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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May 14. 2016

오만과 편견의 클래식

<오만과 편견> 리뷰 




1. 묘한 느낌의 제목 <오만과 편견


훌륭한 작품에는 대개 그에 걸맞는 제목이 주어지기 마련이다. 아니 훌륭한 작품의 조건이 그런 제목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잘 지은 제목은 작품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특히나 제목은 작품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제목은 이름이고 이름은 곧 그 대상을 지칭하는 말로 사람들 사이에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김훈이 쓴 이순신의 이야기를 우리는 <칼의 노래>라고 부른다. 결코 우리는 그것을 ‘이순신이 바다에서 왜적들을 쳐부수면서 스스로 고뇌하는 이야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칼의 노래>만을 기억할 뿐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의 전란에서 글자 그대로 칼이 노래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가? 제목이 항상 내용을 따라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칼의 노래>는 묘하다. 그 명명이 주는 울림은 범상치 않다. 본격적으로 펼쳐질 이야기와 그 전체를 통칭하는 이름 사이 간격이 주는 긴장이 범상치 않은 것이다. 비단 <칼의 노래> 뿐만 아니라 훌륭한 작품은 대개 그런 멋진 제목을 가지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백년의 고독> 등과 같은 작품들이 그런 것들이다.       

<오만과 편견> 역시 그런 종류의 책이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제목에는 생명력이 있어 사람들의 머릿속에 스스로를 각인시킨다. 모르긴 몰라도 <오만과 편견>의 내용과 제목 중에 어떤 것이 더 유명할까하는 우문을 던져보면 후자가 압도적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오만과 편견>은 어떤 책인가. 우선 연애 소설이다. 몇 명의 남녀 주연들의 일들이 입체적으로 뒤섞여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오만과 편견>이다. 그만큼 사랑과 결혼의 이슈가 책의 주된 주제이며 아직까지도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단순히 남녀의 이야기라면 책의 제목이 <사랑과 결혼> 정도가 되어야 할 터이다. 제인 오스틴은 그 대신 <오만과 편견>이라는 확실한 제목을 붙였다. 그 상징적 이름과 결혼 이야기 사이에는 분명한 긴장이 있다. 이 묘한 긴장이야말로 <오만과 편견>이 단순한 스테디셀러를 넘어 시대의 클래식으로 대접받는 이유일 것이다. 


 



2. 오만과 편견의 이야기 


여성의 삶과 결혼의 이야기가 겉을 장식하고 있다면, 오만과 편견의 이야기는 좀 더 깊은 곳에 있다. 책에서는 분명 누가 오만하고 누가 편견이 있고 분명하게 전지적 시점에서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독서 후에 오는 기묘한 시원함과 놀라움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 오만과 편견은 책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것들이 어떻게 생기고 그것들이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모든 질문들이 <오만과 편견>이다. 리지와 다아시, 제인과 빙리, 콜린스와 샬럿, 위컴과 리디아 등 작중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이 오만과 편견의 상징들이고 경유지다. 그들은 모두 오만과 편견 속에서 사랑하고 질투하고 오해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오만과 편견>은 역시 오만과 편견 속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반성의 기회가 된다. 


이 작품은 오만과 편견의 기묘한 관계로 짜여져 있다. 다아시는 처음 오만에 사로잡힌 것처럼 나온다. 그 모습에 엘리자베스는 편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편견이야말로 스스로의 분별력에 대한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아시 어릴적부터 받은 교육과 가족들과 사람들에 대한 이른 편견으로 오만한 태도를 고수했었다. 그 오만한 태도가 엘리자베스의 편견을 만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분별력과 판단력을 과신했다. 작품에 전지적 서술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녀 역시 다아시 못지않게 오만했던 것이다. 두 주인공들은 모두 오만했고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사실 오만과 편견은 전혀 다른 것이되 다른 것이 아니었다. 실로 기묘한 관계다. 작품은 그 기묘한 관계를 뼈대로 한다. 오만과 편견이 오해와 사랑을 만들었고 슬픔과 설렘을 보여준 것이다. 그 과정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자. 





