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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Apr 14. 2020

1만명 정도가 아닐까요?

<소년이 온다>를 읽고 쓴 짧은 픽션 


“1만명 정도가 아닐까요?”


   한 학생이 대답인지 질문인지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 곧이어 누군가가 손을 들고 2만을 외쳤다. 1만, 2만, 5천, 8천, 1만 5천, 만 단위의 숫자가 교실을 메웠다. 교수는 마지막 학생이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는 대답을 망설였다. 흐음, 희미한 침음성을 뱉었다. 10만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흐음, 전염되듯이 교수의 입에도 그런 소리가 나왔다. 교수는 단상으로 올라가 교탁에 팔을 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발화자를 특정할 수 없는, 흐릿한 웅성거림이 잠깐 있었고 곧 침묵이 하얗게 좌중을 덮었다. 아무도 서슴 말을 꺼내지 못했다. 다만 다들 입 안에서 우물거릴 뿐이었다. 잠시 후 교수가 입을 열었다.


   “이거 심각한데, 이봐들, 죽은 사람은 192명 부상자는 800명 정도야. 물론 이건 정부 발표라서 믿을 게 못 되긴 한데. 요 전에 유족회 사이트에 등록된 가족이 300개 정도였으니깐, 실제로는 대충 그 정도겠지.”

   교수는 머그컵을 입으로 가져갔다가 떼었다. 

   “사망자는 300명 정도라고, 도대체 5만이니 10만이니 하는 건 어디서 나온거야. 여러분들이 또래 중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여기 앉아있는 거 아닌가? 한 놈도 제대로 아는 놈이 없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무슨 뜻이냐고.”


   질책인지 질문인지 헷갈리는 말들이 속사포처럼 좌중에 박혀들었다. 다들 속으로 파랗게 질렸을 것이다. 몇몇이 나직히 삼백, 삼백하고 되뇌이는 게 보였다. 그 소리는 공기 중으로 가볍게 흩어졌지만, 그 울림은 짙은 여운으로 강의실의 여백을 물들였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이라니. 교수님, 그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질책인가? 학생들의 무지와 태도에 대한? 질문인가?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학생들이 왜 그 숫자를 모르는지 궁금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한탄인가? 그런 학생들조차 이 나라의 가장 큰 아픔을 모른다는 것에 대한 양심적인 기성세대의 속마음일까? 


   그는 궁시렁대며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창문 밖에는 늦가을의 까만 저녁 하늘이 벌써 내려앉았다. 검은 배경 사이로 듬성듬성하게 가로등 불빛이 켜져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밤으로 어두워지는 계절인줄만 알았는데, 불빛 근처로는 아직 가을 저녁의 푸른 쪽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저 하늘은 쪽빛으로 푸르다고 해야할까, 깜깜하게 어둡다고 해야할까. 푸른 색과 검은 색의 이데아 사이에 펼쳐진 색의 스펙트럼에서는 이 하늘의 색에 꼭 맞는 지점을 꼽을 수 있을까. 그 애매한 색의 배합처럼, 질책인지 질문인지 모를 말처럼, '300'이란 숫자처럼 혼란스러운 저녁 하늘이다. 


   어째서 300명이 죽은 사건에서 10만이라는 숫자가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지만 10만이라는 숫자는 그렇게 어처구니없지는 않다. 현재 대한민국 광주의 인구가 150만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30년 전 즈음에는 그 반 정도라고 하자. 75만, 많이 잡아 80만, 그 도시가 초토화가 되었다면 못해도 15퍼센트 많다면 20퍼센트 정도가 화를 당했을 것이다. 그 중간값 15퍼센트를 추정한다면 10만, 많게는 15만 정도의 숫자가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300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것일까.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비극이라며, 현대사의 가장 잔혹하고 숭고한 희생이라며 그 화려한 언어와 수사의 세계는 차갑고 초라한 숫자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어느 쪽 일까. 


