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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선열 Oct 14. 2024

나는 시금치의 '시'자가 싫지만은 않다

우리 시어머니 

시집 식구는 시금치의 ”ㅅ“자만 들어도 싫다는 세상이다. 출가외인으로 시집에 뼈를 묻어야만 했던 시절과는 아주 많이 달라 아들보다는 딸을 선호하기도 한다. 딸만 있는 엄마는 비행기 타지만 아들만 있는 엄마는 싱크대 앞에서 죽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 변화의 격동기를 살아내신 분이 우리 시어머님이다.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이 겪어냈어야 할 변화이긴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호된 아픔을 겪기도 하고 비교적 순탄하게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아들딸 칠 남매를 키워내며 강한 성품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어머님은 병원에서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집에 가고 싶다" 하셨다. 어머님이 가고 싶었던 집은 당시에 어머님이 살던 곳이 아니었고 당신의 4대 독자 외아들이 살고 있던 우리 집도 아니었고 친정도 아니었다. 어머님의 마음이 평생 머물던 그곳이었다     

시어머님은 그 시대 사람 중에서도 유독 아들 선호 사상이 심했다. 남들은 유난스러운 분이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그런 시어머님을 충분히 이해했다.

언뜻 보기엔 4대 독자 외아들인 우리 남편 때문인 것 같지만 어머님께는 더 깊은 속사정이 있었다. 우리 어머님은 귀한 집 외동딸이었다 남편은 어린 시절 외갓집에 가면 호두나무 기름을 입힌 대청마루가 반짝이고 광에는 먹을 것이 넘쳤다는 말을 자주 했다. 부잣집에서 오빠들과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어머님은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솜씨도 뛰어나고 맵시도 고와서 동네 안팎에 칭찬이 자자한 일등 신붓감이었다       

 신분에 걸맞게 꽤 괜찮은 양반댁으로 동네가 떠들썩한 결혼식을 했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일찍 홀로 되는 아픔을 겪으셨다. 당시엔 잘못되면 모든 게 며느리 탓이었다. 아들딸 남매를 생산하고 알뜰한 살림을 꾸렸지만, 남편의 허망한 죽음을 맞은 어머님에게 돌 오는 건 '사람 잡아먹은 년"이라는 오명뿐 이었다. 친정에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외동딸의 수난이었다

외갓집은 명분보다 실리를 택했다. 딸을 불행한 열녀로 만들기보다는 욕을 먹으면서 친정으로 데려와 동네 성실한 노총각과 재혼을 시킨 것이다. 당시에는 파격적인 일이었고 외갓집으로서도 큰 용단을 내렸던 일이었다     

콧대가 높기만 했던 시어머님은 자식 둘을 데리고 개가를 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해야 했다. 시아버님에 대한 무조건 순종이었다. 자상한 시아버님께서 어머님을 귀히 여기시고 매사에 어머님 의견을 존중했으나 어머님은 핏줄을 제일 중요시 하던 시대에 성씨가 다른 자식들을 키우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기 힘드셨던 것 같다.

시아버님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은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 데리고 온 자식과 새로 낳은 자식의 차별이었다, 공밥을 먹이지 않겠다는 냉정한 어머님의 태도에 아버님이 오히려 큰 자식들을 싸고돌았다. 장녀 장남의 대우를 깍듯이 해주어 집안에 위계질서를 세우고 우애를 돈독히 만들었다. 그럴수록 어머님은 더 미안했다. 자신의 활달한 기질을 누르고 아버님께 무조건 순종했다.     

아버님 집안이 워낙 손이 귀했기에 아들을 학수고대했으나 어머님은 딸만 내리 낳다가, 어렵게 아들을 잉태했다. 다섯 째였다. 남편이 태어나고서야 어머님은 기를 펼 수 있었다. 부잣집 외동딸 기질이 다시 나타난 것도 남편 출산 후였다.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았으니 기세등등할 수 있었다. 호인이신 아버님을 등에 업고 어머님은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는 호시절을 누렸다, 음식 솜씨며 살림 솜씨가 뛰어나고 친정에서 배운 예의범절도 깍듯했으니 동네 대 소사가 어머님 뜻에 좌우되는 호시절이었다.     

