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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Apr 12. 2020

<일의 기쁨과 슬픔> 마음을 연명케 하는 구호품



한동안 한국문학과 척을 지고 살았다.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한 게 없다. 문학은 취업과 목돈 마련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학은 나를 괴롭히는 상사를, 못된 조직 문화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건 정치의 영역이다.) 문학은 나라 돌아가는 꼴에도 손대지 못하고, 그냥 문학은 읽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글뭉치일 뿐이다. (그냥 문학은 문학일 뿐이다.) 문학이 주는 재미를 위해 여유 시간을 시절은 이제 끝났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문학은 내 유년기의 상징이며, 이제 내게 그 시절은 없다. 그게 내 결론이다.


그런데 올해 들어 내게 문학이 쓸모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 올 초에 지인의 주선으로 소개팅 자리에 나갔다. 거기서 만난 분과 한국 문학을 두고 한참 재미있게 얘기했다. 문학이 없었다면 퍽 불편한 자리가 됐을 것이다(최근 문학이 준 가장 큰 도움). 물론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을 2, 3년 간 끊고 있었던 터라 가장 최근의 정세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걸 간파했던 건지, 상대분은 내게 꼭 읽어야 한다며 책 한 권을 추천해줬다. <일의 기쁨과 슬픔>이 그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꼭 읽겠다고 다짐했지만 읽지는 않았다. 그 만남 이후에 다시 문학이 인생에 도움이 될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론사 입사를 위해 준비생들이 모여 있는 사이트를 한참 기웃거리던 때였다. 거기서 현직 기자가 입사를 위한 세미나를 한다고 해 참석했다. 그 기자는 시대를 알기 위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며 리스트를 화면에 띄웠다. 그 안에 다시 <일의 기쁨과 슬픔>이 있었다. 다른 책도 있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외에는 모두 문학이 아니었으며, 나는 그 중 몇 권을 읽기도 했다. 예컨대 <불평등의 세대>와 같은 책들은 내게 엄청난 인사이트를 줬다. 그러나 여전히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지는 않았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신문을 정리하고 책(문학이 아닌)을 읽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후배한테 연락이 왔다. 자기가 감명 깊게 읽어서 내가 꼭 한 번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 있다는 것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이었다. 나는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꼭 읽어보겠다고 답했다. 문학의 쓸모를 떠나, 3번의 권유를 건네뛰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 길로 홍익문고에서 <일의 기쁨과 슬픔>을 사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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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8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8편의 소설은 모두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낑낑대는 20, 30대의 이야기다. <잘 살겠습니다>는 결혼을 앞둔 직장인 여성,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는 스타트업 막내 사원,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은 첫 출근하는 직장인, <다소 낮음>은 홍대에서 활동하는 가난한 인디 음악인, <새벽의 방문자들>에는 포털 댓글 모니터링 업무를 하며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는 여성 직장인, <도움의 손길>에서는 드디어 신도시 아파트를 사게 된 젊은 직장인 기혼 여성, <탐페레 공항>에는 다큐멘터리 pd가 되고 싶었으나 결국 재무회계팀에서 일하게 된 직장인까지. 모두 젊은 우리네 모습들이다. 어딘가 위축되고 주눅들어 있는 모습 그대로.


비범한 인물이 없다. 그렇기에 기상천외한 이야기도 없다. 영웅과 그 숙적의 피 튀기는 혈투도 없고 가치관끼리의 충돌도 없다. 그럼에도 모든 이야기는 ‘빌런’이 등장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그들을 가로막고 괴롭히는 빌런이 있다. 이 일상의 빌런은 정말 여러 차원에서 등장한다. 세상 사는 원리를 몰라 청첩장 예절 하나 지키지 못하는 입사동기 빛나(<잘 살겠습니다>), 자기 인스타보다 빨리 공연 공고를 올렸다고 월급을 전부 포인트로 주라고 명령한 회장(<일의 기쁨과 슬픔>), 오피스텔 성매매를 위해 새벽에 초인종을 누르는 남자들(<새벽의 방문자들>), 전 직장 동료와 하룻밤 자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는 남성(<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사적 영역에 염치 없이 들어와 감 놔라 배 놔라하는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도움의 손길>).


도대체 세상에는 빌런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빌런이 꼭 타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심지어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름날 출근길’이 빌런으로 등장한다. 버스 에이컨으로 등에 땀이 나 흠뿍 젖어버린 셔츠를 겨우 말리는 그 기분, 그 진빠지는 느낌은 나도 알고 있다. 따지고 보면 출근길이야말로 직장인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꾸준한 빌런인 것이다. 주인공은 시원한 택시 안에서 겨우 기분을 회복한다. 그러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쪽쪽 빨아먹는 쾌적한 출근길은 200만원을 겨우 월급으로 수령하는 초년생에게는 사치다. 매번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니까.


