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소닉의 조직 문화
파나소닉은 내가 디지털 TV를 맡게 되면서 점차 알게 된 회사다. 창업주인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회사를 창업해 대기업으로 일군,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의 정주영 회장과 비교되기도 한다. 파나소닉은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일본 가전시장에서 소니 다음가는 기업이었다. 어떻게 하면 소니를 이길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하는 2등이었다. LG와 비슷한 면이 있는 회사였다. 절치부심 1등을 노리는 이런 파나소닉에게 2000년대 초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PDP 기술의 등장이다. 당시 CEO였던 오츠보 사장은 매우 공격적으로 PDP 사업을 추진했다. 때를 같이해서 LG와 삼성도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과 일본의 전자 업체들이 좋은 관계였던 시절이라 고위 경영진끼리 자주 만나곤 했다.
그전까진 50인치, 60인치 같은 대형 TV는 프로젝션 TV 밖에 없었다. 이젠 모두 사라졌지만 당시엔 인기가 높았고 미국에서는 TV 시장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부피가 커서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설치도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PDP가 개발됐다. 대형 TV를 벽에 걸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이다. 당시로선 혁신적인 TV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 무렵 LCD는 15인치 정도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대형 평면 TV는 PDP가 유일했다. 그래서 기업들은 PDP가 차세대 기술이자 미래형 TV라 믿고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PDP 기술에서 가장 앞선 회사가 바로 파나소닉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소니는 PDP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소니는 이미 브라운관 사업이 너무 잘되고 있었고, CEO가 TV보다는 영화와 게임 같은 콘텐츠 산업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TV의 신기술에는 비중을 크게 두지 않았다. 하지만 파나소닉은 달랐다. PDP 기술로 세계 TV 시장을 석권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파나소닉의 1등 화질
파나소닉의 CEO는 LG의 최고 경영진과 만난 자리에서 이런 구상을 밝혔다. 그리고 그의 발언은 LG전자 내부에서 큰 이슈가 되었다. 파나소닉이 PDP로 TV 시장을 석권하려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전략을 논의했다. PDP는 출시 이후 늘 파나소닉의 화질과 비교당했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는 파나소닉에 비해 화질이 떨어진다는 클레임이 많았다. 화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명암 비, 즉 검은색의 표현이다. 검은색이 제대로 검게 나와야 화질이 좋아 보인다. 우리의 PDP는 파나소닉 제품에 비해 검은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TV는 매장에서 바로 영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소비자가 쉽게 제품을 비교할 수 있다. 같은 방송이 켜진 여러 TV 중에서 화질과 가성비가 가장 좋은 제품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 시장에서 대형 TV를 판매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매장에서 화질을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몰랐다. 그 후 판매 경험을 통해 그 중요성을 알았고, 그때부터 매년 초에 신제품이 나오면 타사 제품들과 비교해서 보여주는 시연회를 열었다. 현장에는 미국 법인도 참석해서 문제점을 지적해줬는데 안타깝게도 매년 파나소닉의 화질에 대한 평가가 우리 것보다 좋았다. 그때마다 기술력의 차이를 절감했다. 파나소닉이 화질에서 앞서는 비결이 궁금했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그 이유가 되는 여러 기술력을 알아냈다.
LCD의 대형화, PDP의 몰락
그렇게 파나소닉을 따라잡는 데 몰두하는 사이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변수가 발생했다. LCD의 대형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한 것이다. 40인치와 50인치 LCD가 예상보다 빨리 시장에 나오면서 PDP의 화질을 개선하려는 우리 노력은 이제 소용이 없게 돼 버렸다. 매장에서 LCD와 PDP를 비교해보면 화질 차이가 확연했기 때문이다. PDP보다 밝은 LCD가 시청자의 눈에 화질이 더 좋아 보였다. 그 후 고객에게도 기업에게도 LCD가 우선이 되었고 PDP는 후순위로 밀려났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LG 내에서 PDP와 LCD 간에 경쟁구도가 이어졌다. PDP는 LG전자가 투자했고 LCD는 LG디스플레이가 투자를 했었다. LG전자는 구미에 대규모 공장도 세우고 조 단위 자금을 쏟아 넣으며 매우 공격적으로 PDP 사업을 추진했다. PDP를 팔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하지만 시장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TV 시장의 주도권이 LCD로 넘어가고 있었다. 어떤 투자와 노력도 시장의 흐름을 되돌릴 순 없었다. 결국 PDP는 대규모 적자를 냈고 CEO도 교체되고 말았다. 파나소닉도 마찬가지였다. PDP로 TV 시장을 석권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LCD가 시장을 주도하게 되자 대규모 적자를 볼 수밖에 없었다. 2000년대 말에는 파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렇게 PDP 시대가 막을 내린 뒤에도 나는 디지털 TV용 반도체 칩 관련 사업을 파나소닉과 함께 했었다. LG는 화질이 좋은 파나소닉 TV의 칩을 사용해 제품의 화질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들도 자체 칩을 외부에 팔려는 의사가 있었기 때문에 오사카 본사를 자주 오가며 일을 진행했다.