그래도 전쟁은 피해갈 수 없었다. 모두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어머님은 피난민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기 시작하셨다. 어머님의 음식 솜씨를 맛본 사람들이 칭찬을 일삼았고 이렇게 시작된 음식점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목도 좋은 차부 앞이었으니 아침부터 밤까지 줄을 서야 하는 맛집이 되었다. 대장부처럼 통 큰 어머님은 싱싱한 재료를 넉넉히 사용하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퍼주었다.     

4대 독자인 남편은 어머님을 등에 업고 백구두를 신은 왕자로 군림했다. 어머님의 비호 아래 

  위로 누님 다섯 분, 밑으로 여동생 두 명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남편의 말은 곧 집안의 법이 되었다.     

남편은 철부지이긴 하나 마음이 약하고 정의감이 강해. 새 옷을 사주면 가난한 친구들에게 벗어주기 일쑤였고 집에서 밥을 먹이는 친구들이 대여섯 명 이상인 한량이었다     

병약하시던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자 어머님은 삶의 의욕을 잃었다.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집안 대소사를 남편에게 맡겼다. 뜻만 크던 세상 모르는 철부지였으니 재산이 남아 날 리 없다. 한 가지 일을 시작할 때마다 재산이 뭉텅뭉텅 잘려나갔다. 온양이 집이었건만 부산으로 대구로 서울로 보헤미안처럼 누비고 다녔다 온양집은 그야말로 허울 좋은 빈 껍데기만 남았다.     

이 무렵 나와 남편의 혼사가 이루어졌다. 그때 나는 시어터진 노처녀였다. 당시 신붓감으로 손색없는 맏며느리 감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으면서도 웬일인지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눈이 높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계속되는 맞선에 식상하여 비혼을 주장할 무렵이었다. 부모님들을 모시고 맞선을 보던 날, 한강 변에는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 덕분인지 우리의 만남은 무난히 진행되었고 어머님은 "손가락에 반지 하나 없구나. 사치스럽지 않다" 하며 내게 호감을 표하셨다. 친정집에서 약간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해 만난 지 겨우 4개월 만에 우리는 한강 유람선에서 선상 결혼식을 올렸다 "행사 날 날씨는 주인공을 닮는다더라" 봄날같이 따뜻하던 12월 날씨를 보고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서로 콩깍지가 낀 것처럼 어머님도 내게 콩깍지를 씌워진 것이다.

우리 친정 어머님은 자애롭기보다는 엄격하신 편이었는데 이 무렵 내게는 무조건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늦게까지 혼사를 이루지 못한 딸이 안쓰러우셨는지 집안일에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했다. 속 옷은 물론 손수건이나 스타킹도 손수 빨아 주시며 "결혼하면 실컷 집안일 할 텐데 미리 고생할 것 없다", 하셨다. 평소 어머님으로서는 파격적인 말씀이셨다. 결혼 적령기까지는 "못 배워 왔다고 시집에 흉잡히지 말고 잘 배워라” 말씀하셨었다     


왕자인 줄 아는 허당과 공주로 착각한 노처녀의 만남이었다. 남편은 누나들에게 받던 시중을 내게 요구해 왔다. 순둥이인 나는 어떻게든 남편에게 맞춰보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남편의 불만은 쌓여가고 나는 지쳐갔다. 어머님이 구원투수였다. "공부만 하던 사람이 할 줄 아는 게 뭐 있겠니, 머리 좋으니 조금만 배우면 더 잘할 거다" 하시며 나를 옹호해 주었다. 동생의 횡포에 시달리던 시누들도 모두 내 편이었다. 남편이 반찬 투정을 하면 어머님을 닮아 음식 솜씨 좋은 시누이들이 공수해 왔고 “착한 사람 괴롭히지 말라”며 무조건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남들은 사대 독자 외아들에 시누이가 일곱이라면 모두 손사레를 치지만 나는 오히려 대 센 시어머님과 일곱 시누 덕에 신혼의 위기를 잘 넘긴 듯하다     

스타킹도 못 빨던 내게 속옷 손빨래를 원하는 남편을 위해 어머님이 몰래 손빨래를 하시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눈시울이 뜨겁다. 그때 어머님은 풍을 맞으셔서 오른쪽 반을 못 쓰셨다. 제대로 서지도 못 하고 앉아서 엉덩이를 밀며 겨우 이동을 했다. 잠시 우리 집에 다니러 오셨다가 내가 없는 틈을 타 목욕탕으로 들어가 한 손으로 손빨래를 한 것이다.     