더운 출근길이라는 사물로 변한 빌런은 <다소 낮음>에 가서 그 정체가 모호해지는 지경에 이른다. 주인공은 여전히 CD단위로 음악을 듣고, 적은 관객들과 소통하는 공연이 좋다. 그에게 자본주의적 성공의 기회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주인공은 100만 조회수를 기록한 냉장고송을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유명 기획자의 제안도 다 거절하고 그는 다시 골방에 들어가 곡을 쓴다. 그리고 그는 연인도, 기회도, 키우던 개도 잃어버린 채 냉장고 앞에 망연자실한다. 누가 빌런인가? 2만7149번의 음원 재생으로 3만원을 입금해주는 시스템? 순간적 유행만 원하고 진정한 음악은 거부하는 대중? 아님 자본주의 시스템에 최소한이라도 적응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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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즈음에서 나는 이런 의문에 빠졌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30쪽)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다소 낮음>에서 장우를 망연자실한 처지로 몰았던 이는 자신이었다. ‘음악에 타협은 없다’는 신념으로 모든 성공의 기회를 걷어찬 장우는 누구를 탓해야 하나? 이 세상 질서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 빌런으로 떠오르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장우의 죄목은 자본주의 질서를 체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키우는 강아지의 병을 고칠 돈조차도 모으지 못하는 꼴불견 신세로 전락한다.


자본주의 질서를 체득한 <잘 살겠습니다>의 주인공은 어떨까? 굳이 빛나에게 25000원(얻어먹는 밥값)-13000원(낸 밥값)=12000원에 맞춰서 결혼선물을 줘야한다고 우겼던 주인공은 남편에게 이상하게 보인다. 그 12000원짜리 선물을 받고도 감동하며 주인공을 안고 울었던 빛나의 얼빠진 순수와 이 지독한 계산이 정확히 대비된다. 그 계산적 태도를 인간적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빛나를 보며 주인공이 느끼는 당혹감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입사 직후 백오피스로 발령이 나 결국 결혼을 앞두고 남편과 연봉이 천 만원이 차이나게 된 이 사회의 여성으로서, 주인공은 ‘5만원을 주면 5만원을 받는’ 공정성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모든 인간관계는 ‘정확히 준 만큼 받는’ 관계로 좁아지게 된다. 그 밖에 존재하는 어떤 가치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인물은 자본주의 질서를 강제하는 가해자인가, 그 안에서 계산관계로만 사람을 인식하게 된 피해자인가. 빛나는 자본주의 예절을 모르는 무례한인가, 12000원짜리 결혼 선물을 받고도 감동할 수 있는 순수한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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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질문에 어느 하나로 답을 할 수 없다. 그만큼 우리네가 처해 있는 상황이 복잡하다는 뜻이다. 이 복잡함을 제대로 보여주는 게 마지막 작품인 <탐페레 공항>이다. 주인공은 경유지 핀란드에서 눈이 좋지 못한 노인을 만나 몇시간의 대화를 나눈다. 한국에 돌아와서 주인공은 그 노인이 보낸 사진과 편지를 받는다. 답장을 하겠다고 결심하지만 끝내 주인공은 답장을 하지 않는다 이 부분이 재미있다. 작가는 주인공이 답장을 ‘못’ 한 것처럼 묘사한다.


“마지막 학기 개강 첫날, 등굣길에 학생회관에 들러 편지지와 우표를 사고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노인에게 답장을 쓴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문 앞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려고 했다. 분명히 그런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첫날부터 일교시 강의에 지각하는 바람에 학생회관에 들르지 못했다. 둘째 날에는 수강신청할 때 졸업 필수 과목을 하나 빼먹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학적과에 전하하고, 메일을 보내고, 교수실에 찾아가 사정을 봐달라고 부탁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셋째 날에는 드디어 편지지를 사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우체통에 넣는 것보다는 우체국에 직접 가서 부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려면 네시 반 이전에 가야 하니 또 다음날로 미루게 되었다.


결국, 나는 학기 내내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주인공은 답장을 못 한 걸까, 안 한 걸까. 이후 주인공은 학자금 대출을 갚아 나가는 와중에 pd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달린다. 외주제작 업체에서 최저임금만도 못한 돈을 받고 혹사당한다. 결국 주인공은 pd의 꿈을 버리고 한 기업의 재무회계팀에서 일하게 된다. 해당 기업의 정규직 혜택인 의료지원금으로 아버지 수술까지 무사히 마친다. 전방위적으로 닥치는 생계의 압력에 낭만을 포기하게 되는 건 우리 시대 모든 직장인이 공통적이다. 이 같은 사회적 압박에 주인공은 지쳐 낭만을 잃게 된다. 그래서 답장을 보내지 못한 걸까? 아니면 이를 핑계로 답장을 보내지 않은 것일까?


