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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탕국 Feb 15. 2021

이토록 재치 있는 ‘여돕여’라니

<투카 앤 버티>

방송 구성작가로서 꼭 만들어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과 현대미술을 주제로 하되 쉽고 재미있게 만들어 접근 장벽을 완전히 낮추는, 그래서 음악과 미술이 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지 않더라도 그냥 한 번 보게 되는 프로그램이라면 좋겠다.

말이 쉽지, 실제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려운 걸 어렵고 고상하게 설명하는 건 쉽다. 제일 힘든 건 어려운 걸 쉽게 전하는 것이다. 이 또한 줄줄 말로 풀어내는 건 그저 누군가의 유명세와 달변에 기대는 것일 뿐. 진짜 쉽게 재밌게 전달하려면 첫째, 시각화를 잘해야 하고 둘째, 장치를 군데군데 심어두어야 한다. 그런 콘텐츠를 봤을 때 시청자는 어느새 ‘보고 듣는’ 것을 넘어 ‘스며든다’. 꼭 메시지가 잘 전달되지 않았더래도 괜찮다. 시각화를 잘했으니 시청하는 동안 “시간 잘 때웠다!”라고 생각해주면 그만이다.


이토록 어려운 일을, 그것도 아주 예민하고 민감한 이슈를 재료 삼아 맛있게 요리한 콘텐츠가 있었으니! 바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투카 앤 버티>다.

수 년째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에서도 전에 없이 뜨거운 이슈인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미 페미니즘, 이 단어 하나만으로 누군가는 눈을 반짝 뜨고 관심을 기울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미간에 주름부터 그릴 지도 모른다. 후자라면 이 단계에서 ‘뒤로 가기’를 누르고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전자라면 ’빨간 약’을 먹지 않은 그런 사람들을 떠나보내기보단 시약을 권하고 싶을 수도. 그런데 워-낙 날 선 이슈라 그런지 말 한 번 꺼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쉽게 해 보자는 마음에 시각화된 자료를 추천하려고 해도 페미니즘의 역사 어쩌고, 페미니스트 예술가 어쩌고... 이렇다 보니 진입부터가 난관이다.

그럼 그냥 ‘아님 말고’ 식으로 툭 던져보는 건 어떨까? 언니들, 우리 각 잡고 진지하게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재밌게 보여주면 되는 거 아냐?


[투카 앤 버티. Tuca & Bertie. 2019]


외양도 성격도 정반대, 하지만 베프!


큰부리새 투카와 노래새 버티는 한 아파트 위아래 층에 사는 둘도 없는 친구다. 원래는 룸메이트였지만 버티가 남자친구와 동거를 시작하며 따로 살게 된 두 사람, 아니 두 새(!)는 겉도 속도 180도 다르다.

허벅지가 튼실하다고 놀림받아도 제 취향대로 늘 핫팬츠만 입는 투카는 걸걸하고 큰 목소리만큼 행동에도 거침이 없다. 고정적인 직업도 없어서 돈 많은 이모에게 도움을 받거나 각종 알바를 전전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게 다반사. 미래에 대한 걱정도 딱히 없어 보인다. 그야말로 YOLO 그 자체! 반면 버티는 걱정도 많고 소심하다. 데이터 회사에 다니는 버티의 훌륭한 취미는 제과제빵. 이걸로 뭔가 해보곤 싶은데 회사를 그만둘 순 없다. 그렇다고 회사 생활이 엄청 좋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회의 시간에 발제하려고 열심히 준비해 가면 웬 수탉 놈이 버티의 메모장을 훔쳐보고 제 아이디어인 양 이야기하지 않나, 그것도 모자라 “딱 붙는 옷을 입었으니 상사가 네 말은 다 들어주겠다”며 성희롱도 서슴지 않는다. 그래도 끙 소리 한 번에 참기만 할 뿐, 이렇다 할 행동은 못한다.

