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에 관한 에세이
날씨가 추워지면 나는 코피가 나요. 코에서 느껴지는 간질거리는 느낌(아마도 코피가 내려오는) 때문에 헐레벌떡 이불을 걷어차고 화장실로 갑니다. 휴지를 뜯어내서 겨우 코를 막으려는 찰나 주륵하고 피가 흐르죠. 그럴때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이불은 버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아침에 일어나는 기숙사 방은 추워요. 한기가 돌아요. 아직 난방을 켜주지 않네요. 눈을 뜨면 나는 이불을 돌돌 말고 있죠. 애벌레 같은 그 뭉치 속에서 나는 최대한 체온을 보존하려 팔짱을 끼고 무릎을 접고 있곤 하죠. 그렇게 추우면 옷을 입고 자면 되지 않냐고요? 자기 전에는 항상 그런 생각을 못하죠. 이것도 일종의 자만심일까요? 자만심과 후회의 고리는 매일 밤 반복되어 저는 속옷 차림으로 눈을 감고 눈을 뜨면 애벌레가 되어있죠. 물론 진짜 애벌레라면 코피가 흐를까 작은 감각에도 벌떡 화장실로 뛰쳐나가는 애벌레는 조금 별난 개체겠죠.
주말 아침은 하느님의 공언 아래 뒹굴거리는 시간입니다. 주말 아침에도 바쁜 사람들은 정말축복 받지 못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군요. 이 시간에는 잠을 늘어지게 자거나, 일찍 깬다고 해도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져버리기에,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이불 회귀의 법칙이 공기 중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말 아침에 내가 이 세상에서 붕 뜬 기분, 마치 이 세상의 진리를 관조하는 듯한 기묘한 거리감에 사로잡히죠. 쉽게 말해서 주말 아침에 일찍 일어난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잠들어 있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동면에서 홀로 일찍 깨어난 곰처럼 세상과 자신의 타이밍이 어긋났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죠. 그런 깨달음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감각의 영역이라서 우리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본능적인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저의 어릴 적의 경우(어릴 적에는 멋모르고 일찍 일어납니다) tv를 틀었어요. 아마도 당시 공중파 방송국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꿰뚫고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주말 아침 tv에서는 애니메이션을 틀어주곤 했죠. 그때 라이언킹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보다는 나이가 들고 이렇게 주말 아침의 망중한을 맞을 때 저는 이제 tv를 보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현대 문명의 미디어에서 멀리 떨어질 필요를 느꼈다거나, tv는 바보상자라거나 이런 계몽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간단한 이야기죠. 기숙사에는 tv가 없을 뿐더러 근본적으로 이제 주말 아침에 디즈니 만화를 틀어주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하릴없어진 저는 노트북을 켭니다. 하지만 닭으로는 영원히 꿩을 대체할 수 없죠. 그 무엇도 그 시절 디즈니, 티몬과 품바를 대체할 수 없을 겁니다. 노트북을 켜는 이유는 관성입니다. 생활의 관성, 주말 아침 망중한에 작용하는 물리 법칙은 오직 관성뿐입니다. 바쁘게 살아온 주중의 속도를 몸이 기억하는 거죠. 그리고 고작 한다는 게 노트북을 여는 겁니다. 무엇에 대한 것인지도 모르는 희미한 강박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아무 의미 없는 클릭질을 시작하죠. 그런 주말 아침들을 회상해보면, 기억나는 게 도무지 하나도 없습니다. 디즈니가 제게 추억을 주었다면 노트북은 추억을 먹습니다. 정말로 제게 그 시간대는 공백 그 자체에요. 아쉬운 일입니다.
그나마 이번 주말의 아침은 나았습니다. 저는 이 시간을 기억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노트북을 만지다가 정보의 쓰레기 창고 같은 인터넷을 나와서 예전에 썼던 글을 찾아봤거든요. 제가 뭐 글을 오랫동안 쓴 것은 아니지만, 또 제가 지금 글을 잘 쓰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저는 예전의 글들에서 예전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웃긴소리죠? 예전의 글에서 예전의 흔적을 찾다니. 그 말은 지금 나의 흔적과 예전 나의 흔적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맞아요. 우린 너무 다르죠. 다시 보니까 너무 다르더라고요.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가 글쓰기에서 공유하고 있는 지점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때에도 그렇고 지금에도 그렇고 여전히 책을 읽고 남기는 종류의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는 점. 그것뿐이에요. 그래서 저는 제가 지금 무슨 글을 썼나 살펴봤습니다. 달랐어요. 많은 것이 달랐어요. 더 놀라운 점은 지금보다 옛날의 글이 훨씬 좋다는 겁니다. 아마 옛날의 내가 지금의 글을 본다면 정말 잘 쓴다고 할 겁니다. 그런데 지금의 내가 옛날의 나를 칭찬하는 상황이라니, 이 무슨 아이러니입니까.
