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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Apr 13. 2020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이슬라네그라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고 



어째서 아름다운 순간이 끝나면 그 아름다움을 모조리 덮어버리는 슬픔이 찾아오는지. 


불 꺼진 방에서 소설낭독을 듣고 있으면, 눈으로 읽을 때보다 더 깊은 곳까지 떠내려가는 느낌이 들때가 있다. 일반적 독서에서는 시야에 온통 똑같은 흰 바탕위에 검은 글자뿐이어서무언가를 떠올리고 싶을 때는 잠시 책에서 눈을 떼어야만 하지 않나. 눈을 감고서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 몽롱한 정신으로 듣는 이야기가 더 시각적이고 더 관능적이며 더 환상적이다읽는 속도를 조절할 수 없이그저 읽어주는 대로만 듣는 통에 심상은 아주 느리게 완성된다또한 그런 방식의 독서는 수면에 아주 효과적이어서 굳이 몸에 좋지 않는 수면제를 찾을 필요도 없다. 머리의 피로, 눈과 허리의 신음내일에 대한 걱정어제에 대한 후회가 몰려오는 밤에 듣기 좋다.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팟캐스트에서 김영하씨는 언제나 마리오가 꾀병을 부리는 장면에서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마리오는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야하지만그는 감기 핑계를 대고 오전 내내 이불 속을 뒹군다그러나 가계를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고 그는 우연히 우체국에서 일자리를 얻는다바로 파블로 네루다만을 위한 우편배달부네루다의 편지를 배달하면서 그는 네루다와 친해진다. 마침 그는 베아트리스라는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아니 어느 것이 먼저인지 모르겠다사랑을 시작한 소년이 용감하게 네루다에게 다가간 것인지아니면 사랑에 빠진 소년을 보고 어른의 동정심으로 네루다가 소년에게 다가간 것인지(내 기억은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네루다에게서 시의 메타포(은유적 말하기)를 배워 소년은 소녀의 마음을 얻어낸다그러나 소녀의 어머니(과부)는 마리오를 메타포와 함께 끔찍하게도 싫어하는데이는 그녀가 특별히 유물론자이기 때문이다사회주의를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회의론자현실주의자이기도 한데여하간 그녀는 말만 앞세운 책임감 없는 남자들의 사탕발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는 것이다목소리는 항상 과부의 시니컬한 대사로 이야기를 끝낸다.


닭대가리 같으니지금은 네 미소가 한 마리 나비겠지하지만 내일은 네 젖통이 어루만지고 싶은 두 마리 비둘기가 될 거고네 젖꼭지는 물오른 머루 두 알혀는 신들의 포근한 양탄자엉덩짝은 범선 돛그리고 지금 네 사타구니 사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는 고것은 사내들의 그 잘난 쇠몽둥이를 달구는 흑옥 화로가 될걸퍼질러 잠이나 자!


낭독 파일은 여기까지였다. 나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항상 저 시작과 끝을 반복했다책을 읽어주는 목소리는 마리오의 멍청한 모습에서 시작해서 네루다의 능글맞은 대사를 지나 과부의 호통으로 이야기를 끝내곤 했다마리오는 언제나 순수하고 멍청했고네루다는 지치고 살가웠으며과부는 윽박지를 뿐이었다마리오가 내뱉은 베아트리스가 외웠던 메타포이를 테면 웃음이 한 떨기 장미라고 영글어 터진 창이고 부서지는 물이라는 둥미소가 나비처럼 번진다는 둥하는 그런 대사들은 아주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꼬박꼬박 씹듯이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은빛 바다라는 둥순식간에 부서지는 파도라는 둥하는 메타포가 곧 지구 반대편 남반구의 섬마을을 그려내었다그리고 그 검은 해안에 하릴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메타포 따위나 고민하고 있는 삐쩍 마른 소년이 앉아있다먹고 사는 것 이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어부들이 분주한 작은 어촌그 한 구석 온갖 정치적 풍파를 피해서 자리 잡은 시인의 저택바닷길 따라 그 사이를 왕복하는 우편배달부의 자전거내게는 그 평온한 어촌이 이슬라 네그라그 자체로 완결된 우편배달부의 세상이었다.