   한 사건을 두고 두 증인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아니 두 증거가 전혀 다른 정황을 말하고 있다면, 그 판결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혹자는 그에 관한 명 판결로 몇 천년 동안 칭송 받고 있는 중동의 지혜로운 왕(솔로몬)의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모든 지혜는 결국 교활함에 패배할 운명인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의 몸을 반으로 가르라는 말에 울부짖으며 다른 여인에게 아이를 양보한 창녀의 행동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이 모두 교활함의 소산이라면, 순발력과 연기의 소산이라면, 아이를 죽여 반으로 나누어 달라는 창녀의 말이 모함과 억울함의 결과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이 판결은 실로 교활함의 영광스럽고 역사전인 승리, 지혜의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패배라고 달리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이 지혜의 이야기에 교활함은 어디에 숨겨져 있는 걸까. 교활한 것은 어느 쪽인가. 


   <소년이 온다>는 그 해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그가 책을 읽는 것은 그로부터 2년이 덜 된 여름이었다. 여름이라고 해도 기념비적인 폭염은 이미 끝났을 무렵이다. 아지랑이가 흐물렁대는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고, 하루 중 잠깐은 청명한 하늘 밑에서 그림자가 짧아지다 끝내 사라지곤 하는 그 계절의 끝자락이었다. 2년 전의 늦가을에 책을 읽었다면 사건과 텍스트의 시의성이라는 것이 절묘하게 맞아 들어갔을 터였다. 그러나 사실 인연이라는 것은 흐물흐물하게 늘어진 사건들의 연결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하는 그런 일들의 연속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2년이라는 시간은 아주 짧은 공백일 뿐. 어차피 일어날 일이 일어나기 전에 잠시 머물던 아주 짧은 공백 말이다. 그 인연의 끈이 맨부커상을 이어서, <채식주의자>를 이어서, 어떤 문화적인 국수주의(시실은 사대주의)와 ‘한강’이라는 작가를 이어서, 문학 소녀이자 한강의 열성적인 팬인 그의 선배를 이어서, 화물차와 택배를 통해 <소년이 온다>를 이윽고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표지에는 하얀 꽃들이 수놓여 있다. 꽃들은 조심스런 붓놀림으로 흩어져 있다. 세느 강과 에펠탑을 배경으로 파리의 회색 뒷골목을 그린 유화 속, 떨어지는 비로 점묘된 하얗고 작은 물감 조각들처럼. 손가락으로 그것들을 문질렀으나, 아주 매끈하다.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빳빳하게 코팅된 커버 앞 뒷면에 쌓여있는 국화는 모두 몇 송이일까. 한 송이의 국화 꽃으로 한 명의 영정 사진 앞을 장식한다면, 모두 몇 명의 영정 사진이 필요할까. 300명? 아니면 10만명? 하얀 국화 꽃 사이사이의 여백은 검다. 흔히 관 위에 국화를 올려놓는 것처럼 그것은 거대한 검은 관의 뚜껑 부분일까. 아니면 끝이 보이지 않는 공동일까. 돌을 던져도 도무지 소리가 들리지 않아 언제까지나 귀를 쫑긋해야 하는 그런 공동. 그는 이 책의 첫 장을 넘긴다. 그리고는 검은 공동의 아가리 속 수면 아래로 숨을 막은 채 스며들어간다. 


   처음으로 두 소년들을 마주한다. ‘하얀 하복 반소매 아래 호리호리한 팔뚝, 좁은 어깨, 길쭉한 허리, 고라니 같이 앞으로 수그러진 목’으로 소년이 뛰어다닌다. 하늘색 줄무늬가 진 여름 교복을 입고 동네를 쏘다니던 언젠가의 과거가 떠오른다. 코 밑에 흰 털이 자라고 제 몸만한 책가방을 이고 가는 동네의 소년을 생각한다. 그가 처음으로 죽음을 마주한 것은 할머니의 장례식 때였다. 푸르스름한 얼굴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채 누워있는 하얀 소복의 할머니를 기억한다. 차디찬 영안실 안에서 어른들은 오열하지 않고 눈물을 억눌렀다. 그렇게 그에게 마지막 모습이란 하얀 시체, 오열보다는 서글픈 체념으로 죽은 자를 응시하는 누군가의 퉁퉁하고 벌건 눈이었다. 그러나 그 소년들에게 그런 마지막이란 없다. 가녀린 몸을 수습해줄 틈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다 눈이 벌개질 틈도 없이 두 소년은 살덩이와 피, 악취와 구더기의 세계로 떨어진다. 군인들이 쌓아올린 시체 더미 속에서 존재의 테두리가 조금씩 으깨진다. 으깨진 육체들은 하나의 짐승이 되어 울부짖는다. 듬성듬성 파묻힌 시체의 짐승들이 연이어 끔찍한 쇳소리를 긁어낸다. 소년들의 아름다운 말소리로도 끓어오르는 듯한 파열음을 감출 수 없다. 이런 죽음은 전혀 차갑지 않아. 서글프지도 않아. 고개를 돌린다.