노인에게 답장을 보내는 일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PD가 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인과 연락이 아버지의 병을 고쳐줄 수도 없고 학자금을 갚아줄 수도 없으며 학점을 올려주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쓸모 없는 행동이다. 주인공은 ‘쓸모 있는 행동’만 해도 하루가 가득차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인공의 모든 행동은 ‘쓸모’를 기준으로 편집된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노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던 일을 없었던 일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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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세상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질서가 있다. 우리는 고통스럽게 그 질서를 내면화한다. 동일한 일을 함에도 성별 탓에 동일한 임금을 받지 못하게 하는 질서가 있다. <잘 살겠습니다>의 주인공은 이 질서의 폭력성을 의식하면서도 이에 맞게 자신을 변화시킨다. 이제 요만큼도 손해보지 않겠다며, ‘5만원을 주고 5만원을 받는’ 공정한 인간이 탄생한다. <탐페레 공항>의 주인공은 노인과 낭만적 만남을 마음에 간직하면서도, 그에게 답장을 보내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학사 관리, 학점, 학자금 대출 상환, 가족의 병, 취직 등의 시련에 pd의 꿈도 포기한다. 이제 낭만이니 다큐멘터리 pd니 하는 것들은 지나간 것들이요, 인생에 무쓸모한 것들이 된다. 아니 그렇게 규정하는 인간형이 태어난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 질서가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질서들은 스스로를 강요하면서 우리를 그에 적합한 인간형이 되도록 다듬는다. 처음에 우리는 자발적으로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포기한다. 두번째로 그것들을 ‘가치 없는 것’들로 여기게 된다. 마지막까지 가면 이제 그것들을 ‘나쁜 것’으로 여기게 된다. 낭만은 나쁜 것이 된다. 낭만을 나쁜 것이라 억지로 되뇌는 가슴은 멍든다. 낭만의 찌꺼기들이 앙금처럼 가슴 밑바닥 여기저기에 남게 되는데, 이게 때때로 사람을 후벼 파는 듯한 회한 속에 빠뜨리는 것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 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이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209쪽)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내면화하면서도 그에 맞서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는 숙명에 처했다. ‘원리’를 외면하고 낭만만을 추구하면 <다소 낮음>의 장우처럼 경제적으로 비참한 꼴을 면치 못한다. 낭만을 외면하고 ‘원리’만을 추구하면 언젠가 닥쳐올 회한의 물결을 감당하기 힘든 순간이 온다. 자기를 잃어가는 순간을 합리화해왔던 불쌍한 인간이 된다. ‘원리’에 경도돼, 인간적 면모는 이 사회에서 사냥 당하기 쉬운, 약한 면모일 뿐이라 치부하게 된다. 약점 잡히지 않기 위해 절대 인간적 틈을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는 불쌍한 인간이 탄생한다. 사람을 가치로, 수치로, 유용성으로, 교환관계로 파악하는 그런 인간 말이다. 우리가 비범한 인물이 아닌 이상 이 균형을 잡는 게 우리 모두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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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우리는 어떻게 대항해야 하나? 월급을 포인트로 주라고 지시하는 회장이나, 그걸 그대로 실현하는 조직에 맞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나(<일의 기쁨과 슬픔>).


“굴욕감에 침잠된 채로 밤을 지새웠고, 이미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되었다고.”


이 말도 안되는 폭력이 일어났을 때, 거북이알(닉네임)이 느꼈던 고통이 풍성하게 묘사돼 있다. 회사에 꽤나 애를 써서 성과를 인정받았던 거북이알은 존재가 부정당한 느낌을 받는다. 이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1. 언론에 알리거나 2. 회장을 고발한다. 3. 투사가 돼서 싸운다. 4. 조용히 이를 갈고 높은 자리에 올라 회장의 목을 딴다(이태원클라스). 이 중 평범한 직장인이 선택할 수 있는 선지는 없다. 그래서 거북이알은 “모든 것을 편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포인트도 돈”이라며 포인트를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찾는다. 중고품 거래 시 점심시간을 이용해 손해를 최소화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우울과 절망에 빠지는 햄릿과 같은 인물은 이제 우리 시대와 맞지 않는다. 우울과 절망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쓸모가 없다.’ 중요한 것은 생존이고 해결책이다. 그걸 찾았으면 실천하면 된다. 생각과 걱정이 꼬리를 무는 고뇌는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일의 슬픔을 지워줄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사무실 나서는 순간부터는 회사 일은 머릿속에서 딱 코드 뽑아두고 아름다운 생각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봐요”라는 거북이알의 말처럼, 주인공도 조성진 덕질과 월급날의 기쁨, 가끔 찾아오는 해외여행의 기회에 일의 슬픔을 지워낸다. 이게 우리가 살아내는 방식이다.


