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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려입고 다니는 이유

What you wear affects you!

by 글쓰기C쁠

고등학교 1학년 때 좋아하던 두 살 터울의 학교 선배가 있었다. 고3이었던 그 오빠를 마주치는 건 주로 등교할 때.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아서 스쿨버스를 함께 타고 다녔다. 늦잠을 자는 건지 스쿨버스를 타지 않을 때도 많았다. 목소리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그를 좋아한 이유는 오롯이 외모였을 테다. 슬림한 몸, 깔끔한 교복 그리고 아무 무늬 없는 검은색 레스포삭 백팩이 내 눈길을 끌었다.


하루는 스쿨버스 기사님이 학생들에게 이름과 학번과 같은 정보를 적어내라 했는데, 그의 뒷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알게 됐다. 이름 외에 아는 정보는 없었다. 무슨 생각에선지 졸업식날 건네볼까 하고 롤리팝을 샀지만, 숙맥이었던 나는 선물을 주기는커녕 통성명조차 해보지 못한 채 다시는 그를 못 보게 됐다. 마침 고3 담임이 그가 고3일 때 담임이었어서 재수인지, 삼수인지 했다는 소식을 들은 게 전부였다.


부모님이 전세를 주고 잠시 떠났던 그 아파트에 다시 돌아온 건 직장인이 되고 나서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7~8년 정도 됐을 테니, 그 오빠의 얼굴을 알게 된 지 10년 즈음 됐겠구나. 저녁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그를 우연히 만났다.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걸어가려면,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야 하는데, 첫 번째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한 남자가 술에 취했는지 약간 비틀거리는 게 위험해 보였기에, 혹시 차가 지나가면 잡아줘야겠다 생각하면서 얼굴로 시선을 옮겼데, 헥! 17살의 내가 좋아했던 그 오빠였다. 신기했다. 그를 마주친 것 자체도 신기했지만, 세월의 바람을 정통으로 맞은 듯 내가 좋아했던 날렵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 또한 신기했다. 세월 앞에 장사 없구나, 하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졌다.


두 번째 횡단보도에서 다시 한 번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릴 때 그 오빠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푸핫, 너무 재밌었다. 손가락으로 눈앞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여기요"라고 했더니, "어! 저도 여기 사는데! 반가워요. 같이 가면 되겠다"면서 배시시 웃는다. 신호가 바뀌었고, 나란히 걸어가며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머릿속으로 여러 시나리오를 그려봤다. 결국 정공법이었다.


"저, 사실 그쪽이 누군지 알아요" 말했더니 눈이 똥그래진다.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스쿨버스를 같이 탔다 등등 그와 나를 잇는 느슨한 연결고리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는 "같이 타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다. "후배님에게 뭐라도 사줘야겠다"던 그는 나를 편의점으로 데려가 음료수를 한아름 안겨준 뒤 연락처를 건넸다. 그 후로 3번인가 만났지만, 우린 대화 코드가 맞지 않았다.


한 번은 노숙자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는 노숙자가 한심하다, 이해가 안 간다고 주장했고 나는 살다 보면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지 않겠냐며 팽팽히 맞섰다. 이게 우리가 대면한 채 나눈 마직막 대화로 기억한다. 이 대화로 인연이 끊긴 것은 아닐테다. 대화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서로 확인했겠지.


어쨌거나 이 신기한 만남 이후로 나에게는 출근할 때 항상 차려입는 습관이 생겼다. 약속이 없는 날에도 마치 누군가를 만나는 것처럼 입는달까. 내가 길에서 우연히 누굴 만날지 모르니까. 심지어 그게 한 때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고, 그 사람이 내가 마음에 들어서 번호를 물어볼지도 모르니까. 귀납적 추론이다만, 오늘 내가 어떻게 입었는지가 어떤 행운을 가져다줄지 모를 일이다.


그날의 착장을 아직도 기억한다. 남색 원피스에 하늘색 숏쟈켓, 그리고 플랫슈즈. 만일 그날 내가 요상한 차림이었다면 10년 전에 얼굴만 보고 좋아했어도 말 한마디 섞어보지 못한 사람과 밥을 먹어볼 수 있었을까? 만나볼 기회가 있었기에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결론도 내릴 수 있었겠지. 이런 사고의 과정을 거치고나니 평소에 옷을 어떻게 입느냐를 굉장히 중시하게 됐다.


며칠 전 퇴근 후 카페에서 후줄근한 상태로 시간을 죽이던 중 지인을 마주쳤다. 하루 종일 비가 오니 편한 차림을 택했고, 운동까지한 탓에 머리가 부스스 상태였다. 오랜만에 본 사람인데, 반가운 마음보다 당황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은 차림새가 마음에 안들었기 때문일테지. 착장만큼은 느슨해지지 않겠다던 원칙이 무너졌나 싶어, 20년 전에 좋아했던 그 오빠의 스토리를 이렇게 소환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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