극과 극인 두 새가 가장 가까운 친구인 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이기 때문. 제 몸을 홀대하고 집안도 엉망진창인 투카를 쫓아다니며 챙기는 건 버티뿐이고, 소심한 버티가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게 이끄는 건 용감무쌍한 투카뿐이다.

외양도 성격도 180도 다른 투카와 버티 / 이미지 출처: imdb


여자니까, 원래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나만 참으면 되는 걸까?


총 10개로 구성된 에피소드는 버티가 회사에서 승진도 하고 파티셰의 꿈을 키워나가기로 결정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큰 축 삼아 진행된다. 사실 걱정도 고민도 없이 사는 듯한 투카보다는 안정적인 회사원이지만 현실도 꿈도 포기할 수 없어 아등바등하는 버티가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살 터. 분명히 지난날엔 이런 안정감을 위해 발버둥 치며 노력했을 게 분명한데, 진급도 하고 유명 베이커리에서 수습 생활을 하며 실력도 인정받고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버티는 불안정해 보인다. 그래서 어떤 일이 닥치면 외면해버리는 것으로 당장의 난관을 해결하곤 한다. 직장 내 성폭력으로 스트레스를 왕창 받으면서도 넘어가고, 그런 자신이 미워 '여공차' (여성이여, 공간을 차지하라)라는 모임에 가입해 이런저런 팁을 얻지만 막상 집에 들이닥친 남성 배관공을 보곤 흠칫 놀라 아무 말도 못한다. 베이커리 사장이자 유명 파티셰인 페이스트리 피트 역시 권력으로 자신을 비롯해 새로운 수습생까지 짓누르지만 그 현실을 애써 모른 척 넘겨버리기만 한다.


이런 버티가 비겁하고 겁쟁이 같은가?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는 이제껏 이렇게 살아왔고, 슬프게도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이 현실에 어쩌지 못하고 있다. 버티의 회피 성향은 '나 하나만 참으면 된다'는 학습된 강박이다. 그리고 어릴 적 수영 유망주였던 버티가 홀로 피넛버터 섬까지 헤엄쳐 갔다가 안전요원에게 성폭력을 당한 후 수영을 포기한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아닐까?', '이런 일이 벌어진 건 내 탓이야'라는 생각을 더 하지 않으려면 현실에서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견디기' 대신 '돕기'에 나선 그녀들


이런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구세주처럼 나타나는 건 투카다. 수탉 동료에게 아이디어도 빼앗기고 성희롱도 당해 시무룩한 버티의 회사에 쳐들어간 투카는 단번에 회사 대표까지 사로잡아 친구의 승진을 이뤄낸다. 성공한 남성이 저지르는 기만과 위계에 의한 성폭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캐릭터, 페이스트리 피트가 버티에게 "넌 내가 만들었어. 난 널 망칠 수 있어"라고 겁을 주는 모습을 몰래 촬영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것도 투카다. 다시는 수영을 못할 줄 알았던 버티가 피넛버터 섬까지 쉬지 않고 완주할 수 있었던 것도 투카의 격려 덕분!

물론 투카 역시 알고 보면 외로운 한 마리 새였을 뿐, 버티가 곁에 없을 땐 한없이 작고 초라해진다. 능력도 없고 변변치 않은 삶을 사는 자신을 부끄러워할까 봐 연휴에 가족에게 전화도 하지 못하는 투카를 격려하고,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상황에 놓여도 '이것마저 버티지 못하면 정말 엉망진창'일까봐 "난 괜찮아!"라고 크게 외치는 투카에게 열일 제치고 달려와 곁을 지키는 것도 단연 그의 절친 버티다.


