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아 더 챔피언>
언제나처럼 넷플릭스를 부유하던 중, 흥미로운 예고편을 발견했다. 스키 상급 코스 저리 가라 할 언덕에서 온몸을 내던져 굴러 내려오는 사람들, 개구리를 앞에 두고 “점프!”를 외치며 개구리처럼 뛰는 사람들,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매운 고추를 먹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병맛’ 그 자체였다. 일단 찜을 누르고 며칠 후 모든 에피소드를 몰아보기에 이르렀다.
<위 아 더 챔피언>, 제목만 보면 4년에 한 번 열리는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이야기일 것 같다. 적어도 올림픽에 정식으로 등록된 스포츠에 대해 다루겠지 싶다. 하지만 면면을 들여다보면 이들이 출전하는 대회는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기엔 요원해 보인다.
총 6개 에피소드로 이뤄진 이 다큐멘터리는 전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이색 대회를 소개한다. 그중에서도 눈길이 가는 대회는 치즈 굴리기, 매운 고추 먹기, 개구리 멀리 점프시키기다. ‘도대체 저걸 왜?’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완전 병맛이네’하는 감상을 쏟아내고, ‘어쩐지 그만둘 수 없어서’ 계속 보게 된다.
이들 대회 외에도 요요 세계 챔피언십, 환상적인 헤어스타일 만들기, 반려견과의 댄스라는 예술적 가치도 충분한 데다 대회날 기량을 발휘하기 위해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십여 년씩 노력한 도전자들의 모습이 감동적이기까지 한 에피소드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선 2분 남짓한 예고편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괴상한’ 대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영국 글로스터 지역의 작은 시골 마을. 스프링뱅크 휴일마다 이 곳에선 특별한 행사가 열린다. 이른바 ‘치즈 굴리기 대회(cheese rolling fesvital)’. 눈썰매장처럼 경사가 큰 언덕 꼭대기에 참가자들이 옹기종기 모이고, 시작 신호와 함께 진행자가 지역 특산물인 커다란 치즈 덩이를 언덕 아래로 굴려 보낸다. 뒤이어 미친 듯 함께 구르는 사람들. 가파른 경사에 속도까지 더해져 도저히 걸을 수 없기에 치즈처럼 데구루루 통통 제 의지는 잊은 지 오래인 모양으로 결승선까지 ‘굴러 내려오는’ 것. 원래 경기 규칙대로라면 치즈를 잡기 위한 것인데, 치즈의 속도는 자그마치 시속 112km. 결국 결승선을 ‘어떻게든’ 먼저 통과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미국 포트밀이라는 시골 마을에선 ‘제1회 매운 고추 먹기 대회’ 준비가 한창이다. 쟁쟁한 우승 후보들은 이미 유튜브에서 ‘매운맛 대마왕’으로 잘 알려진 사람들! 그들을 초청한 사람은 지역 농부인 에드 커리. 미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까지 이제 막 개최하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날아오는 이유는 뭘까?
바로 초대장을 보낸 에드 커리가 기네스가 인정한 ‘세계에서 제일 매운 고추’라는 캐롤라이나 리퍼를 최초 재배한 사람이기 때문. 울퉁불퉁 모양도 기괴한 이 고추는 할라피뇨보다 최소 300배 맵고, 경찰이 사용하는 호신용 페퍼 스프레이에 버금가는 매운맛을 가졌단다. 고추의 매운맛을 참지 못해 앞에 놓인 우유를 마시면 그대로 탈락. 살아남은 자들은 다음 라운드에서 더 매운 고추를, 남들보다 더 빨리 먹어야 한다.
미국의 또 다른 작은 마을. 이 마을엔 커다란 개구리 동상이 서 있다. 바닥엔 해마다 우승했다는 사람들의 이름이 개구리 그림과 함께 새겨졌다. 그 역사만 자그마치 90년인 이 대회는 바로 ‘개구리 점프 대회’. 참가자는 각자 마음에 드는 황소개구리를 공수, 훈련시킨 후 대회에 내세운다. 총 3번의 점프 후 가장 멀리 나간 개구리, 아니 그 개구리 훈련사(?)가 이기는 게임이다. 듣기엔 우스꽝스럽지만 유구한 역사만큼 참가자들의 경쟁은 뜨겁다. 오죽하면 이 개구리 점프 대회를 두고 대를 이어 서로를 견제하는 가족들까지 있을 정도다.
이 지역 대회들은 모두 지역 특산물 홍보 차원에서 만들어졌다. 치즈와 고추는 말할 것도 없고 점프 대회에 출전하는 개구리조차 지역 내 황소개구리여야만 한다는 규칙이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광양에선 매화 축제를, 문경이나 청송에선 사과 축제를 하고, 남원에선 춘향 선발대회를 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특산품 판매는 기본이고 특산품을 홍보할 수 있는 갖가지 행사를 하는 것이 본래 취지. 대체로 지방이고 작은 마을이다 보니 작은 축제라도 열면 관광객도 늘고 생기가 돌기 마련. 아마 치즈 굴리기, 매운 고추 먹기, 개구리 점프시키기 대회는 모두 그런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 참가 도전장을 내민 사람들은 소소한 재미를 위한 오락보다는 진심을 다해 노력하고 이기려는 것 같다.