‘좋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이 필요하죠. 그 기준이 변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아이러니는 세상에서 허용되지 않아요. 기준이 변했어요. 아이러니는 기준 따라서 가는 거죠. 시대 따라 유행이 도는 것처럼, 친구가 바뀌면 세계가 바뀌는 것처럼. 예전의 나는 그저 좋은 문장을 쓰면 그게 잘 쓰는 줄 알았나봐요. 확신할 수는 없어요. 제가 어떻게 그 친구 마음을 다 알겠어요. 대신 지금 나의 마음은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어요. 지금 나는 이상한 글을 쓰죠. 아니 책을 이상하게 읽어요. 이상한 독서를 해요. 지금 나는 독자로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작가로서 책을 읽죠. 책을 읽고 나오는 결과물에는 감상이 담겨 있어야 하죠. 누군가 자기 책을 읽고 감상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 그게 책을 쓰는 작가의 본심이자 의도 아니겠어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작가들의 마음을 완벽히 저버리고 있어요. 저는 작가로서 독후감을 쓰죠. 쪼개고 부수고 기법을 연구하고 장치로서 무슨 역할을 했는지, 어떤 점에서 이야기를 원활하게 하는지, 이 플롯은 어떤 종류의 플롯인지, 내러티브를 배껴 쓸 수 있을지, 책을 읽는 순수한 즐거움? 제가 책을 읽고 있을 무렵에는 그런 게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글에는 그런 흔적이 없어요. 옛날 글에는 있죠. 지금은 없어요. 지금은 없다고요.
더 웃긴 게 따로 있어요. 위의 문장을 다시 보죠. ‘저는 모든 책을 잠재적 라이벌의 성과로 생각하게 되었어요.’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네요. 라이벌이라는 게 뭐죠? ‘같은 목적을 가졌거나 같은 분야에서 일하면서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루는 맞수.’라고 국어사전이 그럽니다. 우린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죠. 더 좋은 글을 남기는 것. 같은 분야에서도 일하고 있죠. 모두 쓰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맞수인가요? 어떻게 무라카미 하루키와 제가 맞수죠? 좋아요. 하루키는 너무 강력한 적이니까 살짝 수준을 낮춰 볼게요. 김영하 작가와 제가 맞수인가요? 한 번 더 낮춰보죠. 이번에 문학동네 젊은 작가 수상집에 작품이 실린 임현 작가와 제가 맞수인가요? 그것도 아닌 거 같은데. 저의 맞수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옛날의 나와 맞수질을 하고 있는 한심한 주말 아침이네요. 옛날의 내가 쓴 글은 제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쥐뿔도 없는 게 무슨 그런 글을 쓰니. 다시 즐겁게 책을 읽던 시절로 돌아와. 니가 할 일은 그거야. 그게 싫으면 그냥 조용히 글만 써. 오만할 데 오만하란 말이야. 근거가 없는 객기만큼 꼴 사나운 것도 없단다. 그렇지 않니?
마침 코피가 흘러서 손으로 막았습니다. 큰일 날 뻔 했어요. 하얀 옷을 입고 있거든요. 내 몸의 신체적인 순환 역시도 일종의 관성입니다. 나의 관성은 추운 계절이 다가오면 아침에 코피가 난다는 거에요. 그렇지만 관성이 모든 것을 고정하는 힘은 아니죠. 관성은 너무 빠른 변화에 천천히 적응하라는 하느님의 배려일지도 모르죠. 우리는 매 순간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겠죠. 새로운 형태로 생각하는 방법을 익히겠죠. 제가 조금씩 티몬과 품바를 추억으로 남기듯이, 노트북을 켜고 옛날 글들을 저장해놓듯이, 언젠가는 코피가 멈출 날이 오듯이. 작가의글쓰기가 실패한다고 독자의 글쓰기가 돌아오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관성을 거부하는 거에요. 관성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죠. 다시 추운 날이 온다고 그게 과거의 추운 날을 의미하는 게 아닌 것처럼요. 좋든 싫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어요.
매주 찾아오는 주말 아침의 망중한은 나를 가끔씩 이런 상념과 넋두리에 빠뜨릴 거에요. 저는 알고 있죠. 또 이불을 둘둘 말아서 한참을 뒹굴대다가 더 이상 이 짓을 하다가는 도저히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될 시점이 옵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주섬주섬 뭘 하겠죠. tv를 보든, 노트북을 끄적거리든, 또 미래에는 무슨 짓을 할까요? 솔직히 말할게요. 주말 아침에는 조금 게으른 게 좋아요. 작가니 독자니 글쓰기니 다 치우고,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도 치우고, 관성도 치우고, 코피도 치우고(치워졌으면 좋겠다) 어려운 생각일랑 다 치우고 이불을 둘둘 맙시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고백할게요. 저는 아마 계속 그러고 있지 못할 거에요. 어느 순간 이불을 걷어내고 또 이상한 짓이나 하고 있겠죠. 하느님이 그러라고 주신 주말 아침이 아닌데도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