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언젠가 음악하는 친구의 방에서 같이 뒹군 적이 있다. 누가 음악인 아니랄까봐, 그 친구의 방에는 전자피아노와 기타,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악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로 온갖 잡동사니들이 같이 흩어져 있었다. 지저분하다고 말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상황이었다. 물건들은 산만했지만, 자세히보다 보니 그 광경이 가장 깔끔히 정돈된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방은 일단 좁아도 너무 좁았고, 큼직한 물건이 많았기에 어떻게 해도 지저분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작업실인지 자취방인지 경계가 애매한 그 방에 누워서 우리 사이에서 나오는 얘기는 대개 궁상이었다. 야 너는 언제 이 방에서 탈출하냐. 낸들 아냐, 언젠가는 탈출하겠지, 아니 탈출해야지. 이딴 만담조차 안되는 실없는 이야기를 씨부리다가 향하는 결말은 언제나 누군가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그 때 우리의 타겟은 버스커버스커였다. 야 쟤는 벌써 음원대박나고, 대단하지 않냐, 쟤 저렇게 될 동안 우린 뭐했냐. 늘 그렇듯이 부러움은 질시가 되고 질시는 자기비하가 되었다. 금새 우울해지지만 그 우울이 공기를 무겁게 하는 만큼이나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문답. 그러나 그 한결같은 레퍼토리를 깨는 친구의 일침이 있었으니, 그 이야기에는 좁은 자취방의 퀴퀴한 분위기를 일시에 잊게 하는 파괴력이 있었다. 내게 생각할 여지를 던져준 것이다.
야 일찍 성공하는 게 항상 좋은 것은 아냐. 그게 뭔소리야, 너 무슨 뜻으로 그런 소리하냐. 일찍 성공한다는 건 재능을 미리 다 써버리는 거야. 초반에 반짝하고 사라지는 애들이 얼마나 많냐. 차라리 대기만성이라고 늦게 빛 보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럼 김건모, 조용필 이런 사람들은 일찍 뜬 거 아니냐. 그러니깐 그 사람들이 대단한거지. 일찍 떠서 지금까지 해먹잖아.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몇 없어.
다시 이야기가 조용필, 김건모에 대한 부러움으로 돌고 돌았다. 그 뒤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뻔한 궁상일 것이다. 그 순간부터 내 포커스는 완전히 다른 쪽으로 쏠렸던 것이다. 재능. 재능의 양은 정해져있는 둥, 젊은 나이에 터뜨리면 나이 들어서 쓸게 없다하는 둥 하는 그런 얘기는 살면서 처음 들어봤을뿐더러, 언뜻 봐서는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그 말이 내게 어떤 울림을 남겼다면, 그건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그 때 나는 말을 통해서 일상과 우둔함으로 덮여있는 세상의 진실 어디쯤에 순식간에 다다른 듯했다. 평온하고 무료한 땅 위의 세상 밑, 황폐한 진실의 멘틀에 쩍쩍 갈라진 크레바스에 빠져 온 몸이 둔탁한 암석에 부딪치고 찔리는 감촉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 순간은 너무도 찰나여서 금방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어떤 직감, 아니 직관 같은 것이어서 남은 것은 휘발된 느낌에 대한 아쉬움뿐이었다.
날씨가 더워지고, 생명력 넘치던 나뭇잎들이 아지랑이에 찌들어 짜증나게 느껴질 무렵, 그 친구와의 연락이 완벽하게 끊겼다. 그리고 버스커버스커의 소식도 한동안 들리지 않았다. 언젠가 모두 그들의 음악에 열광할 때가 있었다. 내가 지냈던 기숙사의 기상노래도, 노래방을 갈 때마다 누군가가 어김없이 선곡하던 노래도, 언젠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 있게 부르고 싶어서 연습하던 노래도 모두 그들의 노래였는데. 정말 그 친구의 말대로 젊은 날 재능을 다 써버린 걸까.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젊은 뮤지션들이 대체 무슨 이유로 스스로를 발전시키지 못하는가하는 지엽적이고 고루한 문제가 아니다. 이제야,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 펜을 든 지금에야 말하고 싶은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그때 우리의 이야기는 순간적으로 번쩍거렸고 그리고는 다시 궁상과 자기비하의 동어반복으로 빠져버렸다. 그러나 나는 사실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느낀 위화감, 간질거리던 답답함은 결국 이런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그게 뭐가 나쁘지? 젊은 날에 자기 재능을 다 써버리는 게 대체 뭐가 잘못된 거야. 나는 그 친구의 말에서 오래도록 누가 알아주고 인정해주지 않아도 자기의 길을 간 사람들, 그러니까 예술가나 장인들을 찬양하는 뉘앙스를 읽을 수 있었다. 그 말이 곧 그와는 완전히 반대인 사람들, 일찍 성공한 만큼 일찍 저버린 사람들에 대한 은연한 비난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언젠가 알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난 속에는 질시의 감정이 숨겨져 있다. 