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를 읽고나서 끄적끄적
회사 근처에서 약속 있는데 그때까지 시간이 남으면 교보문고에 들르곤 한다. 얼마 전 교보문고를 방문했을 때 스튜어트 다이아몬드의 책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 계발서를 싫어하지만 저자의 이력과, 그가 교편을 잡은 대학에서 대단히 인기를 끄는 수업이라는 소개 때문이었으리라. 처음과 끝은 별로였어도, 중반부에 나오는 내용이 나의 현재 고민에 어느 정도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여운을 남겼다. 책을 읽는 동안 내가 그간 열심히 풀어댔던 '썰'들이 크게 보면 협상이었구나 생각이 들어 정리해 봤다.
# 프랑스에서 한국산 삼성전자 스마트폰 수리받기
파리에서 지내는 동안 아빠가 사다준 삼성전자의 Z플립 3이 고장 났다. 화면을 편 채로 통화를 하거나 녹음을 하거나, 동영상을 촬영하면 아주 심한 잡음이 발생하는 증상이었다. 과거 액정의 접히는 부분에 줄이 가서 파리 오페라에 있는 AS 센터에 갔더니, 한국에서 산 제품이라 수리할 수 없다는 황당한 답변을 들었다. 그럼 내가 이걸 고치러 한국까지 가야 하냐고 물었더니 환하게 웃으며 아시아에 있는 어느 나라든 괜찮단다. ^^
다행히 머지않은 시점에 한국에 잠깐 다녀오는 일정이 있었고, 무려 33만 원을 주고 액정을 교체하고 돌아왔는데 또 고장이 난 거다. 화가 나서 삼성전자서비스 본사로 메일을 보냈다. 액정을 바꾼 지 4개월밖에 안 된 상황에서 다른 문제가 발현해 기기 자체 결함은 아닌지 의심이 된다고 밝힌 뒤,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의 제품을 구매한 대륙별로 구별해서 AS를 제공하는 게 모회사인 삼성전자의 지침인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삼성전자서비스로부터 삼성전자 프랑스법인에 이 민원을 넘겼다는 답장을 받고 얼마 뒤 '알 수 없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프랑스에서 '알 수 없는 번호'는 처음 보는지라 무시했는데 다시 핸드폰이 울려 무슨 일인가 싶어 받아보니 삼성전자 프랑스법인 직원이었다. 그 직원은 나에게 한국에서 사 온 스마트폰을 프랑스에서 수리받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나름의 해결책도 제시했다.
우선 다른 대륙에서 구매한 제품을 수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도난 등을 방지하기 위해 대륙별로 사용하는 휴대전화 부품이 다른데, 다른 대륙에서 생산한 스마트폰의 부품을 건드리면 자동으로 락이 걸린다는 것. 만약 프랑스 AS센터에서 한국산 스마트폰을 열어서 부품을 교체하려고 하면 자동잠금장치가 있다나 뭐라나. 어쨌든 그럴한 설명이어서 납득이 갔다.
이와 함께 파리 외곽(한국으로 치면 강남에서 일산까지 거리 정도?)에 한국인 고객을 위한 AS를 제공하는 곳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면 수리를 받을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불과 몇 달 전에 수리를 받은 기록이 확인된만큼 수리는 무상으로 진행해 주겠다는 덤까지 받았다. 수리 견적서를 받아보니 300유로가 훌쩍 넘었고 원화로 치면 50만 원에 달했다. 내 입장에서는 핸드폰도 고치고, 돈도 굳고 일석이조였다.
# 공항에서 비행기 놓치고 새로운 티켓 무료로 받기
대학생 때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후 처음으로, 오랜만에 해외여행을 혼자 떠났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3년쯤 됐을 무렵이었다.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묶어서 다녀오는 일정이었는데, 친한 대학 동기가 여자친구와 함께 다녀온 루트를 그대로 답습한 덕분에 아주 편하게 여행을 했더랬지. 터키항공을 이용했고 이스탄불에서 경유를 했다.
