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뜨개질을 좋아하셨다. 무릎 위에는 늘 털실 뭉치나 레이스 뜨기용 실이 긴 바늘을 꽂은 채 놓여 있었다. 코바늘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레이스들을 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목도리나 장갑들이 뚝딱 만들어지는 것은 언제 보아도 신기했다.
겨울 초입에는 색색 예쁜 장갑을 만들어 긴 끈을 매달아 목에 걸어 주셨다. 지금도 장갑 한쪽을 잃어버려 사용하지 못하고 혼자 굴러다니는 장갑들을 보면 엄마가 목에 걸어주시던 장갑 끈이 생각나곤 한다. 5남매 장갑 중 누구 것이 제일 예쁜가 촉각을 곤두세우던 시절이다. 남동생들이야 별 관심이 없었지만 언니와는 서로 예쁜 색을 차지하기 위한 시샘을 부렸던 기억이다
그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것은 초등학교 입학식을 위하여 엄마가 손수 떠주신 털외투이다. 자주색 몸통에 깃과 소매에 감색 실을 덧댄 큼지막한 옷이었는데 색도 예뻤지만 당시 처음 나온 담당실이었다. 털이 숭숭 난 아주 따뜻한 옷이었다. 조금은 어른스러워 보이던 자주색과 감색의 조합도 마음에 들었다. '의젓해 보인다'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며 아이에서 어른으로 인정받는 듯이 흐뭇했다. 그렇게 등에 매고 매고 싶었던 빨간 란도셀 가방도 그리 대단치 않아 보였다. 5남매 중 나에게만 짜주신 털외투였다.
털 옷은 재생이 가능하다. 작아지거나 싫증이 난 옷은 풀어 다시 뜰 수 있다. 끝부분 마감 처리해 놓은 곳을 찾아 풀기 시작하면 한 줄로 술술 풀려나온다. 풀린 털실은 동그랗게 공 모양으로 말기도 하고 실타래처럼 적당한 길이로 묶기도 했다. 엄마와 할 수 있었던 공동 작업이었다. 조금 참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지만 지루하지 않았던 기억이다. 김이 솔솔 나는 주전자 입구에 실을 가져다 대면 고불고불한 뜨개질 자국이 없어지고 새실처럼 곧고 탄탄한 실이 되는 것도 신기했다.
다시 엄마의 손에서 누군가의 새 옷으로 탄생한다. 털 옷을 새 옷으로 만드는 과정을 좋아했지만 자주색 털외투만큼은 풀고 싶지 않았다. 소매가 덜렁 짧아질 때까지 입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기억이 있다. 자주색 털 뭉치가 무슨 옷으로 변했는지 기억이 없는 걸 보면 털외투에 대한 애착이 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맘때면 무릎에 털실 뭉치를 두고 뜨개질을 하던 엄마 모습이 떠오르고 자주색 털외투가 생각난다.
"얘, 왜 우린 엄마 솜씨를 안 닮았니?' 언니가 늘 하는 말이다. 내가 보기엔 언니는 그래도 엄마 솜씨를 물려받아 음식 솜씨도 있고 그림도 잘 그리지만 바느질과 뜨개질은 나만큼 소질이 없는 것 같기는 하다. 이런 결핍이 엄마를 더 그립게 만드는 걸까? 엄마가 그리워 뜨개질 핑계를 대는 걸까?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공장에서 쏟아져 나와 물건들이 홍수가 나는 시절이지만 손뜨개가 아직도 인기를 끌고 있는 걸 보면 물건에는 품질 말고도 사람을 잡아 끄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어머니는 손뜨개질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몸은 우리 오 남매 곁에 있지만 가끔은 외할머니 할아버지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뜨개질을 하며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시다가도 하르르 한숨을 쉬곤 하셨다
아들 없이 딸 둘만 키워내신 외할머니는 우리 엄마에 대한 애착이 심하셨다. 영특하고 재주 많은 엄마에게 온갖 기대를 거셨지만 출가외인이던 시대, 엄마가 친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다. 오 남매를 돌보고 키우시는 일도 벅찼을 것이다. 출가외인이던 시대였으니 마음 놓고 부모님을 그리워할 수도 없던 시절이다. 속만 끓이시며 마지막까지 친정을 돌보지 못한 자신을 힘들어하셨다.
추억도 털실처럼 재생할 수는 없을까? 어머님이 마음껏 외할머니께 효도하고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가 내게 해주신 것처럼 어머님이 자랑스러워할 옷 한 벌 지어드리고 싶다. 나이 드니 추억이 새로워지고 어머니가 더 그리워진다.
우리 어머님은 뜨개질로 그리운 마음을 달래시지 않으셨을까? 이제 와 헤아려지는 어머니 마음인데 어머님은 기다려주지 않으신다.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 평범한 말을 그때는 왜 깨닫지 못했을까? 뒤늦은 후회를 한다. 이 말이 이토록 가슴 아픈 말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