어렵고 무섭고 못할 것 같았던 일을 두 친구가 의기투합해 헤쳐나가는 이야기만으로도 코끝이 찡, 눈가가 시큰한데 어느새 마지막 회차를 향해 갈수록 이 작은 연대는 많은 여성이 함께 하는 큰 연대로 발돋움한다. 즉, 투카:버티라는 1:1의 상호 보완 작용이 '여성'이란 커다란 집합에서의 투카 and 버티라는 교집합으로 사이즈가 커진 것이다.  그래서 버티를 협박하는 페이스트리 피트의 영상을 본 여성들이 약속이나 한 듯 버티의 신생 베이커리에 엄청난 주문을 넣는 에피소드, 어릴 적 버티를 가르친 수영 선생님과 그 아내, 투카까지 합세해 세 여성이 버티를 무한 응원해주는 에피소드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이야기가 무겁지 않은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 성희롱을 당한 버티의 가슴이 탈출해 불만을 늘어놓는 방식으로 스트레스가 쌓인 버티의 상황을 보여준다든지, 버티의 승진을 성사시키기 위해 회사를 찾아간 투카가 '왜 버티가 승진해야 하는지'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 대신 우당탕탕+요절복통 형식으로 회사를 휘어잡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대표까지 넘어가는(설득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든지, 사람이었다면 위험한 종양이었을 투카의 병이 커다란 계란으로 등장, 나중엔 홀로 그것을 요리해먹는 투카를 통해 황당한 와중에도 쓸쓸함을 극대화하는 등 시종 재치 있고 발랄하다. 그래서 메시지를 읽고 싶지 않고 설령 모른다고 해도 "이건 뭔데 진지하지?", "왜 갑자기 가르치는 것 같지?"라기보다는 "맞아, 저런 일이 있기도 하지!" 하며 그냥 지나쳐버릴 수 있는 것이다. 예민하고 까칠한 이슈를 제안하는 방식이 무척 세련되고 영리하다는 생각이다.


'여돕여'는 현실에서도 계속된다


과거엔 '여적여',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프레임이 미디어에 만연했다. 성공을 위해선 당연하고, 주로 외적 만족이나 부의 과시 같은 쓸모 없는 허영심을 충족하기 위한 일에도 여성들은 서로를 적으로 돌리고 손가락질에 뒷담화에 머리채를 휘어잡기 일쑤였다. 하지만 페미니즘 이슈가 전면에 내세워진 후 이 프레임은 '여돕여', 여성은 여성을 돕는다는 말로 바뀌고 있다.


이 '여돕여'가 매우 긍정적으로 발휘된 게 바로 <투카 앤 버티>다. 큰부리새 투카를 연기한 티파니 해디시는 흑인 여성 코미디언이고, 노래새 버티는 아시아계 코미디언이자 배우인 앨리 웡이 연기했다. 잠깐 등장하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버티의 가슴 역은 아시아계 배우가 아시안의 이야기를 다룬 헐리웃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에 출연한 아콰피나가 맡았다. 그 외에도 레즈비언, 트렌스젠더 등 현실 헐리웃 세계에선 가장 1순위로 배척될 인물들이 <투카 앤 버티>에선 주인공이고 씬 스틸러가 된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콘텐츠가 계속되면 좋았으련만, 아쉽게도 넷플릭스는 시즌1을 끝으로 더 이상 제작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2019년 당시 <투카 앤 버티>는 ‘올해 최고의 TV프로그램’으로 뽑히기도 했고 로튼 토마토 등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팬들의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이런 아쉬움의 목소리에 미국의 성인 애니메이션 채널인 ‘어덜트 스윔’이 시즌2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쁜 소식! 어디에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어떻게든 찾아서 보겠지.

자, 올해 시즌 2가 나온다고 하니, 누군가에게 ‘빨간 약’을 권하고 싶은 언니들은 나랑 같이 서두르는 게 어떨까? 아마 잘 되면 한 큐에 시즌1과 시즌2까지 전파하고, 그게 우리의 연대 써클 안으로 들어오는 알약을 꿀꺽하는 발판이 될 지 누가 알겠어?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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