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 제발 명심하고 쓰자
이 짧은 글은 모두 옛 수첩을 뒤적거려야만 했던 어느 밤의 무료와 권태에서 시작되었다. 다들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그게 무료든, 권태든, 늘어지는 감정에 사로잡혀 밤에 다이어리를 뒤적거리게 되는 그런 날. 무료를 달래줄 무언가를 찾아 닥치는 대로 손을 뻗는 그런 밤이 있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 빌 브라이슨 1부 52분’. 그 밤에 나는 수첩의 한 귀퉁이에서 짧은 메모를 발견했다. 스릴러 영화 속에서 이런 메모는 대개 아주 흥미로운 사건의 현장으로 주인공을 데려다 주곤 한다. 스릴러나 추리소설과 현실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나는 이 메모가 무료를 해결해줄 것이라 확신했다. 생의 무료를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은 잘 안다. 나는 그날 밤, 바로 그 순간의 무료만 해결하면 되었다. 무엇보다도 빌 브라이슨이라는 이름이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감각(연유가 아니다, 감각이다)으로 빨간 책방이라는 팟캐스트를 다시 듣게 된 것이다.
52분에는 김중혁씨가 어떤 주제로 말을 하고 있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나는 그 말을 아주 경청했다. 아니 그가 나를 경청하게 만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중혁씨는 빌 브라이슨의 책에 대해서 평하고 낭독했다. 그 책,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이다. 몇 번을 읽었고, 때로는 따라 적기도 했던 그런 책이다. 그에 목소리에 실려 오는 부분 마다 내게는 깊게 들어왔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고, 공감할 수 있었고, 또 동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 더 넓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어떤 이야기든 그것을 미지의 공간으로 이어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건 이 책에 대한 애정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 자신도 확언할 수는 없으니, 감각적인 언어로 드문드문 기워놓은 그런 말들을, 그는 뱉어내고 있었다. 무료를 찢어버리며 올라오는 강렬한 욕구가 나를 사로잡았다. 김중혁씨가, 그리고 빌 브라이슨이 온전히 다 말하지 않은 여백의 내용들을, 내가 말해주고 싶은, 말하고야 말겠다는 욕구를 느낀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빌 브라이슨의 글쓰기로 산문쓰기에 대해서 말할게요. 많은 사람들이 산문을 쓸 때, 교훈, 이 글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에 집착해요. 그런데 어떤 이야기는 스스로 쓰면서 깨닫게 되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걸 무시하고 하나의 교훈만을 이야기할 때, 이렇게 글을 쓰려고 할 때 글이 답답해집니다. 나는 옳은 글을 써야지 하는 순간 글이 답답해집니다. 분명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안이 있을 거에요. 분명히 어떤 부분에는 빌브라이슨처럼 과격한 부분도 있을 거고 어떤 부분에는 다른 게 있을 거에요. 그 두 가지 생각이 다 중요합니다. 그 두 개를 싸움 붙여서 얻어지는 교훈이야말로 진정한 교훈인 거에요. 시작하기전에 한쪽을 지워버리는 순간 답답해져요. 빌브라이슨은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글로 다 끄집어내고나서 글을 써요. 길을 찾아가는 것처럼. 답을 찾는 글쓰기, 멋진 글쓰기, 그게 빌 브라이슨의 글쓰기인거 같아요. 초반에는 뭐가 뭔지 모르지만 끝에는 묵직한 게 남아요. 그건 미리 상정한 게 아니죠. 빌브라이슨이 겪은 일들을 통해서 묵직한 게 점점 묵직해집니다. 그런 글쓰기가 소중한거죠.
(편의상 편집)
탄복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의 말은 아주 통쾌했으나, 나는 말이 주는 인상보다 더 큰 통쾌함을 느꼈다. 그건 그의 말이 나의 의견을 지지하면서도, 나를 오랫동안 괴롭혀 왔던 통념이라는 놈의 빰을 제대로 후려갈겼기 때문이다. 통념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명료한 글을 써라. 이해하기 쉬운 글을 써라. 짧은 문장을 써라.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하라. 그런 글만이 좋은 글이다. 요컨대 결론이 명확한 글을 쓰라는 것이다. 서점에 가서 잡는 글쓰기 책마다 똑같은 소리를 했다. 글로 돈 좀 번다는 사람들도 똑같은 소리를 했으며, 어쭙잖게 글을 쓴다고 으스대는 애매한 놈들도 똑같은 소리를 해댔다. 마치 그런 소리를 하면 글을 잘 쓰게 되는 것이라 느끼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좋은 글이란 명확하고 간결한 글인가?
당신이 제발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길 바란다. 만약 당신이 그렇다고 위의 놈들과 다를 바 없는 뻔한 답을 했다면, 특히나 별다른 고민 없이 그렇게 말했다면 당신은 글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단어가 쉽고 문장이 짧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글이 명확하고 구성이 일관되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혼동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이런 대답들을 글쓰기의 진리인양 여긴다. 그들에게 그놈의 ‘말하고자 하는 바’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것을 간과했다. 그들은 글쓰기를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전달’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나는 다시 여기서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다. 과연 글쓰기 =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전달인가? 그러니까 글쓰기의 목적이 정보전달인가? 혹은 김중혁씨의 표현처럼 단순한 교훈의 전달에 그치는가?
