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 나는 나의 만족을 위해서 프랑스어 시험을 봤다. 프랑스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3년간 프랑스에서 살다왔음을 증명하는 객관적인 지표를 갖고 싶었을 뿐이다. 고등학교 때 처음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비슷한 마음으로 DELF A1을 땄다. 프랑스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한심한 짓인지 금방 알 것이다. A1은 그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 나는 오롯이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장 낮은 단계의 시험에 응시했다. 수시로 대학을 지원할 생각도 없었기에 정말 기분 내기 용도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A1이라도 따놓기를 참 잘했구나 싶다. 10대에 따놓은 어학 자격증 덕분에 30대에 프랑스로 나가겠다고 손을 들었을 때 당당하게 증빙자료를 제출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DELF는 토익, 토플과 같은 영어 시험과 달리 유효기간이 없다. 한 번 발급받으면 평생을 간다. 다만, 분실했을 때 재발급이 불가하다, 고 알고 있었는데 요새는 바뀌었으려나? 이 부분을 허점으로 여겨왔으나, 이번에 B2를 준비하다 보니 이 정도로 빡세게 공부해야 하는 거면 그 점수를 평생 인정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델프 시험 과목은 듣기(Compréhension orale·CO), 읽기(Compréhension écrite·CE), 쓰기(Production écrite·PE), 말하기(Production orale·PO) 등 4가지다. 과목당 25점 만점으로, 한 과목이라도 5점을 넘지 못하면 탈락이고, 총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합격이다. 사실 듣기와 읽기는 객관식이기 때문의 나의 실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과목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쓰기와 말하기에는 평가하는 채점관의 주관이 개입되기 때문에 실제 실력보다 점수가 높게 나올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
고등학생 때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시험을 봤더랬다. 말하기 시험에서 생선 그림을 보여주고 이게 du poisson(생선)인지 le poison(독)인지 구별하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수준이었던 기억이 난다. 아주 쉬웠다는 뜻이다. 약 20년 만에다시 본 DELF는 독학했다. 프랑스인 과외 선생님을 구해서 4번 정도 수업을 해봤는데 서울에 있는 직장과 서울 밖에 있는 집 사이를 매일 출퇴근하는 와중에 따로 수업을 듣는다는 건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 소비였기에 홀로 준비하자고 마음먹었다.
나의 실력은 B1~B2 사이 어디엔가 있다. B1을 본다면, 20여 년 전처럼 아무런 준비를 하고 가지 않아도 되겠지만, 무턱대고 B2를 보기에는 부담스러운 수준이랄까. DALF C1, C2는 애초에 꿈도 꾸지 않았고, 그래도 DELF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B2에 도전하고 싶었다.이렇게 프랑스어에 귀가 열리고 눈이 트인 적이 없으니 그 문이 닫히기 전에 시험을 봐야겠다는 심산이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응시할 수도 있었지만, 뭐랄까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프랑스에서 보는 게 나에게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듣기, 읽기야 어디서 보든 상관이 없을 테다. 문제를 맞히냐, 틀리냐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점관이 존재하는 쓰기, 말하기는 다를 수 있다. 만약 나와 같은 날 시험을 본 사람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다면? 상대적으로 나의 실력이 별 볼 일 없어 보일 것이다. 프랑스에서 DELF를 응시하는 사람들은 프랑스에서 어학연수를 했거나, 대학 등 진학에 DELF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기에 직장을 다니면서 설렁설렁 준비한 나보다 더 필사적으로 시험을 준비했을 것이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해라! Pourquoi pas?
막상 시험 접수가 시작되니,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주눅이 들었다. 내가 한 달 뒤에 시험을 볼 실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음 시험 일정을 찾아보니 다섯 달 뒤. 머리를 굴려봤다. 과연 5개월 동안 공부를 할 것인가? 아니다. 내내 스트레스만 받다가 똑같이 시험을 한 달 앞두고 접수가 시작되면 그제야 울면서 벼락치기를 하겠지. 그래 일단 봐보자! 용감하게 27만 9천 원을 결제했다. 그로부터 시험을 볼 때까지 후회를 여러 번 했다. 왜 이 시험을 본다고 했을까...
DELF 응시는 연초부터 계획했던 일이지만, 실제 준비는 접수를 하고나서 한 달 정도 열심히 했다. 요가도, 헬스도 가지 않으며 일을 하지 않을때는 프랑스어 공부만 했다.주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 dictée를 했는데 듣기 실력과 작문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됐다(고 믿는다). 막판에는 '빡따종'(https://www.partajondelfdalf.com/)이라는 사이트에서 듣기, 읽기 문제를 내려받아서 풀었다. 이 사이트가 제공하는 듣기는주로 라디오, 읽기는 주로 기사를 기반으로 했는데 개인적으로 듣기와 읽기 모두 실제 DELF 보다 난이도가 높은 듯 하다.
Dictée를 함께해 준 몽당연필
시험을 앞두고 제일 걱정한 부분은 쓰기와 말하기였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쓰기는 선방했고, 말하기는 망한 듯싶다. 쓰기는 주로 공식적인 편지를 쓰는 형태이기 때문에 양식을 외우고, 논리 전개만 잘하면 된다. 하지만 말하기는 도통 어떤 주제가 나올지 모르니 여러 주제에 관한 나의 생각을 프랑스어로 정리해놔야 하는데 나는 그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대충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겠다는 얼개만 잡아놓고, 다양한소재에 관한조사는 하지 않은 게 패인이었다.