이게 바로 책 말미에서 평론가가 칭찬했던 ‘비대하지 않은 자아’의 본모습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재빨리 실천하며 문제가 해결됐거든 인생의 기쁨이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간다. 인아영 평론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정확한 이해, 생존과 생활에 대한 탁월한 감각, 삶의 질과 행복을 지키는 센스를 겸비한 장류진 소설의 산뜻하고 담백한 개인이야말로 오늘날 한국문학의 새로운 얼굴이다.”라고 평한다. 이 문장이 어떻게 들리는가? 인아영 평론가는 ‘담백한 개인’에 긍정적 시선을 보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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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전태일 열사의 투신을 보고 들으며 자란 세대에게는 아마 이해하기 힘든 태도일 것이다. 그들에게 불합리는 타파의 대상이었지 적응과 순응의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 어른들은 불합리에 진심으로 화를 냈으며 고통스러워 했다. 삶을 걸고 투쟁했고 연대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너머서까지 행동하려 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이 자기탓이라 여기고 그를 극복할 수 있다는 강력한 의지로 무장한 어른들은 ‘비대한 자아’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 이 비대한 자아가 이야기에 출발점이 될 수 없는 것이 맞다. 이 같은 자아는 이제 천연기념물보다 보기 어려워졌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정규분포가 ‘비대하지 않은 자아’임을 선언했다는 게 이 소설의 의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지향점에 관한 이야기라면 조금 다를 것이다. 우리는 비대하지 않은 자아를 지향해야 하나?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새벽의 방문자들>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오피스텔을 오피스텔 성매매 장소로 착각하고 새벽마다 초인종을 누르는 남자들 때문에 두려워한다. 주인공은 인터폰으로 보이는 그들의 얼굴, “별일 아니라고 주문을 거는 듯한 태연함, 남에게 들키지 싫은 일을 할 때의 부끄러움, 돌연 술이 확 깨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의 주저함, 그러면서도 어쨌든 곧 벌어지게 될 눈먼 섹스에 대한 설렘 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183쪽) 그 얼굴을 모조리 찍어서 남겨 둔다. 벽 한 쪽에 그들의 얼굴 사진을 붙여 놓고 밑에 간략한 특징을 적는다. M자 이마, 까무잡잡, 이런 식으로.


이 자아는 비대하지 않은 자아인가? 이 자아는 8편의 이야기 중에서는 가장 비대한 자아이고 가장 감정에 침잠한 자아이다. 그만큼 역동적인 자아이며 공격적이며, 세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바꾸고 싶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자아이다. 왜 월급을 포인트로 주라는 불합리한 명령(<일의 기쁨과 슬픔>)에는 이에 순응하고 생존할 방법을 찾으면서, 일반적 성착취 문화의 상징인 오피스텔 성매매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것일까. 후자가 더 질 나쁘고 위험한 것이어서? 전자는 건드리기엔 너무도 강력하고 강고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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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인터폰 뒤에서 이 못난 남성들의 표정을 조망하는 것만으로도 기존 권력관계를 전복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터폰을 방패로 하면 밖에서는 나를 볼 수 없지만, 안에서는 당신들을 볼 수 있다. 인아영 평론가의 말처럼, 이 ‘시선의 독점’이 훌륭한 정치적 무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월급을 포인트로 주라는 저 카드회사 회장님에게는 무슨 수로 이 같이 한 방 먹일 수 있을까? 평범한 직장인, 생계와 취미와 ‘일의 기쁨’을 위해서 월급을 받아야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방법은 없다. 진짜 고통을 선사하는 ‘높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삭이고 참고 합리화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그대로 살아가는 방법 외에는 없는 것이다.


인아영 평론가가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이라고 선언했던 이 ‘비대하지 않은 자아’는 조금 더 비대해질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성매매를 기다리는 남자들의 얼굴을 박제하는 실천적 힘이 회장님에게도 향했으면 한다. 일상의 적폐에 고통받는 모든 이들이 그만큼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가졌으면 한다. 일 잘 한다는 소리가 사내에 자자했음에도 남자 입사동기와 연봉이 천 만 원 넘게 차이나는 여성 직장인(<잘 살겠습니다>). 이 여성이 일상에서 스스로를 ‘다시 손해 보지 않는 철저한 계산적 인간’으로 훈육하는 만큼, 무엇이 그 질서를 만들었고 어떻게 그걸 극복할 것인지 고민하는 비대해진 자아가 되기를 바란다.