문제는 돌아오는 길에 발생했다. 요새는 모바일 티켓이 보편화됐지만, 그때만 해도 온라인으로 체크인을 했을지언정 지류 티켓을 받아야 했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몰라도, 당시 터키항공의 비행기 티켓에는 출발 시간이 보딩시간보다 더 크게 적혀있었고 이게 문제가 됐다.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는 나는 보딩의 개념을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여행 일지를 수기로 적고 있었는데, 공항에서 시간이 많이 남아서 맥도날드에 앉아 일기를 썼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그때만 해도 나는 주변의 소음으로부터 차단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볼륨을 항상 최대치로 키워놓곤 했다. 일기가 며칠 밀렸던지라, 나는 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이 증발하기 전에 꾹꾹 담아내느라 정신이 팔려있었다.
하필이면, 맥도날드는 비행기를 타는 입구에서 다른 층에 있었다. 또 그때는 무슨 주인공 병이라도 걸린 건지, 먼저 가서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걸 싫어했다. 해외여행 초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비행기도 시간에 딱 맞춰서 타러 가기를 선호했다. 이게 바로 멍청하게도 비행기표에 큼지막하게 적혀있는 출발 시간에 맞춰서 자리에서 일어난 이유다.
탑승 출구에 가까워질수록 낌새가 이상했다. 줄이 없는 거라. 헉, 뭐지. 창밖에 비행기는 있는데, 문이 꽉 닫혀있다. 보딩이 끝난 거다. 패닉이 왔다. 눈물이 났다. 창구 데스크에 앉아있는 직원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는데 남자 직원 앞으로 다가가 표를 보여주며 보딩시간 보다 출발시간 숫자가 커서 착각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냐, 나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하며 울먹였다.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타자기를 두드려본 직원은 가장 빨리 출발하는 다른 항공사 스케줄을 알려줬다. 내가 뭘 알고 그런 건 아니고, 본능적으로 학생이라서 돈이 없다고 했다. 그들 눈에 아시아인은 어려 보이니까 통했나 보다. 타자기를 한 번 더 뚱땅뚱땅 거리더니 내일 같은 시간에 인천으로 가는 터키항공 비행기에 자리가 있으니 이걸 주겠다고 한다. 엄격히 따지면 내 불찰이라 돈을 내야했을텐데 말이다.
친절했던 그 직원은 내가 20시간 상당을 공항에서 보내려면 힘들 테니 일단 패스포트 컨트롤 밖으로 나가 터키항공 부스를 찾아가라고 했다. 거기서 호텔을 연결해 달라고 하면 도움을 줄 것이라고 안내해 줬다. 아무런 비용도 청구하지 않은 채 국제전화도 할 수 있도록 직원 전화기를 내어주기까지 했더. 덕분에 두바이에 있던 당시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대성통곡을 할 수 있었다.
길게 쓸 건 아니고 골프장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무료로 피자를 받은 이야기도 있다. 원주에 있는 지인의 집에 놀러 갔다가 골프장에 있는 이탈리안 식당에 갔는데, 디저트에서 투명한 유리 혹은 플라스틱 조각이 나왔다. 입 안에 넣기는 했지만, 다행히 다치지 않았다. 웨이터를 불러서 투명한 조각을 보여주며, 디저트에서 이게 나왔는데 이게 뭔지 궁금하니 알려달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화를 내지 않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는데, 그 이유는 고급 식당에 걸맞은 대응 매뉴얼이 있을 거란 믿음 때문이었을 테다.
알고 보니 마지막 단계에서 슈가 파우더를 뿌리는데, 그 가루를 담는 통의 모서리가 깨져서 파편이 튄 거란다. 그러면서 문제의 그 디저트는 모두 폐기했다고 알려왔다. 새로운 디저트를 주겠다고 했으나, 배가 불러 거절했다. 그러고 나서 돈을 깎아달라거나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매니저가 정말 죄송하다며 피자를 하나 포장해 주겠다고 했다. 이 피자를 받아야 매니저도 마음이 편하겠다 싶어 알겠다고 하고, 밥을 사준 친구 손에 쥐어줬다. 화가 날 수 있는 상황에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책에 나온 협상의 기술 중 하나였다.
저자는 이 사례들을 협상의 한 형태라고 볼 테지만 내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이뤄진 행위다 보니 여전히 이걸 협상이라고 부르는 게 맞나? 싶긴 하다. 정당한 문제제기 내지는 합당한 요구가 상대의 선의 내지는 판단력과 맞물린 결과로 여겨왔던 것이 협상이라는 프레임으로 이해된다는 게 신기하다. 내 몫을 요구하는 게 이기적이라거나, 과도한 게 아니라고 하니 마음 한 편으로 위로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