그런 태도는 마치 글쓰기라는 행위를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글쓰기는 정보, 주제, 교훈,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운송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글의 수명은 교훈보다 길다. 우리는 어떤 글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똑같은 글을 읽곤 한다. 우리는 어떤 문장을 암기하여, 그것의 메시지를 떼어놓고 음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글에 정보 전달 이외에 다른 커다란 측면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다시 ‘메시지’ 하나로는 글을 쓰는 이유를 전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온전히 정보 전달을 위해서 봉사하는 글은 오로지 신문 기사뿐이다. 나는 신문 기사를 반복해서 읽고, 암송하고 구절들을 외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신문 기사에는 글쓰기의 또 다른 본질인 ‘음미의 과정’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기사는 글이 문자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모든 내용이 정해져있다. 신문 기사는 오로지 정보 전달을 위해 과정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특수하게 조형된 글의 한 방식일 뿐이다. 그것은 글쓰기의 한 방식으로서만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잘 쓴 글쓰기란 무엇인가, 그들이 규정하는 대로 몇 줄만 글을 써본다면 그것이 신문 기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계속 바뀌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글은 원심력을 가지고 있다. 쓰고자 하는 바가 글자로 종이에 적히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달라지려고 몸부림친다. 그것을 통제하는 과정이 바로 글쓰기다. 그것을 통제한 최종 결과만이 글쓰기가 아닌 것이다.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에서 주제는 무엇인가? 빌 브라이슨이 유럽에서 이런 저런 경험을 많이 했다. 이 한 문장을 위해서 빌 브라이슨이 저 두꺼운 책을 썼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방법 중에 가장 멍청한 방법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압착하려고 노력하며 읽는 것이다. 그래서 좋았다는 거야? 그래서 나빴다는 거야?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와 같은 질문은 독서와 관련된 질문 중에서 가장 멍청하고 질 나쁜 질문이다. 동시에 가장 위험한 질문이기도 하다. 빌 브라이슨의 책에 독자를 갈팡질팡하게 하는 모든 구절은 먼 상상계의 필름 속에 존재하는 빌 브라이슨의 기억과 감정과 경험이 현상된 것이다.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은 상상계의 필름을 문장으로 통제하고자 했던 노력의 산물이다.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문자(글이 아니라 문자)를 읽는 경우가 아니라면, 글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를 위해서 존재한다. 쓰기 위해서, 그리고 읽혀지기 위해서. 전자가 작가를 위한 것이고 후자가 독자를 위한 것이다. 홀로 독방에서 쓰는 일기가 아니라면 모든 글은 독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고 모든 독자가 정보 전달을 원하고 글을 읽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은 위험하다. 글을 쓴다는 행위가 얼마나 실용적인 목적에 오염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읽혀지기 위해 글은 ‘간결하고, 명료하고, 명확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읽혀지기 위해 글은 독자가 무슨 일이 있어도 글을 읽도록 만들어야 한다.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어야 하고,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해야 한다. 요컨대 몰입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글은 매력적이여야 한다. 좋은 글(좋은 문자가 아니라)은 대개 재미있다. 매력이 있다. 아름답기도 하다. 그 아름다움이 사람들이 문장을 외우고 낭송하고 글을 만드는 것이다.
이미 옳은 것, 좋은 것, 써야하는 것을 상정해놓고 쓰는 글은 생명력이 없다. 대개 산문쓰기라며 사람들이 그런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글쓰기가 실용적인 목적에 한참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글을 쓰고 싶으면 당장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되어 기사를 쓸 것을 권유하는 바이다. 작가가 작가일 수 있는 이유는 그 뉘앙스에 ‘짓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사도, 교양서도, 대학교재도 모두 글을 짓는 행위다. 그러나 짓는 행위는 원고의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계속 되어야 한다. 어느 지점에서 짓는 행위를 포기한 사람은 작가가 아니라 정보전달자에 불과하다. 작가, 저술가는 글을 읽게 만드는 사람이다. 저술가와 전달자는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퍼포먼스에 치중한 아이돌과, 음악, 그러니까 소리에 치중한 가수들을 구분하듯이 그렇게 구분되어야 한다. 목소리의 예술가는 후자이다. 그렇다. 글을 쓰는 예술가가 바로 작가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예술이다.
예술은 매순간에도 끊임없이 창조와 파괴를 반복해야 하는 바, 작가의 글쓰기도 그렇다. 빌 브라이슨의 글처럼, 그것을 지적한 김중혁씨의 조언처럼, 진정한 교훈은 갈팡질팡, 횡설수설,중언부언 속에서 태어난다. 요컨대 문장들끼리의 예술적인 작용 속에서 태어난다. 때때로 그렇게 태어난 교훈을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많은 이들이 그런 글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을 선물하는 종류의 글은 글쓰기의 신이 선물하는 축복 중 하나다. 그런 글은 오히려 지향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메시지가 아무리 좋아도 다시는 쳐다보지 않게 되는 컨텐츠가 얼마나 많은가.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이다. 어떻게 표현하는가(형식)이 교훈(내용)을 새롭게 만들어 준다. 똑같은 메시지라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드라마 속의 치정싸움이 전혀 다른 작품이 된 이유가 그것이다. 어떻게 표현하는가. 예술적으로 표현하라. 글을 쓰는 와중에 작가 자신이 예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라. 그러한 자각이 더욱 뚜렷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