3. 오만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오만이란 무엇인가. (사전 : 태도나 행동이 건방지거나 거만함. 또는 그 태도나 행동.) 태도나 행동이 건방지거나 거만한 것이 오만이라면 우리는 대체 왜 오만해지는가? 제인 오스틴이 다아시의 입을 빌려 말한다. 

     

그러나 오만은... 진정으로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라면 늘 그것을 잘 통제하기 마련이고, 그건 오만이기보다는 자긍심이라고 해야겠지요. p83<오만과 편견> 민음사 


오만은 자긍심의 또 다른 모습이다. 오만은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 오만하려면 스스로 멋지고 가치 있다고 느껴야만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보배로워서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과 그러한 마음이야말로 오만이다. 즉, 스스로에 대해 한사코 변함없는 믿음이야말로 오만의 조건인 것이다. 스스로를 품위 있게 여기는 마음 혹은 그 정도, 우리는 그것을 자존감이라 부른다. (놀랍게도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미 우리의 삶에서 자존감은 무리 없이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수준을 넘어서 이슈가 되었다.) 자존감도 종류가 있다. 높은 자존감과 낮은 자존감이 그것이다. 오만은 특히나 높은 자존감과 연결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을 보고 오만하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세운 기준에 항상 미치지 못하고 스스로에 매일매일 실망해서 어떤 일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자책에 멍든 자들은 누구도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이 거북할 정도로 자신을 밖으로 발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존감이 차오르면 자신을 밖으로 표출하기 마련이다. 오만은 바로 그 순간 나타난다. 스스로 높은 품위가 스스로를 넘어서 말로, 행동으로, 지레짐작으로 표출될 때 사람은 오만의 위험에 빠진다. 다아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당신은 저에게 처음에는 정말이지 가혹했지만 다시 없이 유익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당신으로 하여, 저는 겸손해졌습니다. 제가 당신께 청혼하려 갔을 때 전 승낙 받을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를 기쁘게 해줄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자임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자임하기에는 제가 얼마나 모자라는 사람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p506


다아시는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를 기쁘게 해줄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자임했’다. 다아시는 오만했던 것이다. 계속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 당시 제가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나요?”

“물론 그랬어요. 제 허영심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제 청혼을 원하고 또 기대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p506




4. 오만과 허영심 


다아시는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연히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자격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기필코 엘리자베스가 청혼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두 명제의 사이에는 어떤 간격이 있다. 다아시는 무엇으로 그 간격을 채웠을까. 다아시는 이를 스스로 ‘허영심’이라고 밝힌다. 이 허영심이야말로 앞서 말한 오만의 위험이다. 오만이 그 당사자를 넘어 밖으로 분출할 때 허영심이 나타난다. 자신이 충분히 자격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타인도 나를 그렇게 대할 것이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을 때 오만은 허영심이 된다. 제인 오스틴은 작중에서 이를 아주 적절하게 설명한다. 

     

허영과 오만은 종종 동의어로 쓰이긴 하지만 그 뜻이 달라. 허영심이 강하지 않더라도 오만할 수 있지.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것과 관계되거든. p31


작중에서 허영심에 중독된 여러 인물들이 나온다. 미덕을 칭송받아야 하는 주연들을 제외하고 작가는 인물들의 허영끼를 전지적 시점에서 전달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콜린스와 캐서린 부인이다. 지적 허영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인 셋째 딸 메리, 항상 평판을 신경 쓰고 이웃과 신경전을 벌이는 베넷 부인과 루카스 경도 그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어떻게든 타인의 존경과 인정을 얻어내려는 그들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이 인물들이 사건을 꼬고 풀고 뒤집고 덮어서 이야기를 이끈다. 평판을 신경 쓰는 빙리양과 다아시 덕에 한동안 제인과 빙리씨의 사이가 소원해졌고 그 사이에 제인이 다아시의 저택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캐서린 부인의 후광으로 모두의 존경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난 콜린스의 활약으로 엘리자베스와 캐서린 부인이 만나게 되고, 그 부인의 허영심으로 다시 다아시와 엘리자베스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듯 굵직굵직한 사건들과 복선들은 모두 허영심 넘치는 인물들의 자기과시로 톱니바퀴처럼 채워진다. <오만과 편견>은 허영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오만을 통제하지 못하는 이들이 이야기인 것이다.



