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를 읽고
(3년 전에 쓴 글입니다)
삶이 대체 뭐라고 허구한 날 이 말을 아무데에다가 막 갖다 붙인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는지. 아니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삶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그는 분명히 그걸 만든 존재일 테니. 아니 그걸 만든 존재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거대한 밀대를 들고 하얀 벽을 노려보고 있는 화가가 떠오른다. 이 화가는 대걸레에 물감을 잔뜩 적신다. 그리고 끙끙대면서 벽에다가 대걸레를 휘두른다. 물감이 온 방향으로 벽을 물들인다. 물감 방울들은 스스로의 흔적을 남기려 안간힘을 쓰면서 중력을 타고 벽을 미끄러져 내려온다. 이 예측할 수 없는 방울들의 궤적에 대해서 화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대걸레가 벽에 처박혀 물감들이 폭발하는 순간, 그 순간부터는 그저 모두 황망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니나의 삶은 그렇게 흘러내렸다. 그러나 니나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했다는 바보 같은 소리는 하지 않겠다. 니나 역시도 운명의 존재 아래서 수없이 불행하고, 물먹고, 몰락했다. 그녀가 삶을 긍정했다는 소리도 하지 않겠다. 애당초 삶을 긍정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모조리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하는 순간, 삶을 긍정하는 것이 되는가? 멋대로 살아놓고 그에 대해서 책임지게 되었을 때, 그녀는 자살하려 했다. 슈타인이 베푸는 호의는 거의 거절해놓고 정작 급한 일이 생기면 항상 슈타인에게 매달렸다. 그녀의 매력은 그런 애매모호한 치장이나 도덕적 잣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매력이란, 모두에게 자신의 삶을 그저 황망히 바라보기만 하라고 당차게 요구하는 모습이다. 내가 다쳐도 내 몸이요, 내가 죽어도 내 몸이니, 제발 좀 간섭하지 마라. 도덕, 사랑, 가족, 국가, 나치, 가릴 것 없이 그녀는 모두에게 뻔뻔하다.
어린 니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겨울밤 창문을 열고 추운 방안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그녀는 어린 나이부터 알았던 것일까. 그녀는 어릴 때부터 제멋대로가 될 준비를 했던 것일까. 눈을 감고 덜덜 떨리는 몸을 부여잡으며 어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것은 그녀가 요구하는 온당한 몫의 무게를 견디어 내는 연습이었다. 자유자유자유자유 모두가 자유를 이야기하지만 자유가 항상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잘 닦여 있는 포장도로와 정돈되지 않은 야생의 가시밭길 중 편한 것은 분명히 전자다. 그러나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후자의 길을 갈 수도 있어야한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멍청하다는 소리도 감내할 수 있어야한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지루함과 고통도 견딜 수 있어야한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어야한다. 자신의 기질이 가져다 줄 모든 시련을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를 지켜가겠다고 다짐. 그녀가 눈을 감고 망막 뒤의 검은 세계에서 되뇌였던 것은 분명히 어떤 맹세였을 것이다.
자살을 택한 적 있는 그녀가 삶(살아있음)을 사랑했는지는 아리송하다. 그러나 분명히 그녀는 스스로를 끔찍이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충만하다. 충만하려면 후회가 없어야 한다. 그녀에게 과거의 자신은 더 이상 지금의 자신과 같은 인물이 아니다. 과거의 자아는 무수히 많은 외압과 충돌을 겪으며 변형되었고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그녀 역시도 그녀를 붙잡는 과거의 늪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메여서 썩어버리기 보다는 다시 충동을 따라 나서기 위해 스스로의 발목을 과감하게 잘랐다. 모성애, 사랑, 가족제도, 타인의 시선, 시대적 상황, 나치의 압력, 어떤 것도 그녀를 쉽사리 붙들어 놓지는 못했다. 이 정도면 뻔뻔할 자격이 있다고 하자.
