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의 나부낌에도 음악이 있다.
시냇물의 흐름에도 음악이 있다.
사람들이 귀를 가지고 있다면 모든 사물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의 말입니다. 책장에 꽂아 둔 소설책이나, 머리맡의 휴대폰 속에 소설이 있다면 그 곳에도 귀를 기울여보세요.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고 극적인 스토리가 넘쳐나는 소설에서 음악을 발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음악은 텍스트에 스며들어 배경이 되고, 인물의 내면을 대변하거나 캐릭터의 취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주연처럼 직접 주제를 풀어나가는 단서로 활약하기도 하죠. 음악에서 소설을 발견하는 일은 우리의 서사에서 음악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의 배경이 되기도, 나를 대변하고 취향을 드러나게 하는 것도 음악이니까요.
디제이는 각기 다른 음악들의 BPM을 맞추고 매시업(Mashup)해 새롭게 음악을 혼합하고 재구성합니다. 저는 주제에 맞춰 문학과 음악을 믹싱하는 작업을 해보려고 합니다. 글자를 빙글빙글 돌려가면서요. 고개를 까닥이며 읽어주셔도 좋겠네요. 지금부터 플레이를 시작합니다.
소설의 영감을 준 두 노래 '화이트 호스'
강화길 소설집의 제목이자 표제작인 <화이트 호스>는 소설가가 주인공입니다. 좋아하는 작가 ‘이선아’가 실종된 고택에서 칩거하는 작가. 그녀가 장편을 쓰면서 겪는 기묘한 사건을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유령처럼 새벽에만 들리는 초인종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화장실에서 벽을 뚫어대는 관리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동경의 대상인 이선아는 어디로 간걸까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궁금증은 커지고 긴장감은 고조됩니다. 당장이라도 시체 하나쯤 튀어나올 듯한 고택 스릴러, 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중요한 열쇠는 테일러 스위프트(Talor Swift)의 ‘White Horse’와 밥 딜런(Bob Dylan)의 ‘Absolutely Sweet Marie’에 있습니다. 두 노래 모두 소설의 제목처럼 ‘화이트 호스’가 등장하죠.
테일러 스위프트, 밥 딜런의 공통점을 하나 더 찾아보면 1960년대와 2020년대 음악씬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아이콘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노래들은 두 뮤지션의 초기 곡으로 컨트리 음악에 뿌리를 둔다는 것도 비슷하죠. 많은 노래가 그러하듯 두 곡 모두 표면적으로는 연인과 이별 후의 심경을 노래합니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White Horse’는 “나는 공주가 아니고, 이건 동화가 아니란다. 나는 너의 화이트 호스가 필요없단다.”라며 직접적으로 백마 탄 왕자를 거부합니다.
밥 딜런의 가사는 조금 더 함축적입니다. 사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도 그의 노랫말이 이렇게 정답도 오답도 없이 무한하게 열려있는 까닭이죠. 오죽하면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그의 가사를 연구합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Absolutely Sweet Marie’ 가사도 해석이 분분합니다. 이 곡에 나오는 '6마리의 화이트 호스'는 ‘부’를 상징한다는 의견부터 ‘헤로인’을 비유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노래의 속뜻을 나름대로 해석해 올리는 ‘[songmeanings.com](http://songmeanings.com/)’ 사이트에는 꽤 재밌는 재밌는 가설이 있습니다. 아이디 ‘Fencing’은 이 노래가 작가의 슬럼프에 대해 노래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노래에서 화이트 호스는 ‘영감’을 뜻하고,마리는 ‘뮤즈’를 의미한다고요. “내가 너를 필요로 할 때 (곡이 써지지 않을때) 너는 어디에 있니?” 라는 푸념이라는 것이죠. 강화길 작가도 밥 딜런의 곡에 나오는 화이트 호스를 하늘에서 내려온 영적 존재, 혹은 구원이나 선물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테일러 스위프트와 밥 딜런 두 음악가가 화이트 호스의 의미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는 것에 사로잡혀 이 소설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이죠. 작가는 잠들기 전에도, 일을 하다가도,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열렬하게 이 노래들을 들으면서 작업에 임했다고 합니다.
작가의 리얼 현실 공포는 '라이터스 블락'
사실 이 소설은 지독한 ‘라이터스 블락(Writer's Block)’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고택에 칩거하는 이유가 ‘글이 써지지 않아서’니까요. 라이터 블락은 심리적 요인으로 글을 쓰지 못하는, 그러니까 작가들이 쓸 내용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애를 먹는 상황을 말합니다.
막다른 벽앞에 서있는데, 저기 보세요. ‘데드라인(Deadline)’이 바로 따라붙습니다. 한 손엔 낫을 들고 뒤쫓는 사신처럼 말이죠. 등골은 서늘하고 숨이 턱턱 막힙니다. 입맛도 없고 잠도 잘 오지 않습니다. 1초 1분이 무겁고, 세상은 무채색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창작의 고통을 아예 음악 소재로, 랩으로 풀어놓은 이도 있습니다. 이센스의 ‘라이터스 블락(Writer`s Block)’을 들어봅시다.