그런 시어머님과 나는 그리 긴 인연은 아니었다. 우리가 결혼한 지 삼 년 후, 어머님은 폐렴으로 앓아 누었다가 유명을 달리하셨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중환자실에 입원해 계시던 어머님은 막무가내로 퇴원을 원하셨다. 의사들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집으로 갈 거야"를 외치며 침대에서 구르기도 하셨다. 마침내 퇴원을 결정했을 때 어머님이 말씀하신 집은 어머님이 사시던 집이 아니고 우리 집은 더욱 아니었으며 친정집도 아니었다. 큰형님이 사시는 집이었다.     


큰형님과 어머님은 늘그막에 사이가 좋지 않으셨다. 큰 형님이 열일곱에 시집와서 오 십 년 이상을 같이 사셨지만 어머님에게는 늘 데리고 온 자식이라는 압박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을 누르고 매몰차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큰 형님의 말대꾸에 어머님이 절구공이로 입을 찧으신 일도 있다고 큰형님은 시집살이의 애환을 내게 털어놓기도 했다. 나만은 시집살이를 안 시키겠다며 막냇동생 대하듯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일곱 시누들의 기를 꺾은 것도 알게 모르게 형님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시어머님과 큰형님의 골은 깊어만 가서 그 무렵에는 거의 냉담 수준이었다. 나는 시어머니와 큰형님 사이의 가교 노릇도 해야 했다. 내게는 큰형님이 어머님 같았다. 집안 대소사나 가풍들을 소상히 일러주시고 당신이 당한 시집살이를 겪지 않게 하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애매하기는 했다. 둘 다 맏며느리였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어머님이 큰집으로 가고 싶다고 하실 때는 서운함이 몰려오고 소외감이 밀려왔다. 시누들이 말했다 "그건 언니가 이해해야 해요. 언니하고는 삼 년이지만 큰언니하고는 오 십 년 세월이에요. 그 세월 동안 제대로 마음에 있는 따뜻한 말 한마디 못 하셨어요. 우리에게도 말씀 못 하신 어머님의 한이 있을 거 같아요"

결국, 내가 큰 형님댁으로 내려가 형님과 함께 어머님 병 수발을 들기로 했다. 그때 내 아이가 두 살이었으니 두 살 아이를 데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큰형님은 자신이 하신 일을 내가 한 것처럼 가족들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언니 그만하면 됐어요. 충분히 어머님께 잘 한거니 슬퍼하지 마세요. 딸인 우리보다 더 살가우셨어요" 시누들이 말했다 그렇게 어머님이 가셨다. 끝내 시어머님과 큰형님은 서로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누지는 못했지만, 어머님이 큰집으로 내려간 순간부터 두 사람 사이의 앙금은 녹아 없어진 것이다     

 어머님은 아버님께 평생 순종적으로 의무를 다하셨지만, 마음은 큰집에 있었을 수도 있었겠다. 내 남편에게 아들로서의 삼종지의를 보이셨지만 큰아들을 더 믿고 계셨을 수도 있겠다. 결국, 어머님 집은 큰아들 집이었으니 말이다     

내게는 시집에 일곱 시누이와 두 분의 시어머니가 계신 것이나 다름없다. 무조건 내 편을 들어 주시며 시누들까지 좌지우지 해주던 시어머님과 혹시 모를 시어머님의 시집살이를 미리 염려해준 큰 형님이시다. 두 분이 사시던 뼈아픈 세월을 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두 분 덕에 시끄러워질 수도 있었던 신혼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시금치의 ‘시’자도 싫은 요즘 며느리들이 이해하기엔 무리수가 있을 수도 있겠다.     


평생을 내 남편을 위해 산 것같아 보이던 어머님의 삶에 안식처로 남은 것은 큰형님 댁이었다. 삶에 대한 의무와 희생으로 살아내신 어머님의 일생이 옳다고는 말 못 하겠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으니 어떤 경우에도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어머님의 삶 자체를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희생과 의무도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 딸이나 며느리가 어머님 같은 삶은 살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자식을 위해 그렇게 살아내신 어머님께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어머님의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려 한다.     

시금치의 시 자가 싫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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