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행정 처리 속도는 아주 느리다. 서류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까먹을만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끝내 손에는 무언가를 쥐어준다. 프랑스에서 세금을 고국에 내는 외국인 노동자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거의 없는데, 자전거 보조금이 그 혜택 중 하나다. 조건은 파리를 품고 있는 일드프랑스(한국으로 치면 경기도인데 서울에 살아도 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셈) 안에 거주하는 것이다. 체류증과 거주증명서(전기세, 인터넷 고지서, 은행 증명서 등)가 있어야 하고, 전기자전거 혹은 접이식 자전거를 구매해 정부에 등록을 해야 한다.
지원 금액은 자전거 가격의 50%, 최대 500유로를 받을 수 있다. 사실 이 지원이 없었다면 나는 이 자전거를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다.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대중교통 이용행태 전환에 이 보조금 제도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본다. 허나 이 자전거를 사는 것부터 지원금 지급 결정이 나기까지 너무나 프랑스스러운 우여곡절이 많아 기록으로 남겨보고자 한다.
내가 산 자전거는 사악한 가격의 영국산 브롬톤이다. 부임할 때부터 살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에 자전거 보조금 제도를 알게 됐고 그럼에도 장고를 이어갔다. 그러다 너무나 좋아하는 색으로 신상품이 출시됐다. (고작) 15유로 할인을 받으려고 브롬톤공홈에서 직접 구매하지 않고 프랑스 자전거 매장을 이용했다. 그러다가 영영 자전거를 못 받을 뻔했다.
나는 파스텔이라는 자전거 전문 매장에서 구매했다. 모델(C라인 익스플로러)과 색상(마차 그린)을 고르고 나면 핸들 위치를 정해야 한다. 로우(L), 미디엄(M), 하이(H)가 있는데 로우를 하면 고개를 계속 숙이고 다녀야 하니 패스. 사실상 미디엄이나 하이 중에 택하는 건데 브롬톤을 판매하는 매장에 가서 타보니 하이가 조금 더 편하다는 느낌이었다. 같이 간 친구는 키가 25cm 더 컸는데 미디엄이 더 맞는다고 했다. 친구는 브롬톤 공홈(영국)에서 바로 주문을 했고 나는 자전거 매장(프랑스) 홈페이지에서 주문을 했다.
브롬톤을 영국 공홈에서 구매하는 것과 프랑스 자전거 매장에서 구매하는 차이를 정리해 보겠다. 우선 공홈에서 주문하면 브롬톤을 취급하는 몇 안 되는 매장 중 한 곳에서 픽업할 수 있다. 공홈에서 주문과 동시에 제작이 들어가는지 아니면 미리 만들어 놓은 건지 알 수 없으나 여기서 구매하면 비교적 빠르게 자전거를 받는 듯하다. 자전거 매장에서 구매할 때는 수요가 많다보니, 특히 특이한 색깔의 겅우에는 더, 업자들끼리 경쟁하는 구조였다. A 매장이 사기로 했는데 B 매장이 물건을 가져갔다는 식의 체계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대신 공홈에서 주문할 때는 레어랙을 추가하는 옵션이 없다는 게 단점이다. 레어랙이 있으면 (페달을 밟을 때 한정이지만) 작은 짐을 싣는 것은 물론, 자전거를 펼치지 않은 상태에서도 끌고 다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레어랙이 없으면 자전거를 접은 채로 끌고 가는 게 불가능해 낑낑거리면서 들고 다녀야 한다. 자전거를 픽업하는 매장에서 유료로 랙을 설치하는 옵션이 있다. 이때 랙값과 설치값을 따로 요구한다. 내가 이용한 곳에서 랙값은 140유로, 설치비가 50유로로 총 190유로가 들었다. 매장에서 구매할 경우 랙이 없는 자전거는 1천799유로, 랙이 있는 자전거는 1898유로다. 랙+설치 값으로 99유로만 받는 셈. 자전거 매장 인터넷으로 사면 푼돈이나마 할인해 주는 게 있어서 최종 구매가격은 1천833유로였다. 여기에 보조금까지 합산하면 최종 가격은 1천333유로.
