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먹고 다니니?

ep2. 엄빠, 걱정말아요. 자식놈들은 생각보다 잘 먹고 다닌답니다

by 양탕국
미맹에게도 먹는 문제는 중요하다


내가 가진 여러 별명 중 하나는 '미맹'이다. 맛을 모른다는 뜻으로, 나는 맛을 묘사하는 실력이 아주 하찮다.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한 브랜드의 아이스크림을 당시 일하던 곳에서 가장 먼저 맛본 사람이 된 적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동료 중 맛에 매우 예민한 한 동료가 흥분하며 그 아이스크림의 맛을 묘사해주길 부탁했다.


"우유 맛이 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야."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다 우유 맛이 나. 다르게 설명해볼래?"

"음, 그러니까 정말 맛이 있는데 말야.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거든."

"모든 아이스크림은 입에 넣자마자 다 녹아!!”


이런 식이다.

잠시 와인에 빠져 와인 테이스팅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풋고추맛, 복숭아맛 같은 와인의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신김치맛, 아세톤맛은 느낀 적이 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나에게도 먹는 문제는 중요하다. 특히 낯선 곳에선 더욱 공을 들여 밥 먹을 곳을 찾는다. 비록 맛있음에 대한 평가를 1부터 10까지 세세하게 하지 못하고 맛있음과 없음 두 가지로 밖에 하지 못함에도 말이다. 세상 제일 짜증나는 일 중 하나가 '돈은 돈대로 쓰고, 맛은 없는데, 배는 부른 느낌' 아니던가.


비엔나에 오기 전, 북유럽을 여행하며 먹은 음식들. 빵이 물려 샐러드를 꽤나 먹었다.


요리 바보도 밥하기를 간절히 원할 때가 있다

비엔나에 오기 전 1주일 동안 런던과 아일랜드를, 2주일 동안 북유럽 4개국을 여행했다. 여행 중일 땐 일을 할 때처럼 9시에 아침, 1시에 점심, 하는 식으로 밥을 먹기보단 배꼽 시계가 울릴 때부터 식당을 찾기 시작해 한창 배가 고플 때 식사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 보통. 트립 어드바이저, 구글 트립, 에어비앤비 호스트들의 추천 등으로 여러 맛집을 찾아다녔지만, 맛에 대한 예민도가 현격히 떨어지는 터라 매 끼니 그럴 순 없는 법. 그러다보니 앞서 말한 ‘돈은 돈대로 쓰고, 맛은 더럽게 없고, 배는 더부룩하고’의 상황도 여러 번 겪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하루하루 갈수록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뭐를? 요리하기를!

나는 요리를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다. 레서피를 보면서 하나하나 따라하는 것도 싫고, 음식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주방을 원했던 이유는 1. 짜증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2. 쌀을 먹고 싶어서였다. 아무리 밀가루 음식을 좋아해도 매 끼니 밀가루가 주식이 되는 게 가뜩이나 고역이었던 차. 그런 와중에 짜증 3콤보 상황에 직면하면 때론 북유럽 바닥에서 한바탕 성토라도 하고 싶었다. 4만원 짜리 샐러드에 돌처럼 딱딱한 빵과 쓴맛 채소만 주다니? 카페에서 전자렌지에 돌려주는 레토르트 라자냐가 2만 5천원이라니? 같은 상황들 말이다. 해서 여행 2주차가 지나고부터는 내 안부를 묻는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입버릇처럼 "비엔나에 가면 당장 밥부터 해먹을거야"를 남발했다.


그래서 오늘은 뭐 먹었어?


내 나이 (한국 나이로) 32살. 다 큰 처자지만 엄마 아빠에겐 늘 철 없는 막내인 것. 여행을 떠나면 최소 하루 걸러 한 번은 카톡이 온다. 늘 첫 마디는 "밥은 뭐 먹었어?"이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도 엄마 아빠의 단골 질문 중 하나가 바로 밥에 관한 것인데, 언젠가부터 이 질문이 꽤 씁쓸하게 느껴졌더랬다. 나는 엄마 아빠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잘 먹고 다닌다. 심지어 엄마 아빠는 잘 모르는 맛있는 메뉴들도 나 혼자 냠냠 잘 먹고 다닌다. 그래도 부모는 자식 밥을 걱정한다. 특히 비엔나에 온 후 엄마 아빠의 걱정은 더 심화됐다. 평소 집에서 요리라고는 하지 않던 딸내미가 밥은 먹고 다니나, 뭘 열심히 사다 쟁여놓는다는데 대체 뭘 해먹는다는 건가 궁금한 거다. 그래서 비엔나에선 밥을 해먹을 때 종종 사진을 찍게 됐다. 내가 백 번 "응, 잘 먹어"라고 하는 것보다 한 번 사진 전송해주는 게 낫기 때문.


누룽밥, 계란국, 돼지고기 스테이크 / 샌드위치, 체리 한 줌, 오렌지쥬스 / 소시지 로제 파스타


메뉴가 매우 한정적이라 이틀에 한번 꼴로 같은 메뉴가 꼭 재등장하지만, 밖엣밥에 지쳐갈 때 주방과의 조우는 운명적이었던 것! 쌀이 먹고 싶으면 쌀을 먹고 빵이 당기면 빵을 먹는, 한국에서와 매우 비슷한 양상으로 식단이 자리잡는 건 시간 문제였다. 게다가 매 끼니 ‘어딜 가야하지’의 고민을 덜어내니 그것만으로도 한결 편해진 것도 장점.

