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탕국 Feb 04. 2018

사랑은 기억으로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사랑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와 자기 생애를 시작한다. 그 생애가 연애의 기간이다. 어떤 생애는 짧고 어떤 생애는 길다. 어떤 생애는 죽음 후에 부활하고 어떤 생애는 영원하다.

- 이승우, <사랑의 생애> 중에서


지난해 이 글귀를 나의 블로그에 올렸다. 그리고 ‘이번 사랑의 생애가 부디 길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해가 바뀌자마자 다신 없길 바랐던 이별을 경험했고, 내 사랑의 생애는 죽음 후에 부활과 영면을 반복하고 있다.

사랑이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이유의 팔할은 기억 때문이다. 기억은 지우려 해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부유한다. 나는 못이기는 척 다시 그것들을 붙든다.

이 시점에 다시 꺼내든 영화가 바로 <이터널 선샤인>이다. 영화는 사랑한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사랑의 생애 전부를 부정하고 싶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클레멘타인과 헤어진 후 하루하루가 괴로운 조엘. 그녀가 일하는 서점엘 찾아가지만, 클레멘타인은 옛 연인 조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게다가 다른 남자와 깨가 쏟아지는 꼴이라니! 낯설어도 너무 낯선 그녀의 모습에 당혹스럽고 화도 나는 조엘.

그런데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클레멘타인은 기억 지우기 전문 회사인 라쿠나 사를 통해 이미 조엘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웠기 때문이다.


조엘은 곧바로 라쿠나 사를 찾아간다. ‘잃어버린 조각들’이라는 뜻의 라틴어 Lacuna. 이곳은 아픈 기억만을 골라 말끔히 지워준다는 곳이다. 지우고 싶은 일에 대해 말할 때의 뇌 활동을 기록해 기억을 지울 때 그 정보를 사용하는 방법. 조엘은 클레멘타인를 지우기로 결심한다. 그는 그녀를 지우기 위해 그녀에 대한 아주 작은 것들까지 기억해낸다. 기억을 지우기 위해 다시 기억해낸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다. 그 감정은 사랑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들을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특징은 그들이 권태를 느끼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우발적이고 색다르던 클레멘타인은 교양 없고 이기적인 여자가 됐고, 차분하던 조엘은 지루한 남자가 되어버린 시간.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순차적으로 지워나가는 조엘. 서로 싸우고 실망했던 순간부터 시작해 서로가 애틋하기만 했던 순간으로 서서히 다가가는 중에 조엘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Please let me keep this memory


제발 이 기억만은 남겨주세요.

간절하게 외치지만 야속하게도 기계와 연결된 뇌는 클레멘타인과 함께한 기억을 빠르게 지워낸다. 결국 조엘은 기억 속에서 재회한 옛 연인의 손을 잡고 그녀와 함께하지 않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있는 곳으로 도망친다. 그가 회상한 것들로 기억을 지우기 위한 데이터베이스를 마련했다면, 그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기억 속에 클레멘타인과 함께 숨어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조엘만 아는 추운 바닷가로, 클레멘타인을 모르던 조엘의 어린 시절로 도망을 간다. 하지만 이제 와 기억을 붙잡고 싶은 것처럼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과거의 간절함도 컸기에, 조엘은 결국 클레멘타인을 놓치고 만다.

다양한 해석이 난무하는 영화의 마지막. 원래 감독과 작가는 이 영화의 마지막을 새드엔딩으로 정해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열린 결말로 바꾸었다.


두 사람 사이를 잇는 과거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다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보자 다짐하는 조엘과 클리멘타인. 사랑의 생애가 시작한 것이다.

서로를 설레게 한 특징만은 그대로이기에 다시 사랑에 빠질 두 사람. 둘을 사랑에 빠지게 한 이유들이 다시 권태가 될지, 아니면 과거의 기억을 기록한 테잎을 새겨들으며 더 견고한 사랑의 디딤돌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조엘이 그러했듯 나 역시 여전히 부유하는 기억들 때문에 내 사랑의 생애를 아직 끝낼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절대 일부러 이 생애를 끊으려 애쓰진 않을 것이다. 억지로 이으려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네가 볼 수 없는 곳에 이 글을 적는다.

얼마나 더 많이 그것이 삶과 죽음을 반복할 지는 모른다. 부활하면 하는대로 죽어버리면 또 그런대로 두렵다. 그 땐 이 영화 속 대사를 되뇌어볼 참이다.


클레멘타인: 이제 이런 기억이 다 사라지게 될 텐데 어떡하지?
조엘: 그냥 음미하자.


그래, 그냥 음미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