   쇳소리를 뒤로, 몇몇 이들의 실루엣을 본다. 살아남은 자들이다. 멀리서 그들은 분명한 사람의 실루엣이었으나 가까이서 그들의 윤곽은 제멋대로 뒤틀려있다. 비틀리고 비틀려 끝내 찢어진 윤곽의 검은 공백에서 잿가루가 쏟아져 공기 중으로 휘날린다. 이를테면 재를 뿜어내는 사람들. 이들은 본래 반짝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영혼에 작열한 인두질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온당 당연하다고 믿었던 고귀한 것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도착적인 고문이 가해진다. 아니 사실 도착적인 것에 이유 따위는 없다. 그들이 기묘한 입으로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육신이 영혼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 영혼 같은 건 사실 보잘 것 없다는 것, 고귀한 것이 그들을 지켜주지는 않는다는 것, 본래 무능하고 무책임하다는 것. 그들의 영혼은 산산히 부서지고 쪼개지고 갈려서 마침내 잿가루로 날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영혼을 거름으로 만든 재를 밟고 그 대지를 배회한다. 존재하는 모든 감각이 고통으로 매워지던 날들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그것이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새겨진 몸과 마음을 영원히 저주하면서. 


   이어 절절한 영창 소리를 듣는다. 한 여인이 눈을 감은 채 주문을 중얼거린다. 주문의 울림 위로 소년이 되살아났다가-흩어진다. 다시 되살아났다가 흩어진다. 소년이 흩어진 곳에 존재의 잔해가 너덜하다. 여인은 그 잔해를 붙잡고 다시 주문을 되뇌인다. 소년이 순진한 환상으로 되살아나지만 결국 의미를 알 수 없는 연기처럼 말풍선과 존재의 뭉실한 조각구름으로 흐려진다. 그 잔해의 농도가 사뭇 진해서 안개가 자욱하다. 그 속을 그 여인이 걸어 들어간다. 남은 것은 절절하고 아릿한 심정이다. 가족은 죽은 자의 뼈를 수습한다. 구멍 뚫린 해골을 본다. 검은 두 구멍과 누래진 얼굴 뼈의 피죽. 그들이 기억해야할 소년의 마지막 모습이다. 하얀 고라니 같은 소년, 피를 흘리고 퀭한 눈으로 쓰려져 있는 소년 그리고 해골. 소년의 유령은 여러 모습을 헤맨다. 그때 너를 데리고 왔더라면, 후회와 자책을 쏟아도 유령은 대답하지 않는다. 너를 그렇게 만든게 누구냐, 누가 너를 그렇게 만든 것이냐. 유령은 뒤돌아 사라진다. 누가 그 군인들을 보낸 것이냐, 대체 왜 무슨 이유로, 누가, 너를... 여인은 눈을 뜬다. 악다구니를 뱉는다. 그러나 이내 고꾸라진다. 그녀를 부축하는 소년의 형과 눈이 마주친다. 형이 말한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욕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그는 수북한 국화꽃의 세상에서 빠져나온다. 그는 의자를 뒤로 젖힌 채 책상에 발을 올린다. 발 옆에 놓인 머그컵 안 커피는 새까맣다. 머그컵을 입에 대니 커피는 식어서 쓴 맛이 그대로 들어온다. 쓰기만 쓴 블랙커피는 식을 대로 식어서 머그컵 채로 쥐어도 세라믹 특유의 서늘함이 손에 전해진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교수도 그랬다. 그는 특이하게도 머그컵의 손잡이가 아닌 몸통 부분을 잡고 목을 축였었다. 그 때 그 커피는 다 식어있었구나. 그 때의 그 침묵. 그는 몇 번이나 컵 몸통을 잡고 훌쩍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정치학도야. 정치를 배우는 사람은 일단 냉정해야해. 300명에 부상자 합치고 많이 봐줘야 2천명도 안 돼. 방금 누가 10만이라고 안했나? 자넨가? 자네? 10만이 어떤 숫자인지 알아? 차라리 50만이라고 하지 그래. 50만은 왜 없나. 50만이 어떤 숫자인지 알아? 2차 대전 영국 사상자 수야. 그게 51만인가 그래. 프랑스가 60만인가. 한반도 광주랑 세계대전 한 복판 나라들이랑 숫자 단위가 똑같은거야 지금. 안 그래? 이게 여러분이 냉정하지 못한 거라고. 다들 광주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거야. 그래 가지고 무슨 정치적인 판단을 하겠어. 뭘 하겠느냔 말이야.” 


