숄더백 하나 들고 유럽 여행

ep4. 비엔나에 사는 기분을 가장 크게 느낀 순간들

by 양탕국
한 달 동안 비엔나에만 있는 거야?


아무 계획도 없이 비엔나에 한 달 간 머문다고 하면 종종 받는 질문. 작가라고 하니 내가 로망으로 삼던 ‘2018년 여름, 비엔나에서’를 다들 상상하는 것 같았지만, TV writer라고 하니 그렇담 이곳에서 영감을 얻어 다큐를 만드는 거냐고도 묻곤 했다. 여러분, 작가는 늘 영감으로 넘쳐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곳에서 글감을 얻는 것도 아니고요. 프리랜서에게도 휴가와 일터엔 경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비엔나에서 뭘 할 건데?”

“이것저것. 근데 심심하면 할슈타트 같은 데 놀러가서 하룻밤 자고 오면 되지 않을까?”

“뭐? 할슈타트는 오스트리안들도 수 개월 전부터 숙소 예약하는 덴데?”


어느 날의 모임에서 들은 청천벽력 같은 말.

10년 전에 할슈타트를 가봤던 게 전부인 나는 그때와 같은 그림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웹사이트마저 갖고 있지 않던 작은 마을의 숙소들. 당시엔 할슈타트에 도착한 날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숙소 추천을 받아 당일 예약을 했고, 그날 묵어보니 마을이 너무 예뻐 다음날 숙박 일정을 하루 더 늘렸다.

여유가 흐르다 못해 철철 넘쳐 줍고 다녀야하는 나의 계획을 듣고 한 오스트리안이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그날 새벽까지 할슈타트 숙소를 찾아 헤매야했다. 아니나 다를까, 호텔 예약 어플을 통해 확인해 보니 10만원 대 숙소는 정말이지 꽉 차 있었다. 만약 차량이 있어 이동하기 쉽다면 호수 건너편의 오버트라운 같은 곳에 숙소를 잡아도 되겠지만, 해당사항 없는 나는 어떻게든 할슈타트 시내에 숙소를 잡아야 했다. 가격대가 맞는 모든 숙소에 2주 정도의 날짜를 일일이 입력하며 확인한 결과, 당장 이틀 뒤 한 숙소에 1박짜리 방 하나가 남은 걸 찾을 수 있었다.



무계획이 계획인 일상


여행을 할 때 세세한 계획을 세워두는 편이 아니다. 특히 이동 계획. 아직 가보지도 않은 곳인데, 이곳 후엔 저곳, 저곳 후엔 그곳을 며칠씩 묵은 후 떠날지 미리 결정하는 건 게으름뱅이인 내겐 무척 피곤한 일이다. 그런데 한 도시에 한 달 살기를 하게 됐으니 이 나태함은 극대화될 수밖에. ‘계획 없음이 유일한 계획’이었던 일상인데, 당장 이틀 뒤라고 떠나지 못할 게 뭐람. 숙소부터 예약하고 OBB 어플을 통해 기차표까지 올클리어한 후, 숄더백에 단출한 1박2일용 짐을 쌌다. 한국에서부터 주섬주섬 챙겨온 일회용 화장품 샘플들이 제 역할을 할 때가 되다니.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떠나는 날 아침에 울릴 알람까지 맞춰놓으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떠나는구나, 그것도 할슈타트로!


할 일도 없는데 급 여행이 무슨 문제랴
급작스레 떠났던 할슈타트 1박2일


부산 가듯 잘츠부르크


할슈타트 여행 이후 두 번째로 떠난 근교 여행은 잘츠부르크행이었다. 잘츠부르크 방문은 무계획이 계획인 나도 서둘러 준비했던 것으로, 바로 세계 최고의 클래식 음악 축제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때문. 여름 내내 잘츠부르크에서 펼쳐지는 이 축제 기간엔 여름내 활동을 중단하는 유럽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은 물론, 세계 내로라 하는 연주자들을 볼 수 있다. 원하는 공연을 관람하려면 적어도 3개월 전엔 예매를 마쳐야 한다. 작년에도 유럽 여행을 하며 동유럽 코스를 마치고 서유럽으로 날아가 여행을 하다가 이 축제 때문에 다시 2개월 전 여행했던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는 비효율적인 루트를 감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축제의 감흥이 엄청났기 땜에 굳이 비엔나 한 달 살기가 아니더라도 유럽에 올 계획이 있었다면 무조건 왔을 것이다.


