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탈을 쓴 불공정
살다 보면 기회라는 건 예상하지 못한 순간 찾아오죠. 하지만 기회인 줄 알았던 것이 알고 보니 기회의 탈을 쓴 무언가였을지도 모릅니다.
지인으로부터 한 통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책을 집필하려고 하는데, 심화된 부분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저는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어떤 책의 저자로 이름이 올라간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니까요. 그 주말에 만나 나눈 이야기들도 꽤 구체적이었습니다. 비록 상대방과 제가 가진 =견해 차이는 있었지만, 전문가로서 제 파트를 확실히 책임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빨리 책을 내고 싶었으니까 제가 아는 내용들을 하나씩 원고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계약서 도장을 찍기 직전, 이상한 예감이 스쳤습니다. 상대방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자신의 자료까지 제가 전부 원고로 재작성해주길 바라는 뉘앙스를 풍겼습니다. 확인차 물어본 결과는 역시나였습니다. "문체와 형식을 맞춰야 한다"는 명목이었고 그 순간, 이 작업의 무게중심이 어디로 쏠리고 있는지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자료라는 게 책을 만들기 위해 새롭게 작성한 게 아니라 기존에 정리되어 있는 자료라는 것을 생각하면 제가 문자 그대로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수익 배분은 5대 5. 계약서 자체에는 크게 저자에게 불리한 독소조항이 없어서 제 예상대로 진행되었다면 이 수익 배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죠. 다소 감정적이었을지 모르나, 저는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다음 날, 상대방은 미련이 남았는지 본인이 직접 써보겠다며 다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저는 샤워를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함께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을 정리해 카톡으로 보냈습니다. 단순히 책에 몇 페이지가 실리냐를 기준으로 한 게 아닌 실제 작업량을 고려해 역할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최소한의 서술 규칙을 지켜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습니다. 단독집필을 하겠다는 통보였죠. 이렇게 이 계약은 성사되지 않고 마무리되었습니다.
실제로 제 선택이 옳다고 생각해서인지 그저 저를 위로하기 위함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변에서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만약 그 계약을 진행했다면, 출판사의 모든 수정 요청과 질문은 결국 너에게 쏟아졌을 거다. 그 사람은 이름만 올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거야." 제가 거절한 것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제가 버틸 수 없는 불공정함이었던 것입니다.
이 계약을 위해 도장도 새로 만들었지만 이 도장은 결국 계약서 위에 찍히지 못했습니다. 대신 저는 그 원고들을 들고 온라인 과외 플랫폼으로 향했습니다. 상대방에게 미리 보여주었던 초안이 혹여나 무단으로 쓰일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두려움이 저를 더 당당한 창작자로 일어서게 했습니다. 내 노력이 담긴 결과물을 내 이름으로 직접 세상에 내놓는 것, 그것이 제 저작권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원고는 플랫폼의 심사를 받았고 승인이 되어 크몽에서 판매중입니다. 비록 대형 출판사와의 화려한 계약은 아니지만 이제 제 노동력을 제가 보상받는 길이 보입니다. 인생경험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덤으로 과외 클래스도 승인받았고요.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