   반박할 수 없어서 가슴 철렁이도록 쓰디쓴 말이었다. 그러나 2년의 세월과 투명한 젤리 같이 물컹한 회상의 연못을 겨우 지나온 말은 식은 블랙커피처럼 밍밍하다. 어중간한 쓴 맛보다는 더 쓴 것이 있기 때문일까. 


   교활한 것, 이제 생각난다. 냉정이라는 말, 반박할 수 없도록 차갑던 그 말. 교활한 건 그 녀석이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만 단 한 송이의 국화를 놓으려는 그것. 셀 수 없는 것을 숫자를 붙이고 비교하려는 그것. 그것이 가장 교활하다. 국화꽃을 있는 대로 뿌려서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어도 모자란 것이 있다. 노란 리본을 묶어서 온 세상을 노란색으로 물들여도 모자란 것이 있다. 울부짖는 시체의 짐승 앞에서, 자궁이 파괴되어 모든 남자의 손길을 증오하게 된 여자의 앞에서, 아들의 죽음에 흙을 씹어먹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 앞에서 손가락으로 일일이 숫자를 세는 것 따위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다. 혹여나 눈에 뜨일 까봐 항상 고개를 숙이고 치켜떠야 했던 공포에 질린 눈, 군인들의 이유 없는 곤봉질과 군홧발질에 머리가 깨진 자의 노란 시야와 쾡한 눈을 그려내지 못하는 숫자 따위에 도대체 무슨 의미를, 이야기를 더할 수 있다고. 그런 숫자들은 직시해야할 것을 호도할 뿐이다. 


   그는 머그컵을 잡고 흔든다. 식은 커피에 소용돌이가 돈다. 흔들리는 검은 수면 밑에서 머그컵을 입에 대던 순간의 교수, 그리고 하얀 노이즈 속의 침묵이 떠오른다. 그의 지적은 봐야할 것을 잘 못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때 교실에 앉아있던 학생들은 확실히 잘 못 배웠다. 그들은 그 사건을 빛나는 미사여구로 치장된 영광스럽고 숭고한 희생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의 크기만큼 그림자를 멋대로 그려서 1만이니, 10만이니 이따위 소리나 지껄였던 것이다. 광주의 이야기를 악의 가장 높은 위계에서 모든 것을 지시한 한 독재자,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빛나는 시민들의 구도로만 얼버무릴 수는 없다. 그것 역시 몹시도 교활한 작당이다. 지나가는 신혼부부를 기습해서 팔다리가 더 이상 꿈틀대지 않을 때까지 곤봉을 내리치는 공수부대원들, 비명과 절규를 위해서 손톱 사이에 계속 송곳을 찔러넣는 고문자들, 가혹한 처사에 항의하는 경찰서장을 도리어 가두고 폭행하는 군 간부들. 무엇을 위한 진압이었나. 독재자의 지시는 그저 방아쇠였을 뿐이다. 같은 인간에게, 같은 민족에게 행했던 전후무후하게 가학적이고 도착적인 악은 어떻게 태어난 것인가. 왜 역사를 배웠다는 사람들조차 그 행보를 모르는 것인가. 