얼마 전 우연히 도서관에 가서 이 책을 발견했다처음으로 이 책을 '눈으로' 읽게 되었을 때 나는 두 가지에 놀랐다첫째내가 잠 못 이루는 밤 반복했던 이슬라 네그라의 세상이 사실 50페이지 뿐이라는 점이 책의 이야기가 166페이지이므로 그 부분은 3분의 1도 안되는 부분이었다둘째내가 처음이라고 여겼던 마리오 히메네스의 게으른 일상은 사실 처음이 아니었다그 부분은 15페이지부터 시작하고 그 이전에 13페이지 분량에 해당하는 서문이 있었다이 책은 액자식 구성이었던 것이다. 소설 속 어느 작가가 마리오의 이야기를 듣고 쓴 것이다. 그리고 그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미지의 독자 여러분도 깨닫게 되겠지만 이 이야기는 열광적으로 시작해서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지며 끝을 맺는다...


나는 그동안 귀로 들었던 부분이 책에서 가장 감상적이고 아름다운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마리오의 순수함은 베아트리스를 감동시키고 열락에 젖은 두 남녀는 결국 결혼하게 된다네루다는 칠레 아옌데 정부의 일원이 되어 프랑스 특사가 되어 파리로 떠난다마리오는 과부의 주점에서 일하게 되고 결국 아들을 낳는다그리고 이 순간이 이슬라 네그라의 평화와 사랑의 정점이다.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면서, 네루다의 세상은 몰락한다. 정치적 격변의 여파가 이 작은 어촌 마을을 휩쓴다이야기의 진짜 끝은 다음과 같다네루다는 죽고군인들이 마리오를 데려간다그 뒤로 마리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처음의 서문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책이 늦어진 데에는 감상적인 성격의 이유가 하나 더 있다나는 베아트리스 곤살레스가 산티아고 법정에 왔을 때 여러 번 점심을 같이 했다그녀는 자신을 위해 (얼마가 걸리든얼마나 많은 허구가 가미되든 간에마리오의 이야기를 써주기를 원했다(p 14)


작가가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는 베아트리스였다그녀가 이 이야기를 쓰기 원했기 때문에생사불명인 마리오를 기억하고자하는 베아트리스의 소망에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시작되었다. 그 소망을 둘러싼 감정은 곧 그리움이고 슬픔이고 사랑이었다. 베아트리스의 사랑과 슬픔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마리오를 잡아간 군부의 쿠데타네루다와 마리오의 관계그녀를 위해서 바다 속에서 탄생한 메타포그리고 그 끝에 시의 힘을 빌어서 그녀에게 사랑을 표했던 순수한 소년이 있다마리오 히메네스그 게으르고 순박했던 소년의 열정이 이 서사의 출발점이다그런 의미에서 내게 책을 읽어주었던 목소리는 아주 적절한 시작점을 찾은 셈이다.


이 이야기를 쓴 소설 속 작가는 굳이 처음에 등장해 이 이야기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 예고한다. 그 선언대로 이 이야기는 결말에 가서 비극이 된다. 현실 역사로 이어지는 이 비극은 내가 오랫동안 들어왔던 이슬라 네그라와 너무 다르다.  나는 지금도 잠 못 이루는 밤에 머릿속에 그리던 이슬라 네그라를 그리워하고 있다이야기의 결말을 알아버린 지금은 다시 돌이켜 상상할 수 없는 그 세계를 말이다검은 바위와 맑은 하늘이 남색 바다에서 합쳐지는 작은 섬갈매기 소리와 자전거가 삐걱이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마을 전체로 퍼지는 그 작은 섬을 배경으로 하는 소박한 일상마리오와 베아트리스가 그들의 아이를 안고서 어머니(과부)의 잔소리를 견디며 사는 그런 소박한 일상이 가끔 떠오를 것이다그리고 동시에 사라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마리오와 그를 기다리며 지치고 늙어버린 베아트리스극우파들의 난동으로 무너진 저택의 잔해 가운데 스러진 네루다의 주검 역시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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