괜히 조바심에 어제 쓰다만
거 뒤져봐도 하나같이 구린 가사
버린 이유가 있네 그냥 나갈까?
뭐라도 해볼라고 꺼낸 펜으론
줄만 수십개 그었네 계속.
집중안돼
가만히 앉아있길 몇시간째.
아까 다 비운 맥주캔 다 핀 담배.
새벽이 오고 이젠 잠까지 참네
그래도 이게 투잡뛰는거 보다 훨씬 낫네
머리가 아파오지만 끝내 놓지않고 집에 들어 가기가
내키지 않아 아직 내가 못 꺼내놓은게 있어
그것만 찾으면 가짜와 내가 구분 될 수 있어.
노래하는 법 다 까먹어버린 걔는
거래하는 법을 배웠네 그게 여기서 오래하는 법이라며 날 가르치네
첫번째 나의 동기는 제일 잘하는 것 그거 말곤 없었는데.
이제는 그냥 이 과정에 남는게 있기를 바랄 뿐이고
하루 하루 조금씩 움직여. I’m still in my studio.
이 곡은 이센스가 홀로서기를 한 1집 <The Anecdote(2015)>에 수록된 곡입니다. 제목 자체가 ‘라이터스 블락’이에요. 그는 이 벽을 정면으로 부수고 나갔고, 이 앨범은 2010년대 명반으로 손꼽힙니다. 강화길 또한 문단에서 큰 주목을 받는 작가 중 하나입니다. 그녀는 여성만이 느끼는 불안과 불편을 긴장도 있는 이야기로 그려 ‘강화길표 스릴러’라는 고유한 수식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런 작가도 소설 <화이트 호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누군가는 좋은 소설을 쓰고도 혹평을 받았고, 누군가는 아예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잘 쓴다고 해서 모두 소설가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버티다못해 사라지는 작가들도 수두룩 했다. (중략)
문제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다니는 건 좋았는데, 가끔 내가 진짜로 그런 사유를 추구하는 작가라는 생각에 휘말릴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혼자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시켜놓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였다. 예술은 고결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작품이 훌륭할 때 그 작가도 함께 고결해지는 것인가. 고결함은 읽어낼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인가. 에스프레소를 다 마시고 나면 위가 쓰렸고, 그런 나날들이 이어지면서 점차 소설을 쓰기가 어려워졌다."
라이터스 블락을 극복하는 가장 작가다운 방법
저 또한 ‘라이터스 블락’과 종종 마주합니다. 그럴 때면 컴퓨터 화‘면’이나 종이‘면’이 참으로 견고하고 차갑게 느껴집니다. 가로 막혀서 앞으로 나갈 수 없으니, 자꾸만 자신의 안을 들쑤시곤 하죠. 자괴감과 불안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잘하려는 마음’이더군요. ‘구린 내가 싫다’는 마음이 자꾸 발목을 잡습니다. 가끔은 노트북을 마주하지도 못할 정도로 무기력하고 움츠려듭니다.
2023년 가장 많이 들었던 앨범은 빈지노의 <NOWITZI>였습니다. 2016년 정규 1집 <12>를 내고 군입대를 앞둔 그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요. 저는 그에게 “빈지노씨도 슬럼프에 빠지나요?”하고 다소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전 매일 매일 그리고 지금도 슬럼프에요.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싶어 우울하고 힘이 들죠.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건 스스로의 기준과 눈높이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의미에요. 그래서 이젠 슬럼프가 와도 비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또 한층 기준이 높아지는 구나 생각하죠 (대중음악웹진 이즘)”
그리고 8년 후 2집 <NOWITZI>가 발매됐고요. 앨범 수록곡 ‘침대에서/막걸리’에도 슬럼프의 상황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새가 되고 싶어 모기가
더 올라가 보자 벌이야
성가신 모기 summer night 매미
머릿 속 처넣었나 너무 시끌
침대 끝에서
베개는 굳은살이 됐어
이불은 날 억누르고 있어
evil은 내 머릿속에 있어
빠져드네 또 블랙홀에
목 빠지게 headlock거네
어떻게 해 나 이거 못 풀겠어
아직도 나 흰 벨트네
빈지노는 2집과 관련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는데 그냥 100곡 일단 만들고, 거기서 다시 생각해보자 싶어서 혼자서 계속 곡을 쌓았어요 (HIPHOPPLAYA)” 아티스트가 라이터스 블락을 넘는 방법은 결국 ‘계속 써나가는 것’이겠죠. 소설 ‘화이트 호스’의 주인공도 결말에 이렇게 씁니다. “쓰다 보면 또 쓰게 되겠지”하고요. ‘라이터스 블락’을 극복하고 세상에 나온 작품들에 용기를 얻어 저도 간절하고 간곡한 마음으로 두드려봅니다. 제 앞에 놓인 하얀 벽을 타다다닥 하고 말이죠.
테일러 스위프트(Talor Swift) ‘White Horse’
밥 딜런(Bob Dylan) ‘Absolutely Sweet Marie’
이센스 ‘라이터스 블락(Writer`s Block)’
빈지노 ‘침대에서/막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