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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탕국 Jan 11. 2024

헤엄



바다는 깊었다. 검은 물이 내 몸을 집어삼킬 듯 휘감았다. 나는 금방이라도 바다에 먹혀버릴 것처럼 팔다리를 허우적댔다. 그럴수록 몸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소금 맛 바닷물이 자꾸만 입 안으로 밀려들었다. 잠시 후, 피부가 까무잡잡한 태국인 가이드가 내 곁으로 헤엄쳐 오는 것이 보였다. 가이드가 나를 붙들자 바짝 긴장했던 근육들이 스르륵 풀렸다. 배에 타기 위해 사다리를 한 칸씩 밟아 오를 때마다 팔과 다리, 머리, 몸통에서 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물의 파편들이 끝 모를 바다로 떨어져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자칫하면 나도 저 바다에 빠져 사라졌을 수 있었겠다고 생각하자 한기가 들었다.

사고가 나기 전, 나는 태국 끄라비의 바다에 스스로 뛰어들었다. 가이드는 된소리가 두드러지는 영어로 이 장소가 ‘스노끌링’을 하기에 좋은 ‘스빳’이라고 말했다. 소다 맛 아이스크림 색을 띤 바다는 도시에서 온 여행자를 단번에 유혹했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나의 낭만은 고층 빌딩의 무수한 사무실을 밝히는 조명들이었다. 끄라비의 바다에 얼굴을 담그자 사무실 조명보다 찬란한 형형색색의 물고기가 눈앞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누군가의 피로에 빚진 낭만 대신 자연이 만든 총천연색의 낭만이 펼쳐졌다. 노란색 몸통에 까만색 줄무늬가 얼룩말처럼 새겨진 물고기 떼를 투명에 가까운 주황색의 얇은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고기 떼가 뒤따랐다. 인어공주 애리얼의 친구 플라운더와 같은 물고기들을 따라 한참을 헤엄쳤다. 이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물 밖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함께 배를 타고 온 무리와 내가 다른 방향으로 수영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자 몸이 굳기 시작했고, 캔디바처럼 달콤해 보였던 바다는 거대한 검은 혓바닥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물에 들어가지 못했다.

2년 전 가을, 하던 일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처음 1년은 참 즐거웠다. 바닷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의 뒤꽁무니를 정신없이 쫓아간 그날처럼 새로운 학문은 가보지 않은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목적지를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둥둥 떠다니다 보면 어딘가에 당도할 것이고, 결국 마주하게 될 새로운 세계가 나쁘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나는 망망대해에 그저 떠 있었다. 호기심 하나로 풍덩 뛰어들었는데,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서늘하고 광활한 그날의 바다와 같았다. 가라앉고 싶지 않아 허우적댔지만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지난여름, 한 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한동안을 태국에서 보냈다. 한 달간 머문 숙소의 꼭대기 층에는 마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넓은 수영장이 있었다. 물의 경계면이 보이지 않아 마치 건물과 나무가 물 위에 올려진 듯했다. 나는 그 멋진 풍경을 물 밖에서만 확인할 뿐이었다. 어떤 날은 수영장 근처를 서성이기도 했다. 유튜브에 ‘물에 뜨는 법’, ‘물 공포증’, ‘초보 수영’ 따위를 검색하며 내일은 물에 들어가리라 다짐했다. 수많은 유튜버가 알려준 물에 쉽게 뜨는 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수영장 바닥에 발을 딛고 선다. 둘째, 강시처럼 팔을 앞으로 뻗는다. 셋째, 두 팔 사이로 얼굴을 넣는다. 이때 귀가 물에 잠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넷째, 다리로 벽을 찬다고 생각하며 슬쩍 다리를 민다. 몸을 띄운다기보다는 늘린다고 생각한다. 어떤 유튜버는 이렇게 말했다. 내 몸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물에 몸을 맡기지 못하면 뜰 수 없습니다.

결국 한국에 돌아가는 날을 사흘 앞두고 수영장에 들어섰다. 잔뜩 긴장한 몸과 마음을 스트레칭으로 풀며 드넓은 수영장을 눈으로 훑으니, 수영장을 이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호흡하고 계단을 하나씩 밟아 내려갔다. 40도에 육박하는 한낮의 기온 때문인지 물은 미지근했다. 두 다리를 휘감는 물의 감촉을 느끼며 유튜버가 알려준 물에 뜨는 법을 복기했다. 먼저, 땅을 딛고 섰다. 목울대쯤까지 물이 닿는 것을 보니 수심은 1.5m 정도로 가늠되었다. 두 팔을 뻗고 고개를 숙였다. 바깥의 소리가 차단되고 귀로 물이 밀려드는 것 같아 얼른 고개를 드는 바람에 실패. 마을의 전경을 보려면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족히 열 걸음은 나아가야 했다. 다시 고개를 담그고 다리를 들어봤지만, 몸이 뜨기는커녕 물만 먹기 일쑤였다. 몸을 최대한 물에 맡기라는 충고를 되새겼다. 그러기 위해 몸을 뒤집어 배영 자세로 만들었다. 물에 고개를 처박지 않으면 고꾸라지는 느낌이 들지 않아 덜 무서우리라. 머리를 뒤로 하여 상체를 눕혔다. 여전히 다리는 무거웠다. 천천히 숨을 마셨다 내쉬자, 몸이 미세하게 물 위로 올라왔다 가라앉았다. 팔을 만세 하듯 뻗어 올리자 몸이 기우뚱 크게 움직이더니 다리가 저절로 바닥에서 떨어졌다. 순간 밀려드는 공포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대로 호흡을 반복하며 천천히 다리를 밀어보았다. 나는 더 이상 가라앉지 않았다. 눈을 뜨자 소다 맛 아이스크림 색깔의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저 가만히 떠 있었다. 마을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다. 망망대해처럼 드넓은 수영장 한가운데에 떠 있는 나를 구할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가을이 되면 다시 형형색색의 물고기를 찾아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땐 몸을 뒤집고 물속으로 고개를 들이밀 것이다. 팔을 뻗고, 땅을 딛고 선 발을 살포시 밀어볼 것이다. 그렇게 떠다니다 당도하게 될 새로운 세계는 충분히 괜찮을 것이다.




덧) 1월부터 8주간 에세이 쓰기 강좌를 듣는다. 첫 번째 숙제로 제출한 글을 올린다. 그동안 적은 몇 안 되는 글을 참고하면서 일부 표현은 가져오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에 올린 다른 글과 조금 겹치기도 한다. 쓰는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한 여정을 뚜벅뚜벅 걸어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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