그때 내가 본 파나소닉은 상하관계와 연공서열이 대단히 강한 회사였다. 오사카에서 회의 후 식사자리를 가졌는데 파나소닉의 실무 책임자들은 상사인 임원에 대한 의전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임원을 상전 모시듯 했다. 내 눈에는 그들의 조직 문화가 상당히 경직돼 보였다. 이런 모습은 우리도 적지 않게 있지만 파나소닉은 더 심했다. 나야 뭐 깍듯이 접대를 잘 받으니 나쁠 건 없었지만 이런 문화를 가진 회사가 앞으로 잘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걱정이 남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대기업들도 비슷한 문화를 이어왔다. 하지만 이제 수직적이고 관료적인 기업은 더 이상 젊은이들에겐 맞지 않는 조직이 돼 버렸다. 짜인 틀에 따라서 움직여야 하고 거기에서 튀는 행동을 하면 버티기 어려워지는 회사. 이런 곳에서는 요즘의 젊은 인재들이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입사할 땐 자기만의 개성과 재능을 지녔던 돌이 기업의 경직된 틀 안에서 깎이고 달아져 날카로움이 없는 비슷비슷한 모양의 돌이 되고 만다.
반면 구글과 일할 땐 전혀 다른 모습을 봤다. 우리처럼 상하관계가 강하지 않은 수평적인 조직이다. 젊은 인재들이 자기 의사를 충분히 표현하며 맘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구글에서 일하는 한국인 엔지니어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구글을 이길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조직문화라고.
그 기업의 문화는 직원 간의 호칭에서부터 드러난다. 우리는 회사에서 이름 대신 직위나 직책으로 서로를 부른다. 김 과장, 이 부장, 박 전무... 연공서열이 들어가 있는 호칭이다. 카카오와 같은 일부 IT회사들은 영문 이름으로 호칭을 쓰기도 하는데 이런 시도는 매우 좋다고 본다. 수평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혁신을 위해서는 낡은 위계질서를 버리고 수평적인 조직이 되어야 한다.
조직보다 개인 – 달라지는 기업들
실리콘밸리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이 회사를 옮겨가며 승진도 하고 연봉을 높이기 때문에 회사 내 인적관계보다는 자신의 실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찌 보면 조직보다 개인이 중요한 문화다. 미국에서도 전통 있는 대기업은 그렇지 않은 곳도 물론 여전히 많다. 오래된, 전통 있는 회사일수록 관료화되기가 쉽다.
에어비앤비 설립자 브라이언 체스키의 창업동기도 이러한 대기업의 문화에서 비롯됐다. 그를 포함한 친구 3명은 모두 보스턴에서 학교를 마치고 대기업에 입사했다. 하지만 굳게 짜여 있는 틀 안에서 일하다 보니 새롭고 창의적인 일을 해볼 수가 없었다. 그저 주어진 일만 하게 되었다. 미국의 많은 대기업도 관료화되어 젊은 인재들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회사를 그만두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창업하게 된다. 초기에는 예상 못한 비용이 많이 들고 투자받기도 어려워 고전해야만 했다. 사정이 어려워져 회사의 운영비용을 카드 돌려 막기로 감당하기도 했다. 6개월 정도는 잠을 잘 수도 없었고 몸무게가 10Kg 이상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마지막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자기들이 사는 아파트를 공유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샌프란시스코는 관광 및 전시회 등 이벤트가 많은 도시다. 그래서 방을 구하기가 어렵고 호텔비도 비싸서 숙박에 불편을 겪곤 한다. 그들은 이런 점에 착안해서 아파트의 방을 잠시 대여해주고 돈을 벌어서 운영비를 충당했다. 그 후 임시방편이던 숙소 대여가 생각보다 잘 되자 아파트 공유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사업화했고 지금의 에어비앤비가 되었다. 벼랑 끝 위기에서 버티고 버티다 만들어낸 비즈니스 모델인 것이다. 이런 게 바로 바퀴벌레 정신이라고 얘기한다.
파나소닉은 PDP 사업 실패와 경직된 조직문화로 인해서 결국 2000년대 말 파산 직전까지 몰리게 된다. 하지만 구조조정을 통해서 극적으로 회생했다. 이 과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람이 파나소닉 CEO 쯔가 사장이다. 2016년 가을 베를린에서 열리는 IFA 전시회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올레드 TV를 시연해 보였다. 파나소닉 TV와 오디오 엔지니어 출신인 그는 AV 전문가였다. 우리가 OLED TV를 소개하자 기존 LCD TV와 어떻게 차별화할지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해왔다. OLED TV의 핵심 문제를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당시 OLED TV는 시장에서 차별화에 실패하며 고전 중이었다. 우리는 롤러블 TV도 만들어보고 두께도 줄여보고 화질로도 하려고 해 봤지만 효과가 크지 않았다. 쯔가 CEO는 투명 OLED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보였다. 투명 OLED TV를 가구에 적용해서 프리미엄 빌트인 제품으로 팔아볼 구상을 했던 것 같다. 그에겐 사업의 미래를 보는 혜안이 있었다.
그가 CEO가 된 후 파나소닉은 사업 대상을 일반 소비자에서 기업으로 전환했다. 예를 들면 자사 제품을 도요타와 같은 자동차 회사에 직접 자동차 부품으로 납품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선 시도였다. 또한 전기차 시대의 도래를 예측하고 테슬라의 배터리 공장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그 후 도요타로 투자를 넓힘으로써 자동차 부품업체로 성공적인 전환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