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4편
블로그의 서평들, 관련 학술자료들, 책 좀 읽었다하는 사람들의 조르바 에세이 등등 모두 니체의 초인, 니체의 자유, 운명에의 저항을 찬양하기 바쁘다. 그 텍스트 위에서 조르바는 완전한 자유인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자유를 과연 저항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산투르를 치고 싶을 때 치고, 도자기를 만들고 싶어서 손가락을 자르고, 사업에서 망했을 때 춤을 추고 등등. 다 좋다. 그러면 이런 행동들은 어떨까. 공금을 모르는 여자에게 쏟아 붓고, 수도원을 불타게 하고, 갑자기 그날 기분이 그렇다는 이유로 감독관을 때리고 등등. 앞의 목록과 뒤의 목록 모두 조르바의 자유를 증명하는 행동들이다. 그러나 전자에 따르면 조르바는 자유인이지만, 후자를 보면 조르바를 무뢰한이다. 무슨 차이가 있길래? 전자는 모두 자기 자신만 연관된 행동이었지만, 후자는 모두 다른 사람이 연관된 행동이었다.
자유는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존재가 있고 그 존재만큼의 자유가 있다. 안타깝게도 자유들의 총합은 세상의 허용량을 넘는 경우가 많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대개 크고 작은 충돌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매번 뉴스에서, 일상에서, 역사에서, 그 충돌의 소식을 접한다. 식민지를 더 갖고 싶었던 국가들의 자유와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국가들의 자유가 충돌했을 때, 1차 대전이 터졌다. 노예들의 자유를 확대하느냐마느냐를 두고 미국 남북전쟁이 터졌다. 독일에서 우생학에 기반을 둔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가 터져나왔을 때 히틀러가 부상했고 2차 대전이 터졌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자유를 요구했던 1960년 광주의 시민들은 학살당했고 탄압받았다. 여성과 노인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자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 중이다. 그래서 자유에 대한 논의는 필연적으로 충돌을 막기 위한 장치, 도덕에 대한 논의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조르바가 그렇게 자유자유자유 노래를 부르는데, 그는 이런 충돌의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는 어떤 도덕관을 가지고 있을까? 하느님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더 할까 싶기도 하지만, 사실 조르바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자기 속에는 하느님이 있는 만큼 악마도 있다고. 아니 자기는 사실 짐승이라고. 그리고 그건 다른 모든 사람이 똑같다고. 사람은 짐승이고, 말을 하면 도무지 알아처먹지 못하고, 잘해주면 뒤통수칠 궁리만 하고, 그러니 제발 가만히 두라고, 당신이 백날 무슨 사회주의니, 도덕이니, 민주주의니, 개풀 뜯어먹는 소리를 귀에 백날을 꽂아도 하나도 바뀌는 건 없을 것이라고. 더군다나 조르바는 조국이라는 강력한 이상에 중독되어, 고아를 만들고, 사람을 죽이고, 집과 마을 불태우며, 악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던 사람이다. 왠지 조르바는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그 도덕이라는 게 좋은 건지 어떻게 아슈. 조국! 나도 한 때 조국이라는 놈에 목숨을 바쳤소. 그 때는 그렇게 해야하는 줄로만 알았지만 이젠 아니요. 나는 졸업했어요. 나보고 목숨을 바치라고 했던 것들 중에 믿을만한 것들은 하나도 없었소! 나는 그래서 나만 믿기로 했소. 나는 조르바만 믿는단 말이오!’
조르바의 말은 인간사의 비결을 제대로 꿰뚫는다. 도덕은 하느님에 닿는 길이지만, 사실 악마에게 닿는 길이기도 하다. 도덕은 자유에 위계서열을 매긴다. 그렇기에 도덕은 도덕적인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권위를 낳는다. 도덕이나 인도주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권위적이고 위선적이라 조롱받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던가. 권위주의가 만드는 강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권위를 부수고 무시하는 조르바가 이런 도덕나부랭이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르바는 속에 들어있는 하느님과 악마를 모두 인정하고 이 둘에게 골고루 먹이를 준다. 과부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노구를 이끌고 뛰어들기도 하고 엉터리 수도승을 속여 수도원을 홀라당 불태우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그러나 오그레가 보는 조르바는 순수한 덕성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을 민족, 국가, 인종, 종교, 성별(이 부분은 논란거리다)에 따라 나누기 보다는 사람 본연의 모습을 바라본다.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옳다고 생각한 것은 그대로 행한다. 도덕을 뛰어넘었기에 위선 따위는 없으며, 도덕이 없어도 내면에서 하느님과 악마의 균형을 유지하는 그런 사람. 오로지 자신만의 원칙으로 사는 사람, 언뜻 보면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다. 깊게 봐도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조르바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시 수많은 사람들의 목과 귀를 잘라야 하고 수많은 여인들을 울려야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피가 역사에 스며들어야하는 건 아닐까? 조르바는 그 악행과 반성의 끝에서야 겨우 태어날 수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르바는 위대하다. 위대한 사람은 본받아야 하고 따라야 한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조르바를 따라하라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조르바가 위대해서 하늘로 치솟은 높이보다 더 깊은 어둠이 드리울 것이다. 조르바의 균형감각, 조르바의 연륜, 조르바의 깊은 생각을 갖추지 않고 조르바의 자유를 따라하는 것은 방종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주 큰 방종.
조르바의 자유는 가엾은 것을 슬퍼하고, 멍청한 것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람이라는 짐승을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조르바의 사랑과 연민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사람은 모두 한 꺼풀 벗겨 놓으면 똑같다는 것을, 찢어죽일 놈도 그를 사랑하고 따르는 어린 새끼들이 있다는 것을 조르바는 알고 있다. 그 깨달음의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죽인 신부의 어린 자식들이 길거리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오열해야 했으며, 그를 사랑으로 덮어준 불가리아의 과부의 죽음을 평생 씁쓸하게 기려야 했다. 조르바의 위대함을 위해 스러져갔던 많은 희생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라.
사랑과 연민이 없는 자유가 퍼진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몇 가지 적어보겠다. 인종차별, 여성차별, 성소수자차별, 여성혐오, 난민, 테러, 종교전쟁, 종족분쟁, 폭동, 성폭력, 성차별, cnn 국제부 첫 머리를 장식하는 모든 끔찍한 사건이 여기서 비롯된다. 독단적인 자유가 불러내는 것은 전쟁과 광기의 폭풍이다. 운명에의 저항? 필연성을 이겨내는 자유? 뭐든 다 좋다. 그러나 개인의 운명을 극복하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의 운명이 짓이겨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연민이 없다면 세상의 모든 비극은 이런 한 마디에 삼켜지게 된다. ‘원래 세상은 그런 거야.’ 필연성의 엄정한 무게에 개개인들의 이야기가 깔려 버릴 동안, 비극은 체념으로 일상에 스며들 것이다. 눈물조차 닮아버린 세상이라니, 그런 세상은 너무 슬프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연민이 없는 조르바라니, 자유가 없는 조르바만큼이나 상상할 수가 없다.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p326-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