아, 매장에서 구입할 때의 또 다른 장점 중 하나는 자전거 보조금 지원에 필요한 서류들을 알아서 준비해 준다는 것이다. 그대로 일드프랑스 홈페이지에 업로드하면 된다. 공홈에서 구매하면 이런저런 서류를 직접 구해야 한다는 게 조금 번거롭기는 하다. 친구를 도와주면서 두 가지를 다 해봤는데, 사실 그렇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직접 서류들을 준비했을 때와 남이 해줬을 때를 비교해 보면 당연히 후자가 더 편하긴 하다.
범블비와 마차그린
만약 프랑스의 답답한 일처리 방식이 안겨주는 스트레스를 건너뛰고 하루빨리 자전거를 받고 싶다면 공홈을 사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일주일 만에 자전거를 받은 친구와 달리 나는 4월 16일 자전거 매장 홈페이지에서 구입하고 나서 두 달이나 기다려야 했다. 당연히 그 사이에 독촉을 여러 차례 해야 했다. 중간에 내가 원래 주문한 제품은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며 대신 의자 높이가 높은 것은 있다, 이거라도 살래?라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내가 2천 유로 가까이를 내고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고 난리를 쳤더니 며칠 뒤 좋은 소식이 있다며 내가 주문한 자전거를 드디어 구했다는 메일이 왔다.
이 절차를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에 자전거를 받은 다음날인 마요르카로 가는 공항에서 서류를 제출했다. 비행기에 타기 직전까지 노트북을 켜고 자판을 두드렸다. 약 3주가 지나고 나서 보완을 요구하는 메일이 도착했다. 이것저것 시키는 대로 했는데 끝까지 문제가 됐던 것은 지원금을 받을 은행의 RIB였다. 나는 영국 인터넷은행 레볼루트가 제공하는 프랑스 계좌번호를 냈는데, 이곳은 정통 은행이 아니라 RIB가 없었다. 나랏돈을 받으려면 프랑스 정통 은행 계좌가 필요하다. 다행히 프랑스 하나은행 계좌는 RIB가 있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다만, 귀국한 지 두 달이 넘어간 시점에 아직도 돈을 받지 못해 한 달에 2.5유로씩 계좌유지비를 내고 있는 것은 함정.(귀국하고 나니이제 레볼루트에 RIB이 생겼다!)
여기까지는 그래, 나의 불찰 내지는 무지로 인정. 하지만 접이식 자전거로 보조금을 신청했는데 뜬금없이 전기 자전거 지원에 필요한 서류를 더 내라고 하길래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었다. 여러 차례 메일을 주고받고 나서야 담당자가 잘못 보고 실수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역시나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다. 이런 소란 끝에 서류 접수를 마치고 무려 다섯 달 뒤에야 보조금 지급 결정이 내려졌다. 이 돈이 실제 내 계좌에 꽂히기까지는 평균 넉 달이 걸린다는 설명과 함께. 이 기간은 사정에 따라 더 미뤄질 수 있다는 부연 설명도 잊지 않았다.
타임라인을 정리해 보자면 처음 내가 자전거 결제를 한 것이 2023년 4월 13일. 그 자전거를 손에 넣은 것이 6월 23일. 보조금 지원을 신청한 것이 6월 24일. 서류 보완까지 마친 게 7월 13일. 보조금 지원 결정이 난 게 11월 25일. 자전거 매장에서 2개월, 일드프랑스 주에서 5개월을 보냈다. 또 앞으로 돈을 4개월 뒤에 받는다고 가정하면 무려 11개월이 걸리는 지난한 여정이다. 그럼에도 일단 약속한 돈은 준다는 데 만족하는 나를 보면 이미 프랑스 행정에 익숙해졌나 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