   이제 솔로몬 왕의 고사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의혹을 이야기해야겠다. 솔로몬 왕의 지혜에 관해서는 구약성서 열왕기 상 16장에서 28장에 수록되어있다. 그 중 22절과 24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22 : 그러자 다른 여자가 말했습니다. ‘아니다, 살아있는 아이가 내 아들이고, 죽은 아이가 당신 아들이다.’ 첫 번째 여자가 말했습니다. ‘아니다, 죽은 아이가 당신 아들이고, 살아있는 아이가 내 아들이다.’ 이처럼 두 여자가 왕 앞에서 다투었습니다.


24 : 솔로몬 왕은 신하들을 시켜 칼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


두 여자가 왕 앞에서 싸웠고 왕은 칼을 가져오라 한다. 과연 이 두 절은 연이어 일어난 것일까. 이 절들 사이에 시공간적인 공백은 없는 것일까. 달리 말해 왕은 사건을 바로 그 자리에서 판결했을까. 그는 두 여인이 있던 현장에 가보지 않았던 것일까. 그 의문을 해소해주어야할 23절은 이렇다.


23 : 솔로몬 왕이 말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살아있는 아이는 자기 아들이고, 죽은 아이는 다른 여자의 아들이라고 하는구나.’

  그 대사를 뱉는 왕의 음성은 어떠했을까. 사실 지혜로운 왕에게 진실의 여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에게는 한낱 창녀들의 문제였을 뿐이다. 어떤 여인이든, 한 명의 여인에게만 아기를 쥐어주면 문제는 끝난다. 그는 단지 그럴듯한 상황을 만들어 엇갈리는 진술을 유도해냈을 뿐이다. 아이를 잃어버릴지도 모를 두려움에 벌벌 떨며 엎드려 있는 진실의 외침을 토해내는 여인에게, 왕이 지었을지도 모르는 권태로운 표정, 칼을 가져오라는 나른하고 덤덤한 음성은 성서에 기록되지 않았다. 왕은 그렇게 지혜의 상징으로서 역사에 남았다. 지혜와 교활함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할 수 있겠는가. 교활함은 결국 핵심적인 것을 은폐하며 번지르한 겉모습을 전하는 것이기에. 


   매끈한 책 커버를 더듬는다. 책 뒷면에는 신형철의 추천사가 이렇게 적혀있다. ‘...시적 초혼과 산문적 증언을 동시에 감행하는, 파울 첼란과 쁘리모 레비가 함께 쓴 것 같은 문장들은...’ 그는 파울 첼란과 쁘리모 레비가 누군지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이다. 그들은 교활한 것들을 파헤치는 자들이다. 교활한 녀석들이 숨겨놓은 것들을 끄집어내는 자들이다. 1980년 5월 18일에 광주에 있지 않았으면서, 입맛에 맞게 증오와 냉소의 말을 꺼내는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었던 것인가. 그는 시적 초혼과 산문적 증언을 동시에 감행하는 그 책을 조용히 책장 첫 번째 줄 조지 오웰의 <카탈루니아 찬가>의 옆에 조용히 꽂아 넣는다. 이제는 이 소설 너머 알지 못하는 역사의 이야기를 찾아볼 차례이니깐. 


   그도 언젠가 선물 받은 조그만 라디오를 하나 꺼낸다. 시간을 되돌리는 기능이 있다고 했다. 디지털 계기판에 연도와 날짜를 입력하면 된다고 했다. 그걸 받아들고 그는 ‘1980.5.18.’을 입력한다. 아차 싶다. 시간만 되돌리는 기계라며, 그는 다시 다른 숫자를 입력한다. ‘1980.5.17.’ 다음 순간 그는 어느 거리의 한 가운데 서 있다. 에스콰이어니 전당포니 하는 그런 낮은 간판들을 해치며 발걸음 서두른다. 이 시대에 광주까지 고속버스는 있을까? 기차는 없겠지. 길게 잡으면 한나절은 걸리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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