라헬 라위스[ Vanité ] (허영심)©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출처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사실상 이 모든 차이들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이런 데 있다. 즉 미개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 밖에 존재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아간다. 말하자면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139쪽


루소가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언제나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의 불쌍한 처지를 대변한다. 루소가 달리 인간 불평등의 씨앗을 갑자기 태어난 ‘허영심’이라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비교와 우열의식의 굴레에서 고통 받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특성이다. 제인 오스틴이 이렇게 여러 인물들을 채워 허영심을 풍자한 것은 분명히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때의 시대 전체가 허영심에 절어  던 것처럼 느껴진다. 허영이 넘치는 사회에서는 사람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기 마련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가치와 타인이 이야기하는 나의 가치가 차이가 날 때, 돈과 재산과 지위로 그 사이의 간격을 땜질할 수 있는 시대가 19세기의 영국, <오만과 편견>의 시대였을까. 제인 오스틴은 그 시공간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던 것일까. 그저 소설 속에서 짐작해볼 뿐이다. 




5. 편견과 오만 


한편, <오만과 편견>은 본래 <첫인상> (First impression)이었다. 제인 오스틴은 1797년 <첫인상>이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의 원본을 출판사에 출판을 의뢰했다. (네이버 두산백과 참조) 1813년 개작해서 <오만과 편견>으로 출판하기 전까지 이 작품은 계속해서 <첫인상>이었고, 그것처럼 작품에서 ‘첫인상’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작중에서 다아시의 오만만큼, 다른 인물들의 허영심만큼, 엘리자베스의 첫인상은 중요하다. 어찌되었건 젊은 두 남녀가 서로간에 쌓인 오해를 극복하고 사랑에 골인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플롯이니깐.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첫인상은 작중 내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 오해로 평면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사건들이 꼬여가고 흥미진진해진다. 정리하면 <오만과 편견>에서 오만이 다아시로 대표되는 재수 없는 행동들이었다면 편견은 엘리자베스의 답답함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녀는 스스로 받은 첫인상과 위컴의 중상모략에 홀려 다아시를 편견으로 대했다. 소문과 첫인상으로 이루어진 가짜와 희노애락을 느끼고 염치와 거만을 모두 가지고 있는 진짜 다아시는 분명히 다르다. 전자의 그는 재수 없는 말만 하고 속물적이고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을 즐겨하며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길 뿐만 아니라 욕심이 지나쳐 인정을 베풀 줄 모르고 정당한 권리마저 빼앗으려고 하는 차별주의자다. 그러나 그 모습이 다아시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이기적이고 오만하도록 교육받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변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 주변의 허영심을 지각하고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편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자 달려와서 애절하게 진심을 늘어놓은 로맨틱한 남자다. 그렇지만  엘리자베스는 스스로 만든 가짜로 진짜를 가려 놓고 있었다.

(미국 심리학자 조셉 제스트로가 1899년 인지 능력 검증을 위해 고안한 토끼-오리 그림.토끼와 오리 두 모습 다 진짜다.)


편견은 오만과 관련이 깊다. 편견은 믿음을 전제로 한다. 편견이 힘을 가지려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자신의 능력보다 더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을 때는 어떤 일이 생기는가. 자긍심이 조금씩 맹목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때 사람들은 ‘자만’을 만난다. ‘자만’은 허영심에 이은 오만의 또 다른 형태이다. 세상의 진짜 모습이 생각하는 그대로라고 믿는 것만큼 오산은 없다. 작가는 엘리자베스를 분별력의 미덕을 갖춘 인물로 그린다. 허영심과 속물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돈과 지위보다 인물됨과 사랑을 찾는 엘리자베스지만, 분별력 있는 인물들이 흔히 그렇듯이 스스로 세운 분별력의 벽을 넘지 못했다. 세상을 자신만의 틀로 바라보고 사람들을 자신만의 틀에 끼워 맞추다 보면 항상 뒤늦게 후회하고 부끄러워 하는 법이다. 우리가 예언자로서 프로메테우스의 후예가 아니라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던 에피메테우스의 후예로 그려지는 이상. 

