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라는 가면을 쓴 폭력

by 글쓰기C쁠

일과 가정의 분리를 대단히 중시하는 나로서는, 회사에 존재하는 사적 조직에 발을 들이지 않도록 노력한다. (※참고로 나는 1인 가정이라, 내가 없으면 가정이 무너진다) 선배건, 동기건, 후배건 개인적으로 친분을 유지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동호회랄지, 스터디랄지 단체 모임 합류는 극도로 꺼린다. 물론 사회생활을 갓 시작했을 무렵 이 자리, 저 자리에 불려 다니며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리다 점심 메뉴를 정할 때면 해장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좋다고 큰소리치는 게 '인싸력'의 발현이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그 짓도 10년 가까이하다 보니 지쳤나 보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뒤로 저녁 약속을 잡는 횟수가 급격하게 줄었다. 일단 내가 먼저 술자리를 잡는 경우가 손에 꼽는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서 그 사람과 정말 술 한 잔 기울이며 도란도란 대화하고 싶을 때만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그게 아니라면,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대화조차 못하는 사이라면, 구태여 만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철학이 요즘의 나를 관통하고 있다. 물론 지금은 누군가와 저녁에 술 약속을 잡는 게 더는 일이 아니게 된 영향도 부인할 수 없겠지만.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만, 이런 나의 성향에도 최근 회사의 사적 모임의 뒤풀이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 모임의 행정 처리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들어준 게 계기였다. 차를 가져왔던 나는 식사 자리에서 일부러 테이블 위에 차키를 올려놓았다. 차를 가져왔으니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신호였는데, 이걸 못 보고 한 잔 해야지~ 하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때마다 차키를 들어 보이며 거절했는데도, 대리를 불러줄 테니 술을 마시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에겐 이 제안이 호의로 포장한 강권로 들렸다.


이날 벌어진 일을 나는 '대리 불러줄게 사건'으로 부른다. 운전을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대리운전 서비스를 이용해 본 적이 없는 나는 술을 마셔야 하는 날이면, 차를 가져가지 않았다. 회사에 차를 가져왔는데, 술을 마실 상황이 생기면 차를 두고 갔다. 내가 술자리에 차를 가져갔다는 것은 그날은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뜻이다. 더욱이 나는 술에 취했을 때 생판 모르는 남, 특히 남성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뒷좌석에서 잠들고 싶지 않다. Who knows what's going to happen? (같은 이유로 나는 택시 타는 것도 꺼린다)


대리를 불러주겠다는 소리를 이날만 두 번 들었는데, 거절하니 한 사람은 바로 수용했다. 다른 사람이 문제였다. 내가 차키를 보여주자 그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리 불러줄게! 마셔!"라고 외쳤다. 그래서 제가 대리를 불러본 적이 없어서 조금 그렇다고 했더니 답변이 가관이었다. "너 술 안 마시면 나중에 높은 자리 못 가~!!" 찰나에 어떻게 반격해야 할까 많은 생각을 했다. '아 너님은 술 많이 마셔서 그 자리 가신거구나!'하고 물개박수를 치려다가, 내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저는 그 자리를 원치 않아요"(웃음) 하고 말았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빙썅' 모드를 켜고 '어머! 요샌 농담으로라도 이런 말 하시면 안 되는데!' 했을 텐데, 나는 침묵을 택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이 사람이 개선되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잔소리도 애정이 있어야 하는 거다. 선생님, 그냥 이대로 쭉 가시면 절벽 길이세요! 그가 다른 더 중요한 자리에서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고, 나락으로 떨어지길 바랐나 보다. 이 사건은 현재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 그간 어떻게 굴러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줬고, 화도 내지 않는 나를 보고 이젠 마음이 떠났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기분 나쁜 일을 당할 때면, 혹시 내가 반대로 가해자였던 적은 없을까? 반추하곤 한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는 대체로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자리에선가 나 또한 가해자였을 수 있으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걸까? 사실 용서도 상처를 받았을 때나 하는 행위이다. 나는 상처받지 않았으니 그를 용서하고 자시고 할 껀덕지도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면서 사적 제재를 하고 있다는 건 사실 상처를 받았다는 방증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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