잘츠부르크 축제의 메인 공연장인 대축제극장. 이 공연장이 있는 거리 이름은 무려 카라얀 플라츠!


이번에도 떠나기 하루 반나절 전부터 화장품 샘플과 2박3일용 옷가지 (공연용과 생활용이 필요해 조금 번거로웠다) 등을 챙겼다. 지난번도 두 번째도 여행짐은 일상에서 책이 좀 많을 때 들고 다니던 롱샴 숄더백에 넣으면 딱 좋은 정도인데, 정말 이거 하나 들고 할슈타트와 잘츠부르크 가는 기분은 어찌나 끝내주던지. 비엔나에 있을 때보다 이럴 때 정말 비엔나 한 달 살기가 실감나곤 했다. 나 지금 부산 여행 가듯 할슈타트를 가고 잘츠부르크를 가는 거야? 그전엔 늘 24인치 캐리어나 10키로 넘는 배낭 갖고 끙끙거리며 왔던 여길?


“짐가방은 어디 있어? 미안, 우리가 엘리베이터가 없어.”

“(숄더백을 보여주며) 짐은 이게 전부야!”

“Oh, great! 너 오스트리아에 살아?”


실제로 할슈타트 숙소 체크인할 때 리셉션에서 나눈 대화. 한 달 간 비엔나에 머물게 됐어, 라고 하면 전에 없던 친절함까지 보여주며 오스트리아는 좋냐고 묻는 오스트리안들. 아마 나도 서울에 사는 외국인을 만나면 안 좋았던 일까지 덮어줄 수 있는 좋은 인상을 주려고 급 친절해지겠지.


그 여행의 기록


짐이 가벼우니 몸은 물론 마음까지 가벼워진다. 호텔에 들어가 정리할 짐도 없고, 체크아웃 후에도 이 짐을 어쩌나 걱정할 일도 없으니 말이다. 사실 짐이 적다는 것만 빼면 도시 구경하는 건 보통의 여행자와 다를 것 없는데, 왠지 마음이 더 여유로워지는 느낌이다. 그래서인가, 이번 잘츠부르크 축제에선 너무 여유를 부리다 공연을 하나 놓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작년에 왔다가 폭우로 인해 커피 한 잔만 마시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장크트볼프강엘 다시 갔다가 한껏 맑은 날씨를 즐기고 돌아오는 버스를 타려 하니, 나같은 여행자가 많았는지 버스가 꽉 차 한 시간 후의 다음 버스를 탔어야 했던 것. 입석으론 절대 안 태워주는 안전제일 운전기사 덕에 최애 피아니스트인 안드라스 쉬프 공연은 날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한국에 절대 안 오는 연주자도 아니고, 덕분에 예전에도 몇 번 실황을 본 적이 있어서. 만약 폴리니 같은 나이 많고 한국에도 절대 안 오는 연주자였다면 눈물이 주룩주룩이었을지도.


공연과 맞바꾼 장크트볼프강, 샤프베르크 여행


떠나보면 알게 될 거야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그렇게 신이 나서 여행을 갔는데도 꼭 비엔나가 그리웠다. 특히 비엔나에 머물던 그 집이. 그 공간을 특히 맘에 들어한 것이 큰 이유일 테지만, 그렇다해도 몇 주 만에 그토록 정이 붙어버릴 줄도 몰랐는데 말이다. 비엔나에 살아보는 기분을 비엔나를 떠나보니 가장 크게 느낀 아이러니한 경험. 낯선 도시에 잠시나마 오롯한 내 영역을 마련했다는 게 이토록 강렬한 일일 줄이야. (특히 공연을 놓친 날 저녁, 잘츠부르크에서 1시간을 기다려 받은 파스타가 너무 맛없던 때 더더더 비엔나 집이 그리웠다.)


집이라 이름 붙은 곳이 세상 제일이더라


잘츠부르크에서 돌아온 이틀 후엔 비엔나를 떠나는 날이어서, 남은 이틀은 집순이로만 보냈다는 사실. 그렇게 게을러도, 계획 없이 보내서 별달리 한 일은 없어도, 난 참 비엔나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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