일단 작문 시험에는 편지쓰기가 나올 것이라는 가정 하에 여는 글, 맺는 글과 같이 나만의 기본 형식을 만들어 암기했다. DELF 교재에 나와 있는 문장들은 너무 딱딱해서, 내 입맛에 맞는 표현으로 외우기 쉽게 변형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3년 사는 동안 항의 편지와 메일을 자주 썼기 때문에 크게부담스럽지 않았다. 준비하는 동안 시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 통 혼자 써보고, 이걸 토대로 실제 시험에서 내용만 바꾸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이 전략이 먹혔다.
2024년 5월 DELF 작문 주제는 회사 고용주에게 구내식당을 설치해 달라는 편지쓰기였다. 문제에는 lettre가 아니라 courrier라는 표현이 나왔다. 둘 다 편지다. 직원들이 도시락을 매일 싸 오는 불편함을 지적하고 식당이 있으면 직원과 회사 모두에 좋은 일이라는 내용을 포함하라는 주문도 있었다. 프랑스에서 일했던 남자친구네 회사에 구내식당이 없었고, 어느 날부터 외부 식당에서 사용할 수 있는 '티켓 레스토랑'도 주지 않아 도시락을 싸가야 했는데 그게 얼마나 불편하고 귀찮은 일인지 옆에서 지켜봤던 지라포인트를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시장에게 보내는 편지든, 고용주에게 보내는 편지든 처음에는 '노고가 많으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푸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편지를 보내는 목적이 대개 불만, 항의 내지는 내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인데 다짜고짜 내 주장을 늘어놓는 것보다 칭찬을 먼저 투척해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보자는 취지다. 이런 게 무슨 소용이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이런 형식적인 것을 좋아하는 듯싶다. 하여 나도 연초에 직원 휴식공간을 마련해 주며 근무환경 개선에 힘써줘서 서 고맙다는 이야기로 시작해편지를 써내려갔다. 250자를 언제 다 쓰나했는데, 틀이 잡히니 답안지채우는 것은 금방이었다.
난관은 말하기에 있었다. DELF 구술을 잘 보려면 학원을 다니든, 과외를 받든 프랑스어 능통자에게피드백을받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럴 시간이 없었기에 그냥 혼잣말로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중얼거렸다. 이 표현은 어떻게 하지? 하고 구글 번역기나딥엘도 돌려보고 챗GPT에 이 표현이 어색하진 않은지, 자연스럽게 말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물어봤다. 하지만 챗GPT는 영어 기반 AI 모델이라는 게 맹점이다.그래서 이거 진짜 프랑스인들이 많이 쓰는 표현이야? 확실해? 따져 물었던 적이 있는데 확실하다고 하더군.
DELF 구술 시험은 주제가 적힌 종이 10장 중 2장을 뽑고, 그중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골라서 답변하는 식으로 진행한다. 내가 뽑은 주제는 여성할당제가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느냐와 가난하면건강한 음식을 접하기기 힘든가였다. 짧은 기간 DELF 구술을 준비한 나의 문제는polémique한 주제를 일부러 피했다는 것이었다. 두 개의 주제 중에서 덜 논쟁적이지 않은, 쉬운 주제를 택해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한 게 패착이었다. 내가 고른 두 주제가 모두 그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나마 내가 몸소 겪어서 알고 있는 여성할당제를 택했다. 내용은 너무나 잘 알지만, 이걸 프랑스어로 표현해 본 적이 없으니 초딩 수준의 발화에 그쳤다. Monologue는 얼마 못한 듯싶고, débat를 길게 했다. 다행히도 질문은 잘 알아들었는데, 이게 점수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쳤을지는 모르겠다. 내가 열심히 설명하니 채점관이 내 이야기를 듣다가 아 이걸 말하는 거야? 하는 식으로 정리해 줬다.시험 보는 나보다 나의 대답을 듣는 채점관이 더 힘들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고마워요 언니들... 점수 잘 주세요...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결과는 한 달 뒤에 나온다. 사실 말하기는 망쳤다고 했지만 후회는 없다. 내가 준비한 한도 내에서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말하기가 5점 아래로 나오지 않으면 통과는 하겠다만...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좋은 경험이었다고 믿는다. 나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알아보는 것은, 때로는 가혹하지만 앞으로계속나아가는 동력이 되곤한다. 고등학생 때 따놓은 A1이 나를 프랑스로 이끌었듯, B2를 손에 넣게 된다면 이것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해진다. Bonne continuation!
시험 끝나고 한강에서 치킨+와인
※ 결과 업데이트: 델프는 합격했다. 점수는 읽기>듣기>쓰기>>> 말하기 순이었다. 말하기를 망쳤다는 것을 예상했음에도 숫자로 그 결과를 보고나서 상당히 낙담했다. 챗GPT한테 나의 말하기 점수를 알려주면서 이게 어느 정도 수준이냐고 물어봤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요약하자면 형편없다는 것. 나를 비난하는거냐고 따졌더니 아니라며, 시험은 그저 현재 자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라며 앞으로 어학 능력을 꾸준히 연마하는 기회로 삼으라는답변을 내놨다. 그래, 이 점수가 프랑스어 실력을 낙인찍는 게 아니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지표라고 생각하자.어학은 시험장 밖에서 진정으로 성장한다는 자전적 경험을 곱씹어보며 이제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프랑스어를 만나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