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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대형 산불: 순례길 대탈출기

ep14. 타오를 듯 붉은 하늘, 그건 노을이 아니라 불이었네

by 양탕국


해외여행을 다니면 한국의 소식에 아무래도 둔감해진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뭐든 되는 세상이라 한국 뉴스는 물론 가십까지도 얼마든지 파악할 수 있지만 해외여행의 이유 중 하나가 대체로 일상 탈출이기에 한국 소식은 의도적으로라도 회피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내가 들르는 지역의 소식은 어떤가? 그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람들을 만나며 ‘경험’하니까 그 동네의 소식을 잘 알게 될까? 그렇지 않다.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어느 정도 스마트폰의 영향을 받는 듯하다. 과거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엔 해외여행을 하며 그 나라의 TV프로그램을 꽤 많이 시청했었다. 그러다 보면 뉴스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예능도 보게 되는데,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대충 어떤 내용인지 감은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엔 OTT와 유튜브를 어디서든 시청할 수 있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TV조차 틀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아스토르가(Astorga) 들어서는 길


처음 ‘그 소식’을 들은 건 산티아고 도착을 260km 정도 남겨둔 지점인 아스토르가(Astorga)에서였다. 그날 나는 새로 문을 열었다는 알베르게에 묵게 되었다. 오픈 몇 달 만에 호평을 받으며 빠르게 입소문을 탄 알베르게는 내가 도착했을 때 모든 방이 찬 상태였다. 알베르게 입구에 커다랗게 completo라는 글씨가 적힌 종이가 붙은 것을 보고 안도와 기대를 동시에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당 알베르게에선 매일 저녁 순례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해 순례자들끼리 교류하도록 했는데, 거의 필수 참여라는 이 자리에 대한 후기가 매우 좋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순례자 미팅을 하지 않아.


그러나 알베르게에선 오늘은 예외적으로 순례자들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이 숙소에 묵는 순례자는 나를 포함해 단 두 명이라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호스트는 자신이 할 말을 스페인어에서 영어로 바꾸는 뇌활동을 하는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곧 서투른 영어로 답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20km 거리의 어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오늘 이 숙소에 묵는데, 저녁엔 안전 문제 때문에 경찰도 온다고 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이 알베르게에 오게 된 이유는 불 때문이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아주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단어가 나왔다. 그는 이 불을 ‘firework‘라고 했다. 그 얘길 듣고 조금 언짢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아니, 무슨 알베르게가 ’불꽃놀이‘ 보러 온 사람을 재워주냔 말이다.

그래도 불꽃놀이를 한다는 건 이 마을에서 축제라도 한다는 건가 싶어 저녁을 먹을 때 구글에 검색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도통 이렇다 할 정보가 나오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동네가 너무 차분했다. 만약 불꽃을 쏠 정도의 이벤트가 있다면 스페인 사람들은 이미 신이 나서 돌아다녔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좀 더 정보를 찾기 위해 한국인 순례자들이 모여있는 오픈카톡방에 입장하게 됐고, 그제야 ‘그 소식’을 알 수 있었다.

그랬다. 알베르게 호스트가 말한 firework는 알고 보니 그냥 fire였다. 오픈카톡방에 모인 순례자들은 스페인 산불에 관한 뉴스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한 기사에 따르면 ’스페인 북부 카스티야 이 레온 지역에서 잇따른 산불이 발생했다‘고 하였다.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on), 바로 내가 있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선 스페인 산불 뉴스가 거의 보도되지 않았고, 카톡방의 순례자들도 이런 내용을 알고 있으라는 주지만 하는 정도였다. 실제로 그다음 날부터 사흘 동안의 순례길에서 산불의 영향을 느끼지도 못했고, 알베르게에서 만난 순례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늘 ’괜찮을 거야’로 대화가 마무리되곤 했기에 그리 심각하지 않게 생각한 게 사실이다.


이런 위험불감증이 와장창 박살 난 건 산불 소식을 들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카카벨로스(Cacabelos)에서 베가 데 발카르세(Vega de Valcarce)로 향하는 길. 해가 뜨고 날이 완전히 밝아졌는데 하늘이 뿌옜다. 안개가 많이 꼈다고 생각하며 계속 걸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나와 비슷한 속도로 걷는 순례자가 마스크를 꺼내 쓰는 것 아닌가. 그러더니 30여분 후엔 노란색 화살표만을 보고 산길 쪽으로 진입하려는 내게 “거긴 산불 구역이야”라면서 다른 길을 택하라고 조언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어제 자신이 묵는 알베르게에서 만난 스페인 순례자들이 저녁 내내 뉴스와 위성지도 등을 확인한 후 알려준 정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도 뒤에 오는 순례자들에게 가급적 산길로 들어서지 말 것을 권했다.

