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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Apr 27. 2020

이유 없이 고꾸라지는 건 매한가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맹 가리)


새들은 죽을 때가 되면 페루로 건너가서 해변을 시체로 수놓는다. 로맹 가리의 인물들도 결말부에 와서 고꾸라진다. 영혼이 죽든, 육체가 죽든, 정신이 죽든, 사상이 죽든, 정의가 죽든, 생명이 죽든, 얼탱이가 죽든, 로맹 가리는 모든 결말이 죽음으로 끝나는 16개의 이야기를 붙여놓았다. 그런 죽음, 그런 고꾸라짐이야말로 짧은 이야기와 긴 이야기를 구별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 단절의 순간을 견디고 넘어야만 짧은 이야기는 긴 이야기로 진화할 수 있다.


새들이 죽어 있는 해변에서 자살하기 직전의 여자를 구했다면 그 뒤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가? 남자와 여자의 우연적인 로맨스가 펼쳐져야 한다. 로맨스가 이루어지기 직전의 순간에 스스로가 여자의 남편이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순식간에 커지는 긴장감, 소품으로 준비된 총, 어떤 피할 수 없는 갈등이 펼쳐져야 한다. 그러나 모든 순간에 로맹 가리는 끓어오르는 이야기를 식혀버린다. 남편이 여자를 데려가고, 아무도 없는 카페를 비춰줄 뿐 그 뒤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단 하나도 예외 없이, 장편으로 뻗어나갈 갈림길에서 이야기는 멈추어 버린다. 그 때 퍼져 나오는 감정은 분명히 허무함, 찝찝함, 싱거움, 여운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현실은 온통 그런 것들로 채워져 있다. 장편 소설이 풀어내는 마법 같고 매력적인 이야기는 현실에 없으니까. 마법 같은 장편 소설이 되다만 껍데기 같은 순간의 시체들이 널려있는 해변, 그것이 바로 현실이니까.


로맹 가리가 재료로 한 것은 그런 폐허의 잔해들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아주 건조하게 다룬다. 그의 문장은 이야기에 깊게 공감하거나 개입하지 않고 그저 기술한다. 인물의 말과 행동을 기술하고, 이따금씩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하는 추임새를 집어넣는다. 그런데 이 건조함 속에서도 유려한 문장이 흐를 때가 있는데 이는 오직 쓸쓸하고 허무한 정경을 묘사할 때뿐이다. 겹치고 깎아서 힘 준 문장은 새들이 죽은 해변이나, 옆 방 여자를 사모했던 청년의 주검을 장식할 때나 쓰인다. 달궈지다만 서사 플롯과 아무 감정 없는 듯한 서술, 가끔씩 발휘되어 몇몇 비관적 장면을 더욱 강조하는 문장, 16편의 이야기에서 공통점이라고는 그것들뿐이다. 그래서 16편이나 되는 이야기는 단 한편의 예외도 없이 비슷한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는데, 어디에서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지 못한 현실의 비린내가 뚝뚝 흐른다.


그럼에도 이 16편의 이야기에는 어딘가 동화 같은 데가 있다. 어느 숲 속에 살았다는 일곱 난쟁이의 이야기나, 다른 행성에서 온 어린 왕자의 이야기처럼. 서점에 쏟아져 나오는 국내 작가들의 단편선과 대체 무엇이 다르길래. ‘16편의 이야기 밑에 흐르는 통일적인 분위기.’ 나는 노트에다가 이렇게 적어놓고 혹여나 하는 생각에 각각 이야기의 배경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페루, 이스탄불, 아마도 베를린, 이탈리아-뉴욕, 이탈리아-중동, 동유럽-러시아?, 루마니아, 소련, 유고슬라비아, 영국, 프랑스, 아이티, 함부르크, 태평양의 어느 섬(마르키즈 제도), 안데스의 고원지대, 미국. 시간대는 미래를 다룬 마지막 작품을 제외하고는 전부 20세기였다. 나와 이 소설들은 현실에 대한 비관과 특유의 멜랑콜리를 공유하면서도 나는 섣불리 이 소설들과 친해질 수 없었다. 어째서 이 리얼리즘 단편들은 나의 현실과 일치하지 못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너무도 뻔해서 어처구니없다. 시공간, 각자의 현실이 다르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가 거리를 두는 방식, 그것은 바로 이동이었다. 매 작품은 비슷한 시간대의 한 장소에서 끝나고 다른 국가에서 시작한다. 공교롭게도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대개 서유럽의 백인 남성이다. 주인공의 유형은 고정되어 있지만 배경은 매번 바뀐다. 국가와 장소가 매번 바뀌면서, 나는 한 명의 주인공이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이 16편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단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바로 로맹 가리. 실제로 그는 16개의 장소를 모두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있음직한 일들을 써내려갔을 것이다. 그가 이 소설들을 사전에 기획하고 썼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면 이건 정말 훌륭한 기획이다. 통일된 문장과 통일된 분위기와 같은 시간대에서 전혀 다른 16개의 나라에서 펼쳐지는 고꾸라진 이야기라니. 그런 의미에서 표제작을 첫 순서에 집어넣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주인공에 공감할 수 있는 당시 유럽인들을 지구 반대편 페루로 가장 먼저 데려간 셈이니까.


더 나아가서 그의 주인공이 모두 유럽-백인-남성이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지 말지 고민이다. 보통 윤리적 정합성을 최고의 관점으로 보는 페미니즘에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일치된 주인공과 전혀 다른 장소가 주는 독특한 관계 역시도 이 단편집을 다채롭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아쉬움의 목소리는 낼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의 어느 지역도 들어갔더라면, 16편의 이야기 중 어느 편은 인디언, 어느 편은 중국 여성, 어느 편은 티벳 승려, 어느 편은... 그렇게 재현된 16편의 이야기라면 명작을 너머서 인류의 보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입장에서 당장 자기의 세계를 완결시키는 것이 먼저일 것이고, 그 결과로 낸 16편의 이야기를 나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모든 작가마다 작품을 시작하는 방식이 있다. 누군가는 어떤 사물에 대한 호기심에서 소설을 시작할 것이고, 누군가는 비밀에 대한 집착으로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다. 나는 로맹 가리의 방식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야기를 쓸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즉 보통 영감의 원천이 되는 것은 어떠한 장면이다. 그것도 아주 신비롭거나 놀라운 장면. 그리고 그것들은 대개 일상 속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시시콜콜하지는 않다. 그런 시시콜콜로 가슴 저리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최근 쇼코의 미소)도 있을 테지만 나는 그런 능력은 없다. 나를 먼 이야기의 저편으로 데려다주는 장면은 대개 여행 중의 어느 순간이다. 여행을 마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그때 봤던 순간들은 기억 속에서 엉키고 왜곡되어 독특한 공간적 배경을 만들어낸다. 주홍빛 가로등과 어느 버스커의 노래 소리가 공중에서 엉키는 런던의 밤, 갈매기들이 영혼들을 물고 오는 것만 같이 새하얀 십자가가 나열된 섬, 베네치아의 시메트리, 얼어붙어서 눈의 사막처럼 보여 뒤돌아보면 발자국조차 금방 사라지는 겨울의 바이칼 호수. 로맹 가리 역시도 그 어느 장소에 대한 추억과 경험에서 상상을 시작한다고 믿는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 그렇게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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