우리의 비난이 누군가에 대한 부러움에서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질시가 없는 비난은 경멸이다. 젊은 나이에 성공한 이들을 경멸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사실 그들을 질시할 뿐이다. 우리는 사실 모두 그들처럼 되고 싶다. 우리는 예술가의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장인의 세상에서 살고 있지도 않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은 고도로 발달한 소비자본주의의 세상이고 곧 ‘과시적 인정투쟁’의 세상이다. 최소한 저들은 지금 인정받았잖아. 인정받지 못한 네가 대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거야. 우리의 관념이 만들어낸 세상은 아름답지는 못하더라도 정의롭고, 질서 정연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니꼬운 꼴은 보지 않아도 되는 곳이지만, 관념 속의 세상은 말 그대로 관념 속의 세상이잖아. 버스커버스커가 가수로서 이제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걔네 저작권료가 얼만지는 알아? 걔네가 그걸로 번 돈으로 산 건물이 지금 얼마나 하는지 알아? 걔네 부모님이 자식들 얼굴이 티비에 나오는 거 보면서 얼마나 좋아하셨을지 알아? 너 마지막으로 부모님한테 용돈 드린 게 언제야. 우리가 이 좁은 방에 박혀서 신세타령이나 하고 있을 때 걔네가 대체 어떤 방에서 무슨 음식을 먹으면서 어떤 시계를 차고 공연이니, 음반이니 하고 주고 받는 이야기를 네가 대체 어떻게 알아? 걔네가 뭘 해도 지금 우리보다는 낫단 말이야 이 등신천지야.
젊은 나이에 성공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젊은 나이에 성공한 소수는 젊은 나이에 성공하지 못한 대다수에게 영원한 질시의 대상이자, 지향의 대상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이 세상의 진실은 다음과 같다. 젊은이에게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다. 성공하든지, 아님 성공하지 못하든지. 특별해지든지, 아님 계속 영원히 평범하든지. 인생의 주인공이 되든지, 아님 다른 주연 인물의 들러리가 되든지. 세상에 더 큰 욕망을 관철하든지, 아니면 우울한 세상이 제공하는 쥐꼬리만한 행복을 세상을 살아가는 연료로 태우면서 연명하든지. 젊은 나이에 성공한다는 것은,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조금 더 빨리 쥔다는 것뿐만 아니라, 자격 그 자체이기도 하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해보자. 젊은 나이에 성공한다는 것, 젊은 나이의 성공에는 필연적으로 돈이 따라온다. 그 말은 어떠한 고급 노동보다도 돈이 더 큰 돈을 불러오는 이 사회에서 더 이상 금전적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이 돈과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돈과 관련되어 근심과 걱정을 유발하지 않는 일이 있기는 한가. 그래서 젊은 나이에 성공한 이들은 젊은이들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밥벌이를 위해 아득바득 분투하는 이들, 그리고 밥벌이를 시켜줄 조직의 작은 톱니바퀴 하나라도 되기 위해서 오만 노력을 쏟는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질시와 비난의 대상이기도 하면서.
재능을 방만하게 써버린 이들을 윤리적으로 비난할 수 있어? 아니 근본적으로 앞의 문장에서 말하는 ‘윤리’라는 게 대체 뭔데? 어떤 고리타분한 것, 이미 지나간 세대의 낡아버린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틀렸다. 언급한 ‘과시적 인정투쟁’의 세상에서 집과 차와 지위와 권력을 빼놓고 무슨 윤리를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시공간을 뛰어넘은 채로 연결되어 서로의 우열을 두고 늦은 밤 혼자서 괴로워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 그리고 사실 당신도 모두 부모님, 친구 혹은 스스로가 부여한 은근한 기대에 떠밀려서 살고 있지 않나? 그런 시대에서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람은 그야말로 위인이다. 가장 ‘윤리’에 충실하여 따라야만 하는 위대한 인물. 이들이야말로 돈, 에너지, 시간의 필연적 제로섬 법칙을 깨뜨린 초인이다. 당신을 옥죄는 불안, 당신이 그리는 미래, 당신 속에서 겨우 다스리고 있는 욕망, 이 세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방법은 결국 하나뿐이다. 젊은 나이에 성공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스스로를 끊임없이 달래가면서, 일상의 압력과 싸워가면서 아주 험란해진 먼 길을 크게 돌아서 가야한다. 결국 실없는 대화 중 나를 한 순간 파고든 그 감각은, 세상의 냉엄한 진실에 대한 자각이었던 것이다. 평범의 늪 속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그런 자각. 이 역시 더 얘기해봤자 별 의미가 없는 뻔한 진술이다. 여기서 마친다.
(이 글은 전부 픽션입니다. 저는 장범준의 노래를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