하나 더. 장 봐서 밥 해먹기의 놓칠 수 없는 매력은 바로 '절약'이다. 특히 식료품 물가가 우리나라보다 저렴한 유럽에선 더욱 그렇다. 처음 장을 봤을 때 샀던 것이 쌀, 달걀, 소시지, 채소 몇 종류, 물, 맥주 정도였는데, 쌀은 1kg에 2유로가 채 안되고, 달걀은 6개에 2유로, 긴 소시지 8개들이 3유로, 피망 1유로, 양상추 1.5유로, 물 1.5리터 한 병에 0.7유로 수준. 대략 10유로면 사흘치 식량은 살 수 있는 거다. 물론 한 달을 산다고 생각하니 손가락이 드릉드릉해서 다음날부터 각종 과일, 요거트, 음료수, 바질페스토 등 한국에선 눈길도 안 주던 것들까지 사들인 건 함정이지만. 이제 돌아가는 날까지 냉장고 파먹기만 해야하는 실정에 이르렀지만, 그래도 참 잘 해먹었다. 작년에 비엔나를 여행하면서는 한 끼 먹을 때마다 15유로는 족히 썼는데, 한 달 살기 하니 엄청나게 절약되는 것 같은 기분은... 설마 기분 뿐인가? 따져보지 말자.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 배운
내 생애 두 번째 독일어


그러나 혼자 해먹기의 자아도취에 빠져갈 때쯤, 또 다른 치명적인 문제가 스멀스멀 고개를 빼들기 시작하는데- 바로 한국 음식이 그립다는 것이다. 어언 10년 전, 1년간 유럽에 살 땐 일주일 동안 쌀 좀 안 먹어도 살만했고, 국물은 정말 단.한.번.도 요리해먹은 적이 없었다. 근데 태어나 자란 곳은 못 속이는지, 이젠 여행을 하다 보면 밀가루가 물리고 뜨끈한 국물이 그리워지는 때가 있다.

‘아마 동네 어딘가에 z 발음이 들어가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아시안 식료품점이 있을 거야’ 라는 생각으로 외출을 할 때마다 두리번거렸지만, 그건 참 옛날 이야기. 구글 맵을 돌리다 보니 집 근처에 엄청 큰 한국 식료품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인데, 거의 유럽에서 가장 다양한 한국 식료품을 판매하는 곳이란다.


국물 몇 개만 사려했는데, 무려 비비고 만두를 팔길래 충동구매. 만두엔 비빔면이니까 비빔면도 충동구매.


사실 저 돼지고기 김치찌개는 ‘어멋, 실수로 건더기가 들어갔네?’ 수준이지만 그래도 그 손톱만한 돼지고기 몇 덩이 때문에 삼겹살이 무척이나 먹고 싶어졌으니-


“덩어리 고기를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해? 정육점을 본 적이 없어.”

“아마도... 나슈마르크트?”

“한국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돼지고기 부위를 사려고하는데, 지방도 많고 쫄깃한 식감이야.”

“마트에서 파는 돼지고기 덩어리랑은 다른 거야?”

“응, 그건 완전히 달라. 그럼 돼지뱃살은 독일어로 뭐라고 하지?”


오스트리안은 아니지만 비엔나에 산 지 넉 달 됐다는 헝가리안으로부터 ‘나슈마르크트’와 ‘슈바이네바흐(=돼지뱃살)’라는 정보를 획득!

나슈마르크트는 관광지로도 꽤 유명한 시장인데, 마트엔 안 파는 새송이 버섯, 훨씬 싱싱해 보이는 채소, 다양한 치즈를 구입할 수 있다. 그런데 돼지고기는 팔지 않는다. 여기가 할랄 시장인지 아닌지 그 여부는 모르겠지만, 삼겹살을 찾아 간 건데 달랑 새송이버섯 세 개만 산 채로 돌아갈 순 없지 않은가. 고기 진열장에 소고기와 양고기만 잔뜩 늘어놓은 걸 보고서도 정육점마다 들어가 ‘슈바이네바흐?’를 말하다 얻게 된 정보 - 나슈마르크트 시장 끝쪽 (토요일 벼룩시장 반대쪽)에 작은 정육점이 하나 있는데 이 시장에선 그곳에서만 돼지고기를 판다는 것이다.


“Schweinebauch, bitte” (돼지뱃살, 플리즈)


캬아! 그 뿌듯함이란.

이것만 하면 다 해결될 줄 알았지.

그 이후 얼마나 잘라주냐, 어떤 두께로 자르느냐, 이 지방덩어리도 넣어주느냐는 영어와 몸짓의 콜라보로 설명했다는 슬픈 뒷얘기가 있어...


어쨌거나 저쨌거나 삼겹살


(* 생애 첫 번째로 배운 독일어는 무려 10년 전, 뮌헨 옥토버페스트에서 배운 “Ich bin betrunken”이다. 나 술 취했어, 라는 말)


잘 먹고 잘 살긴 얼마나 어려운지


전세계적 이상고온 현상에 비엔나도 빠질 수 없다. “한낮 기온이 33도야”라고 징징대면, “한국은 40도야”라는 엄마 아빠의 답톡이 날아온다. 어느 날은 너무 더워서 주방에 들어가기도 싫다는 말에 엄마는 거기서 5도만 더 올라가면 밥도 먹기 싫어진다 했다. 비엔나에만 오면 매일 뚝딱뚝딱 요리해먹을 줄 알았더니,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그래도 아직까지 이곳 비엔나는 40도까진 가지 않아서 입맛은 살아있다.


밥이고 뭐고 아포가토 / 인스턴트 피자와 맥주 / 토스터기 돌린 빵과 과일 잔치


그래서 가끔은 땀 흘리지 않고 배만 채운다. 정말 잘 먹고 잘 사는 일은 쉽지가 않다. 물론, 저 사진들은 엄마 아빠의 “오늘은 뭐 먹었어?”의 답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