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BOUT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탕국 Apr 09. 2018

죽음


어릴 적부터 나는 죽음이 두려웠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죽음을 무서워했던 최초의 기억은 여섯 살 경. 잠을 자다 갑자기 뛰쳐 나가 엄마에게 "죽기 싫어" 라고 말하며 목놓아 울었던 일이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죽고 싶지 않게 만들었던 걸까. 동네 아이들이 노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슬기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일까. 치매에 걸려 매일 같이 동네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니던 이웃 할아버지가 계단을 밟다 발을 헛디뎌 쓰러져 누워있는 것을 본 며칠 후 돌아가셨다는 얘길 들은 다음부터일까. 고작 여섯 살 나이에 나는 생(生)이 사라짐을 알게 되고, 그것의 허전함을 깨달아버렸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나는 늘 죽음이 두려웠고,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나이가 들며 점점 나의 관심은 그로부터 멀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죽음이 무섭다. 언젠가는 초연해질 수 있을까. 이것은 내 생의 과제다.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갱지 한 장씩을 나누어주었다. '백지 고민'이라 불리는 그 종이엔 자신이 걱정하는 것에 대해 무엇이든 쓸 수 있었다. (그 종이의 이름이 왜 '백지 고민'인 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나는 여섯 살 이후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내용을 그 종이에 적었고, 곧 학교의 상담 선생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 나의 두려움에 대해 무수히 분석하고 고민한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그것은 원론적인 것이며, 다른 사람이 해결해줄 수 없음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했던 것 뿐. 하지만 선생님이 생각하기엔 달랐나 보다. 혹시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오랜 시간 나에게 이런 저런 이야길 해주신 것에 대해 매우 감사드린다. "삶은 한 번 뿐이니, 열심히 노력해 잘 살아야 후회가 없지 않겠느냐"는 교과서적인 결론이었지만, 당시엔 그 말이 내 두려움을 지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땐 잠에 빠진 상태가 죽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잠드는 것도 참던 시기였는데, 그 말을 들은 후엔 내일을 기대하며 죽음보단 삶에 포커스를 맞출 수 있었다.




첫 조문의 경험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같은 반 아이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 반 아이들은 우르르 떼를 지어 함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각자의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모양새만 보면 소풍을 가는 것과 같았던, 즐거운 소란스러움이 뒤섞인 광경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죽음을 안치한 공간은 어떤 의미로든 압도적이었다. 단숨에 우리를 숨죽이게 만들었고, 그곳을 나온 후 나를 포함해 많은 아이들이 엉엉 울었다. 며칠 후, 장례식에서의 눈물에 대해 생각했다. 종교가 있는 자에게 죽음은 새로운 생이기도 하고, 천국에의 도달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 해도 아프고 괴로운 병에서 벗어나는 길일 수도 있고, 아프고 괴로운 일을 맞을 가능성조차 없는 영면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들을 보내며 슬퍼한다. 더 이상 그가 이 세상에 없어서, 정확히는 내가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만지고 싶을 때,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어서. 그건 어쩌면 나의 슬픔을 위로하는 눈물일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도 이기적인 눈물일 것이다.




두 번째 장례식의 경험은 스물 일곱 살 때였다. 병으로 고생하던 큰아빠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가까운 가족의 장례인지라, 3일 간 식장을 지켰다. 그리고 장례의 과정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우리는 큰아빠의 딱딱해진 몸을 만지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큰아빠는 생전의 욕심이 너무나 덧없어 보일 만큼 작고 마른 모습이었다. 장례 절차를 진행하는 상조회사 사람은 '사람은 숨이 끊어져도 청각이 한동안 살아있다'며, 큰아빠의 가는 길이 편해질 수 있는 말을 해주라 했다. 정말 이 모든 걸 듣고 있는 걸까. 하지만 대답할 수 없는 입을 가졌다는 건 답답한 기분이겠지. 관은 딱 사람 크기만 했다. 부자였든 가난한 자였든 모두에게 공평하게 부여되는 나만한 공간. 하지만 큰아빠는 생전의 아팠던 모습으로 묻히긴 싫다 했다. 더 작아지고 더 가벼워지길 원했다.

이 모든 과정을 3일 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처음엔 너무 두려웠지만, 3일이 지난 후 오히려 초연해짐을 느꼈다. 유일하게 눈물이 난 순간은 영구차에서 내린 우리 아빠를 본 때였다. 아빠가 자신과 꼭 닮은 큰아빠의 영정을 들고 서 있던 모습은 지금도 회상만으로 코끝이 시려온다. 장지로 이동하다 들른 식당에서 조문객들을 대접하며 평소보다 더 큰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아빠, 자꾸 농담 같은 말을 해서 엄마에게 쓴 소리를 듣던 아빠, 가끔 술에 취해선 큰아빠를 찾아가 형이 오래 살았음 좋겠다며 그 앞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는 아빠, 독서엔 취미가 없었지만 큰아빠가 서울 유학길에 쥐어준 안데르센 동화책은 몇 번이고 읽었다는 아빠. 우리 아빠가 슬프고 외로울까봐 나는 눈물이 났다. 나 또한 큰아빠의 죽음 앞에서 우리 아빠를 생각하는 이기적인 눈물을 흘렸다.




죽음을 멀리하고 싶어서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사유했다. 책을 읽었고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썼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그 세계를 제대로 일러줄 수 있는 이는 없다.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청각을 아직 갖고 있더라도 말할 수 있는 입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히 어릴 때에 비하면 나는 죽음보다 삶에 포커스를 맞추고 살아가고 있다. 두려움을 억지로 떨쳐내려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니, 나는 그것을 '오늘을 살자'는 메시지로 곧잘 둔갑시켜 버리곤 한다.


나에게 그 메시지를 준 또 다른 메시지들을 공유한다.

1.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죽음에의 선구' 개념: 우리는 모두 죽음으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며 살아야 한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고 나아가야 한다.

2. 무라카미 하루키 <Norwegian wood> 중 한 문장 "Until that time, I had understood death as something entirely separate from and independent of life. This had seemd to me the simple, logical truth. Life is here, death is over there. I am here, not over there":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구의 사망 소식을 들은 후 와타나베는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삶은 죽음과 별개가 아니다. 우린 단지 거기서 몇 걸음 떨어져 있을 뿐이다.

  

아직 사유의 죽음만을 경험했을 뿐, 실존적 죽음(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의 경험은 턱없이 적으니, 앞으로 나의 두려움은 어떤 모양으로 변모해갈지 가늠조차 힘들다. 그래서 두려움의 크기나 모양은 달라지고 있다 해도 여전히 나는 죽음이 두렵다. 때론 숨이 턱 막히고, 온몸에 소름이 돋고, 대책없이 눈물이 날 때도 있다. 혹시 비슷한 짐을 들고 있는데, 그걸 어디 내려놓아야 할지, 혹은 어디에 지고 가야할 지 헷갈리는 분들에게 나의 사유의 몇 페이지를 공유해본다.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내겐 조금 더 평온해지는 하나의 방법. 그러니까 부디 그분들께도 도움이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것은 우리의 생의 과제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