치즈 굴리기 전년도 우승자는 이번 해에도 이기기 위해 경기가 치러지는 언덕에서 미리 훈련을 받는다. 지난 대회 부상으로 쇄골이 탈골돼 불쑥 튀어나와 있지만 ‘이번에는 덜 다쳤으면’하는 마음이지, 대회에 불참할 생각은 없다.
별칭부터 ‘개구리 마을(frog town)’인 곳에선 또 어떤가. 참가자들은 함께 대회에 나갈 개구리를 만나기 위해 매일 동네 호수를 샅샅이 뒤진다. 다리가 길고 점프를 잘할 것 같은 놈으로 골라 바짝 훈련을 시켜야 한다. 한 남성은 대회에 참여할 개구리에게 지극정성이다. 주변 사람들이 “다음 생에는 네가 관리하는 개구리로 태어나고 싶다”라고 할 정도다.
그리고 대회 당일. 치즈 굴리기 대회장엔 수십 명의 안전요원과 여러 대의 구급차가 대기 중이다. 맨 땅에 뒹굴고 구르다 찢어지고 부러지고, 열심히 구르던 다른 사람과 부딪혀 깨지기 일쑤이기 때문. 고추 먹기 대회장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눈물 콧물은 기본, 구토 두통 어지러움 등을 유발할 수 있다 보니 의료진과 구급차는 항시 대기다. 위험하고 아찔한 상황이 참가자들만 피해 가는 게 아닐 텐데 그들은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온몸을 불사른다.
매운 고추 농부이자 고추 먹기 대회 주최자인 에드 커리는 참가자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고추도 홍보하고 재미도 보려고 했을 뿐인데, 진심을 다해 임하는 참가자에게 감동한다. 그리고 2등을 한 여성에게 다가가 말한다. 당신에게도 상금 천 달러를 주고 싶어요. 평생 그렇게 감동적인 건 처음이에요.
다큐멘터리 6편의 구성은 모두 같다. 대회 준비에 한창인 지역을 찾아가 어떤 대회인지 소개하고, 뒤이어 강력한 우승 후보들이 어떻게 이 대회를 준비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인터뷰한다. 그리고 대회 당일의 모습을 보여주고 마지막은 그럴듯한 마무리 멘트로 정리하는 식이다.
식상한 구성이 반복되는 중에도 어쩐지 그만둘 수 없는 건 매 회차 ‘결정적 구간’이 있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대회와, 그걸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은 분명 웃음 유발 버튼이었는데, 대회가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면서 어느새 뭉클해진다. 지금 이 순간만 산다는 듯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앞서 나온 인터뷰와 겹쳐지면서 어딘가 숙연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왠지 더 이상 키득대는 건 실례일 것만 같다. 그 과정을 거치면 처음엔 너무나 어색했던 마무리 멘트도 절대 ‘오글거리지’ 않으리라.
그래도 마지막까지 ‘도대체 저런 걸 왜?’라는 의문이 남는다. 체에 아무리 걸러내도 그 질문만은 그대로이겠거니 하는 순간, 참가자들의 허심탄회한 소회가 답으로 등장한다.
- 지금껏 전통으로 남아있는 일에 참여해서 영광이었어요. 나이가 들어 달릴 수 없게 되면 언덕에 가서 뛰어가는 십 대 소녀들을 보며 추억에 젖겠죠. “나도 한때 저랬지” 하면서요.
- 제가 거기에 있을 가치가 있다고 느끼고 싶었을 뿐이에요.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나 자신에게 증명했죠. 이건 시작에 불과해요.
누군가는 단지 오늘의 즐거움을 위해, 누군가는 내일의 내가 살아갈 원동력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사실 이들에게 승리나 기록보다 중요한 건 그 순간의 진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병맛스럽다’며 비웃음을 당해도, 이해 못할 일이라며 눈살 찌푸리며 쳐다본대도 나는 진심이니까 포기할 수 없는 것. 내가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 꼭 이기지 못하더라도 괜찮은 것. 그렇다. 이건 우리 삶이다. 부딪히고 구르고 맵고 눈물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또 앞으로 나아가는 참가자들 모습에서 우리는 살아갈 방식을 배운다.
한국 가수 싸이는 무대를 방방 뛰며 힘껏 외쳤다. 돌고 도는 물레방아 같은 인생, 차별 없이 파벌 없이 다 같이 즐기면 된다고. 진정 즐길 줄 아는 여러분이 이 나라의 챔피언이라고.
올림픽에 출전할 거창한 경기만 챔피언을 배출하는 게 아니다. 설령 누가 ‘병맛’이라 한들 어떠랴. 올림픽 선수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은 것처럼, 별 볼 일보다 별 볼 일 없는 날이 더 많은 게 인생인데. 그러니 물을 흠뻑 맞고 펄쩍펄쩍 뛰며 내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음악에 미치는 네가 챔피언’을 목청껏 내지르던 어느 날 밤처럼 우리 인생의 어느 순간들을 그렇게 진심으로 살아내면 그게 바로 내 삶의 챔피언이 되는 길이다.
혹시나 아직도 흐트러지고 무너질 것을 걱정하는 이들에게는 영상 속 한 마디를 전한다. 치즈 굴리기 대회에서 다리가 부러져 깁스를 하고 온 딸에게 아버지가 건네는 말이다.
기록이 깨진다한들 너는 영원한 챔피언이야.
이기지 못해도 괜찮다. 어차피 영원한 우승이란 없는 법. 인생 즐기는 네가 챔피언이니까.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