     

이제 그녀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다아시를 생각하든 위컴을 생각하든 자기가 눈이 멀었고 편파적이었으며 편견에 가득 차고 어리석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행동이 그렇게 한심했다니!” 그녀는 외쳤다. “변별력에 대해서만큼은 자부하고 있던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똑똑하긴 하다고 자랑스러워하던 내가! p293



 


6. 편견과 허영심


느낌표로 점철된 위의 문장에서 그녀의 당혹스러움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무엇이 똑똑한 그녀를 흐릿하게 했을까. 계속 이야기를 들어보자. 


때때로 언니가 너무 너그럽고 솔직하다고 비웃으면서 쓸데없이 남을 의심함으로써 허영심을 만족시켰던 내가! 이제야 깨닫다니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하지만 창피해하는 게 당연하지! 사랑에 빠져 있었다 해도 이보다 더 기막히게 눈이 멀 수는 없었을 거야. 그렇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허영심이었어. 처음 만났을 때 한 사람은 나를 무시해서 기분이 나빴고, 다른 한 사람은 특별한 호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난 두 사람에 관해서는 선입관과 무지를 따르고 이성을 쫓아낸 거야. 지금 이 순간까지 난 나 자신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거야. p293 


또 허영심이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스스로 이성과 감정을 분리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내 감정에 완벽하게 독립적인 판단이란 없다. 허영심이라는 놈은 항상 틈을 노리고 들어온다. 엘리자베스는 그 분별력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싶었고 그런 허영심을 만족시켜준 위컴은 달콤하고 멋진 남자로, 그렇지 않았던 다아시는 못된 남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작중에서 언급되는 분별력 있는 모습보다 스스로 허영심을 뉘우치는 이 대목이야말로 그녀가 분별력 있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그 속물적이고 평면적인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가는가. 주연 남녀와 빙리 커플, 넷째 딸 키티 그리고 아버지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인물이 각자가 가진 조그마한 프리즘으로 세상 일을 굴절시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한편, 엘리자베스를 격려해주는 현명한 아버지는 여러 일들에서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나 한 발자국 뒤에서 사건을 조망하고 사람을 파악하고 방관한다. 그 역시 분별력 있고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만큼 오만을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허영심을 처리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항상 조롱하듯이 말한다. 누군가의 인정을 갈구하는 셋째 딸 메리나 은연중에 그것을 바라는 엘리자베스와는 다르게 그의 조롱은 오로지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 작품에서 조롱을 이해해주는 것은 기껏해야 엘리자베스뿐이다. (그녀 역시 완전히 동조하지는 않는다. 창피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는 젊은 적 결혼으로 첫인상과 편견이 얼마나 위험한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조롱과 방관의 방식조차도 리디아에게 호되게 당하고 만다. 그녀가 깜짝 결혼을 선포하고 잠적하면서 그는 팔자에도 없는 런던바닥을 뛰어다닌다. 조롱과 방관 역시 오만이었던 것이다. 세상 일은 항상 상상에 못 미치지만 어떤 일은 상상 그 이상이기 마련이다. 


지금의 현대 소설이야 인물들의 심리가 입체적이다 못해 쪼개지고 분열되어 헷갈리는 지경까지 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고전 소설을 보면 모조리 정형화되고 평면적인 인물 투성이 아닌가. <오만과 편견>에는 완벽한 인간이 한 명도 없다. 온통 결점 투성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두 오만한 인물이다. 오만해서 남을 무시하고 오만해서 허영을 부리고 오만해서 편견을 가지고 오만해서 남을 오해하고 사태를 단정하고 스스로의 삶의 방식만이 진실이라 믿는다. 온 인물들이 이러하다면 소설 밖의 진짜 사람들은 어떨까. 흔히들 좋은 소설은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다고 한다. 제인 오스틴의 시대에서 시간이 꽤나 흘렀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진걸까. 주변을 둘러보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이 빠짐없이 있다.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고 같이 살고 사랑하고 같이 밥 먹고 여행하고 시기하고 아껴주면서 <오만과 편견>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런 인물들과 부대끼면서 세상을 살고 있다. 여지껏 우리 모두가 오만하기 때문에 아직도 이 책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책이 묻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지.


