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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탕국 Jan 31. 2018

아름다움은 또 온다

영화 <패터슨>

* 영화 뒷내용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읽기를 원치 않으시면 아쉽지만 뒤로 가기를 실행해주세요.



프랑스 화가 르누아르는 50세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30년 가까이 류마티스 관절염에 시달렸다. 손과 팔, 나중엔 어깨까지, 그의 몸은 점점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화가에게 손과 팔을 자유로이 쓰지 못한다는 건 매우 절망적인 일일 것이다. 결국 르누아르는 이후 붓을 손가락에 붕대로 동여메어 고정 시킨 후 그림을 그려야 하는 처지에까지 이르고 만다.
그 모습을 본 화가 마티스는 르누아르에게 말했다.
“붓질하는 것이 그토록 고통스러운데 계속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뭔가요?”
르누아르는 답했다.
“고통은 지나가고, 아름다움은 남기 때문이야”

나의 인생 문장 중 하나인 르누아르의 이 말. 원문으로는 ‘La douleur passe, la beaute reste’ (The pain passes, but the beauty remains)는 이렇게 탄생했다.

영화 <패터슨>을 본 후 이 문장이 떠올랐다.

미국 뉴저지 주 패터슨에 사는 패터슨은 버스 기사다. 그리고 취미로 꽤나 진지하게 시를 쓴다. 스마트폰도 없고 컴퓨터도 사용하지 않는 남자. 그는 자신만의 비밀 노트에 매일 같이 시를 적고 또 적는다.
매일 시를 쓸 정도로 그의 삶이 누가 봐도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의 삶은 시상이 떠오를 것 같지 않은 ‘너무나 단조로움’ 그 자체다.

패터슨에서 태어나 죽 고향에서 살고 있는 남자. 직업은 버스 기사여서 매일 가는 길을 내일도 모레도 또 가야 하는 사람이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애완견과 산책을 하고 근처 펍에 가서 술 한 잔을 마시고 오는 것. 매일 반복되는 패터슨의 일상이다. 그나마 시적인 것이라고는 ‘패터슨에 사는 패터슨’이라는, 이 우연의 일치. 마치 그가 읽는 책의 저자인 패터슨 출신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암스 같은 말재미가 있다.

패터슨은 특별한 큰 사건을 통해 시상을 얻지 않는다. 단조로운 일상 속의 색다름이 그에겐 시의 소재가 된다. 버스에 탄 승객들의 대화가 어제와 다르고, 새로 바꾼 성냥 브랜드의 폰트는 마치 확성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생겨 재미있다. 집에 돌아가다 만난 10살 짜리 여자 아이와는 시라는 매개를 통해 세대를 뛰어넘어 감동 받는다.

시를 쓰기 위해 세상을 달리 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달리 보기 때문에 시를 쓰는 거겠지.


글쓰기에 대해 이런 저런 고민을 나누며 친구들과 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글을 쓰려면 일부러라도 궂은 일을 해야하는 거야? 너무 평온하게 살면 글이 안 써지는 건 아닐까?”
같잖은 핑계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쓰는게 어렵듯, 평범함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네.

복사본 하나 없이 오로지 노트에만 시를 적어오던 패터슨. 그런데 그 노트가 훼손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는 망연자실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시쓰기가 취미인 일본인을 만나는데, “시인이세요?” 라는 물음에 “그냥 버스 기사”라고 답한다. 그전에 시쓰기가 취미인 10살 소녀에게 자신도 시를 쓴다며 어필하던 때와는 상반된 태도다.
그러나 일본인으로부터 노트를 선물 받은 패터슨은 어느샌가 펜을 꺼내 다시 시를 적기 시작한다. 그가 꾸준히 시를 써온 비밀 시 노트는 이제 없지만, 아름다움은 여전히 남아있고 패터슨의 시선도 그대로이기 때문.

영화는 패터슨의 일주일을 보여주는데 날이 바뀔때마다 늘 부부가 함께 누워있는 씬에서 시작한다. 패터슨이 시 노트를 잃고 새로이 백지 노트를 갖게 된 후 다시 찾아온 월요일도 마찬가지다. 기쁘든 슬프든 일상은 반복된다. 패터슨은 또 버스를 운전하러 갈 것이고, 그의 새 노트는 차곡차곡 채워질 것이다.

다시 르누아르의 문장을 떠올려본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는 그 말. 그것이 명백하기에 르누아르는 고통스러운 붓질을 감내했을 것이다. 그러니 고통에 함몰되지 말 것. 패터슨에게 노트를 준 일본인이 말했듯 ‘때로 빈 페이지는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지금은 공허함에 어쩔 줄 몰라도 견뎌내면 아름다움이 남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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