사실 그녀가 그다지 영웅적이지는 않다. 닥치는 모든 현실을 받아낼 것 같았던 그녀도 퍼시의 아이를 임신한 채 자살을 시도했으며, 마지막에 와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피해서 영국으로 떠난다. 순전히 말장난, 제멋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이중잣대, 행동의 일관성이라고는 그다지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녀는 자기의 어느 특성에도 자기를 고정시킨 적이 없다고 스스로 밝히지 않는가.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그녀는 내게 없는 삶을 보여주는 픽션 속의 인물로서 서 있을 때 가장 멋지게 보일 것이다.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서 살아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주 골치아플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을 아주 쉽게 생각하면서 그 누구로부터 삶이 영향을 받는 것을 못 견뎌하는 사람. 다시 말하지만 이기적이고 뻔뻔하다.
니나는 이렇게 제멋대로지만 그렇게 살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나는, 우리는, 마르게리트는 이렇게 소시민적으로 움츠려들며 작은 안정과 일상에 겨우 만족하는 듯 스스로를 기만하고 위로한다. 제멋대로 살면 실패한다니깐, 안정된 길로, 이미 튼튼하다고 밝혀진 길로만 밖에 가지 못하는 겁쟁이들은 니나를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갖가지 핑계로 모험의 길을 포기할 때, 가지 않은 길의 가지 못한 가능성은 마음 속에 앙금처럼 시나브로 쌓인다. 지금은 너무 늦었다고, 지금 내게는 포기하지 못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고 속으로 한탄하는 마르게리트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성공한다는 확신. 결국에는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는 그런 확신. 겁쟁이들은 지금 현실에 불만족하면서도 그런 확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니나의 이야기를 절대로 ‘성공’으로 호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는 그 ‘확신’ 없이 세상에 뛰어들었으니깐.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사람이 받는 역동적인 힘을 거스르지 않았다. 모두가 그 역동성을 스스로 잘라내고 미지의 영역을 두려움 섞인 눈으로 바라보기만 할 때, 그녀는 변두리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울타리의 바깥으로 걸어갔다. 안정의 경계 너머가 바로 생의 안쪽이다. 물론 니나의 방식이 항상 옳다는 것은 아니다. 서로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부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마지막 시점의 니나는 조금 지쳐 보인다. 니나는 점점 지칠 것이다. 점점 체력에 부쳐 생의 한가운데, 아무도 없는 고독의 지점에서 생을 마친다면 그건 그대로 너무 쓸쓸하지 않을까.
------- 이제 삶이고 자시고 하는 이야기는 지긋지긋하다. 나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씨부린다’고 표현한다. 삶이 뭔지는 각자의 개똥철학마다 다를 것이고, 개똥철학은 대개 고압적으로 ‘씨부려대는’ 것이니 표현이 조금 상스럽긴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씨부릴 생각조차 없다. 애초에 그럴 능력도 없고, 개똥철학 중에서 그나마 들을 만한 정도의 수준이라면 어디가서 석학이니, 지성이니 소리를 들을텐데 그마저도 못 되니 진작 주제를 알고 처신하는 것이다. 삶이라든지, 인생이라든지, 행복이라든지, 실존이라든지 그런 말에 도전해보면, 대개 스스로의 그릇이 얼마나 작은지 확인하게 될 뿐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심히 부담스럽다. 내용을 복기하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이런 책은 치사하게도 잡힐 듯 말 듯 한 오묘한 감각들을 남기는데, 이것들을 명확한 언어로 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독자는 그저 역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언젠가의 경험에 이런 저런 감각을 겹쳐볼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작가가 책에 담긴 삶의 딜레마를 모두 의도하고서 썼는지도 의심스럽다. 이런 책일수록 작가가 모호하게 뱉어버린 문장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 문장, 이 이야기 밑에는 또 어떤 뜻이 숨겨져 있을까. 내게 이 책은 그저 제멋대로 살았던 고집불통 여자와 그 여자를 멍청하게 사랑했던 남자의 이야기다. 그 먹먹한 느낌만 가져가고, 깨달음과 철학은 그대로 책에 놓고 가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