아침에 본 회색 하늘(위), 오후 2시경의 하늘(아래)


이 날의 걷기는 심적으로 매우 힘들었던 기억이다. 원래 나의 루틴대로라면 출발지에서 8km가량 걸으면 나오는 <스페인하숙>의 촬영지 비아프랑카 델 비에르조(Villafranca del Bierzo)에서 아침을 먹으며 쉬어가는 여유를 부려야 했다. 그러나 주말이라 이른 시간 문을 연 카페도 찾기 어려웠던 데다 굳이 시간을 들여 영업하는 카페를 찾고 싶지도 않았다. 어서 걸어서 오늘의 마을에 도착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걷는 길 위엔 산불의 흔적으로 보이는 검은 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날 걷는 길의 절반 이상은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 옆길이었다. ‘점프’를 하고 싶어도 어디라도 들어가서 차를 불러달라고 해야 할 텐데, 히치하이킹이 아니면 차를 타기도 요원해 보였다. 그나마 작은 위안은 걷다 보면 종종 만나게 되는 순례자들이었다. 그들과 이렇다 할 대화도 하지 않았지만, 이 길을 걷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끝까지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그날의 마을, 베가 데 발카르세는 매우 조용했다. 주말인 데다 전날 있었다는 마을 축제 여파로 마을의 레스토랑이 모두 영업을 하지 않았다. 친절한 호스트가 일일이 여러 군데 전화를 걸어 알아봐 준 덕분에 파니니 메이커에 찍어 눌러주는 햄을 넣은 식빵으로 겨우 허기만 달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의 피로를 해소할 마음으로 액상과당을 과음하다가 나의 오렌지색 환타 잔에 살포시 내려앉은 잿덩이를 보고야 말았다. 고개를 올려 쳐다본 하늘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보다 더 채도 높은 붉은색이 되어 있었다. 나는 잔 속의 잿덩이와 시뻘건 하늘을 번갈아보며 구글 지도에서 산불 상황을 확인했다. 내일의 도착지인 오 세브레이로(O Cebreiro)는 오르막이 매우 심한 산길이 계속되는 구간이었고, 무엇보다도 심각한 화재 지역과 차로 10분 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 정확히 그때였다. 내가 가급적이면 다시는 하지 않으려 했던 ‘점프’를 하기로 결심한 것은.

베가 데 발카르세의 하늘(좌), 구글맵으로 확인한 오 세브레이로(우)


그렇게 나는 오 세브레이로까지는 택시를, 사리아(Sarria)까지는 버스를 이용해 58km를 이동하는 두 번째 점프를 감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순례길 일부 구간이 폐쇄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례자 단톡방엔 시커먼 연기로 뒤덮인 도시의 사진이 연이어 올라왔다. 모두 내가 불과 며칠 전 지나온 곳이었다. 점프를 하기로 결심하기 직전까지 나는 폴폴 날리는 잿가루를 보면서도 24km가량 되는 길을 그냥 걸어왔는데, 그게 상당히 무모한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산티아고 도착까지 고작 170km 남짓. 그날 밤,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더 이상 걷고 싶지 않다는 것, 그뿐이었다.


아름답다고 생각한 몰리나세카(Molinaseca)의 저녁 하늘. 돌이켜보니 어쩌면 산불 때문에 이토록 붉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지나온 며칠 뒤 폐쇄된 구간의 산길에 위치한 기부식 쉼터. 순례자들이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며칠만 늦었어도 나 또한 이곳을 들르지 못했을 거다.
사리아로 점프한 날의 저녁 식사. 파란 하늘 아래에서 마신 맥주는 어찌나 맛있던지.


덧) 순례길을 걷는 분들께 꼭 하고 싶은 말. 첫째도 안전, 마지막까지도 안전임을 잊지 마시길. 순례길을 ‘무사히’ 마친다는 건 완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의 안전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지금 저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좀 더 빨리 점프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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