‘비대한 자아’는 오늘날 우리네 삶에서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다. 이를 위해서는 일상을 포기해야 하니까. 돈도 돈이지만, ‘일의 기쁨’을 포기해야 하니까. 좋아하는 연예인 덕질도 못할 것이고, 스포츠도 제대로 못 즐길 것이고, 동료, 지인, 친구들과의 아름다운 저녁식사도 못할 것이다. 인생의 즐거움을 포기할 가치가 ‘비대한 자아’에 있는가? 비대한 자아는 행복한 삶을 이뤄내는 데 크게 쓸모가 없고, 그건 지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탐페레 공항>에서 그랬던 것처럼. 쓸모 없는 삶을 선택한 사람은 깊은 가난 속에 빠질 확률이 높다. 사회적 멸시를 받는 경우가 많으며, 주변 사람 또한 그와 같은 투쟁의 삶 속으로 끌고 들어갈 확률이 높다.


이제 젊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비대한 자아를 거부한다. 그런 사람들은 연애시장, 결혼시장, 가족 내 압박, 직장 선택 등에서 외면당하고 도태된다. 이제 자본주의 질서를 내면화한 계산적, 순응적 인간이 현대인의 디폴트다. 전방위적으로 닥치는 압력에, 사회 변혁의 기치를 내걸기는커녕 자기자신의 마음을 지키기에도 급급해진 것이다. 장류진 작가가 그려낸 8편의 이야기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현실이 그렇다는 건 이제 알겠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향점’이 돼야 하는 건 어떤 인가? 이 사회에서 자신을 겨우겨우 잘 지켜내는, ‘현명한 작은 인간’(장류진)인가, 문제의식을 벼르고 벼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를 품는 ‘강인한 큰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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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장강명의 <표백>은 한국에 더 이상 큰 개인이 들어서기 어렵다고 선언했다. 살면 살수록 꿈이 마모되는 세상에서 큰 개인이 나올 수는 없다.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 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 이라고 불러." 77-78쪽


질문을 품는 비대한 자아는 없다. 필요가 없어서 도태돼 사라졌다. 이제 정답을 찾는 ‘산뜻한’(인아영) 개인이 있다. 산뜻하고 담백한 개인들의 분투기는 세상의 압력에 찌든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준다. 너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지켜내야 한다고, 또 지켜낼 수 있다고. 우리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부드럽고 사려 깊은 목소리로 건네 준다. 요컨대 이 소설집은 생명력이 소진된 우리들에게 내려온 구호품이다. 인간적 마음을 연명케 하는 그런 구호품 말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멈추면 우리는 계속 하늘에서 떨어지는 구호품을 기다려야 하는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 산뜻하고 담백한 개인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최종지점이 아니다. 현실적 대안일 뿐. 나는 “어쩌면 그간 한국문학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나 내면의 거대한 심연을 드러내는 개인에게 유난한 값어치를 부여해왔는지도 모른다”는 인아영 평론가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 시대는 그러한 개인에게 과거보다 더 유난한 값어치를 부여해야 하는 시점이다.


이 소설집은 우리가 어떤 현실에 처해 있는지, 그에 현명한 생존 방식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치밀하고 놀라운 리얼리즘이다. 누군가에게는 그가 처해 있는 현실을 정확히 조명해주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위로가 된다. 작가는 그 안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짚어 주었다. 그걸 부드럽고 생동감 있는 문장과 서사로 채워 냈다. 문학의 쓸모 운운하며 책을 안 읽는 조급한 마음 씀씀이까지 모두 포용해주는 따뜻함이 있다. 장류진 작가에게 감사하자. 장강명이 2010년대 들어 기존에 서 있던 지점을 부숴버렸다면, 장류진은 새롭게 우리가 출발할 지점을 설정해줬다. 이 8편의 따뜻한 이야기가 재미있었다면 이제 더 나아갈 차례이다. 문학을 쓸모로만 받아들이게 된 인간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끈질지게 천작해보자.빌런들을 자꾸 만들어내는 뿌리를 찾자. 그에 뛰어들자.


이 책을 위로와 안식의 선물로만 받아들이지 말자. 그렇다면 이 책이 남긴 여운, 그 운동성을 모조리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 운동성이 언젠가 월급을 포인트로 주는 회장님을 날려 버릴 수 있음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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