남았다.
이제는 메일로 경고를 시작했다. 계속 환불을 차일피일 미룬다면 프랑스와 유럽연합 소비자분쟁센터, 그리고 엔터프라이즈 본사가 있는 미국에도 민사, 형사상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주장했다. 본사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다고 주장하던 이 직원은 본인이 며칠 뒤에 본사에 갈 일이 있으니 그때 이 문제를 매듭짓고 오겠다고 했다. 그게 통했는지, 어쨌는지 렌털스카닷컴에서 환불을 해주겠다는 이메일이 12월 14일에 왔다. 결제한 카드로 돈을 돌려줬고, 최대 10영업일이 걸릴 수 있단다. 야호! 쾌재를 외쳤지만 이 또한 거짓말이었다. 2주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다시문의하니 착오가 있었단다. 그리고 환불이 이뤄진 게 2024년 1월 11일. 고작 100유로 남짓을 돌려받는 데 자그마치 5개월이 걸린 것이다.
프랑스에서 지내는 3년동안 이런 일은 무수히 반복됐다. 나는 분명히 잘못한 게 없다, 사태의 원인은 상대의 실수 내지는 잘못이다, 하지만 나의 피해를 구제하려면 내가 싸워서 쟁취해야만 한다는 악순환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사람을 지치게 만들어서 문제제기 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게 프랑스 행정의 목표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민간 기업에서도 이럴진대 공공 영역으로 넘어가면 어떨까? 여기서 할 일이 아니다, 저기로 가라. 저기에 가보면 아니다 아까 거기로 가라. 서로 핑퐁만 한다가 내 멘탈만 탈탈 털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덕분에 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싸워야하는지를 체득했다고 한다면 지나치게 긍정적인걸까.
프랑스에서 일을 처리할 때는 절대 말로 하는 약속을 믿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증거를 남겨야한다. 이메일로 서약을 받거나, 적어도 현장에서 서류를 만들어야한다. 이렇게 증거가 있다면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할지언정 언젠가 반드시 문제는 해결된다. 그저 중간에 포기하지만 않으면 될 뿐이다.
결국 남자친구의 차를 타고 떠난 여행, 벨기에 겐트에서 제단화 '하나님의 어린양을 경배하라'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