사실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전설에서나 전해지는 ‘성인’의 경지나 되어야 넘치는 오만을 안으로 갈무리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아무리 자존감 없는 사람조차 생의 마지막 한 부분에는 오만하고 싶다. 어떤 부분에서도 자신을 내세울 수 없으면 자아가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루소의 말처럼 우리는 서로 비교하고 서로 허영심을 내뿜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타인의 의견 속에서 사는’ 우리들의 현실이다. 우리가 타인 속에서 살아간다면, 편견이야말로 우리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에 대한 타인의 무수한 편견이 합쳐져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오만과 편견의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속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좋은 편견으로 대해주길,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나쁜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고 조심스럽게 바랄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제인 오스틴이 정말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제목을 <첫인상>에서 <오만과 편견>으로 바꾼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7. 클래식의 이유 


 자꾸 철학적이고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헷갈릴지도 모르지만, <오만과 편견>은 분명히 연애 소설이다. 연애 소설이고 결혼 소설이다. 거기다가 연애 소설의 판타지가 군데군데 들어있다. 돈 많고 잘 생긴 다아시, 역시 돈 많고 상냥한 빙리, 아름답고 재기 넘치는 엘리자베스와 제인. 거의 정형화된 로맨스 소설의 틀이지만, 제인 오스틴이 살았던 19세기의 영국을 생각해볼 때 이 청춘남녀들의 사랑이 얼마나 파격적이었을지 짐작해본다. <오만과 편견> 민음사 판본에 붙어 있는 옮긴이 전승희씨의 해설을 참고해보자. 


하지만 개인 중심의 근대 시민 사회로 넘어오면서 이런 규범은 많은 개인들에게 질곡으로 느껴지고 결혼 시장에 나선 개인들은 ‘계산이냐 사랑이냐’ 라는 어려운 선택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런 사정은 최소한 재산과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의 가능성이 있던 남자들과는 달리, 상속 재산이 없고 직업의 가능성이 차단된 여성에게 더욱 가혹했다. 결혼 시장에 나선 여성들은 사랑과 무관하게 조건만 괜찮다면 결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p547

신데렐라와 같은 이야기지만, 젠트리 계급 여성으로서 약자였던 엘리자베스가 당당하게 콜린스를 물리치고 사랑을 이룬다는 이야기는 당대 여성들의 원하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당대가 원하는 흐름을 정확히 잡아채고 다양한 감성을 지닌 인물들을 등장시켜 현실성을 불어넣은 작품이 인기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 재현성이 너무도 뛰어나서 사람의 안쪽에 흐르는 오만과 편견을 그대로 담아버린 오스틴의 솜씨가 문제라면 문제고 재주라면 재주다. 


이 작품이 클래식의 자리에 오른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 두 가지만 언급하고 싶다. 첫 번째는 계속 글에 언급한 것처럼, 오만과 편견이라는 변하지 않는 것들을 다루었다. 19세기의 영국과 21세기의 한국은 전혀 다른 시공간이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똑같은 사람들이다. 클래식은 변하지 않는 것들을 다룬다.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다른 사람과 같이 사는 이상, 오만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고 <오만과 편견>은 영원히 클래식으로 읽히지 싶다. 


두 번째 이유는 전체 글로 보자면 사족이고 보론이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결혼과 사랑에 대해서 제인 오스틴에게 공감하고 있다. 지금은 그 당시와 비교해서 여성의 권리가 크게 신장된 시대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현 시대의 이야기들은 그와 비슷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항상 재벌집 남자와 똑똑하지만 풍족하지 않은 여자가 나온다. 서로 최악의 첫인상을 간직하다가 점점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는 드물지 않다. <치즈인더트랩>, <상속자들>, <꽃보다 남자>... 낮선 이름이 아닐 것이다. 유정과 다아시는 계속해서 부자고 홍설과 엘리자베스는 똑똑하지만 그보다 가난하다. 우리는 언제 이와 다른 구조의 ‘오만과 편견’을 만날 수 있을까. 한 시대의 명작이 클래식이 되었을 때,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클래식의 후보를 맞이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오만과 편견>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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