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 1등은 왜 의대 대신 건축과를 갔을까

범생이가 부릴 수 있었던 최선의 낭만, 그리고 그 후

by 김도면

나는 항상 최정상에 있어야 직성이 풀렸다. 받아쓰기 하나만 틀려도 세상이 무너진 듯 울던 아이. 어머니의 교육열 덕분에 필리핀 어학연수를 거치며 영어와 수학을 선행했고, 미국 고등학교 시절엔 나와 A는 '코리안 트윈즈'로 이름을 날렸다. 돌아온 한국에서도 나와 쌍둥이 형제 A는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이과 1등, A는 문과 1등. 3년 내내 깨지지 않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기록이었다.


보통의 전교 1등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의대나 경영학과를 지망한다. 하지만 우리는 달랐다. 나는 건축학과, A는 정치외교학과.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거부하는 것, 그 반골 기질을 드러내는 것이 범생이 10대였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낭만’이라 믿었다. 용인 단독주택 지구를 걸으며 건축의 아름다움을 동경했던 나는, 내 성적표가 그 낭만을 실현해 줄 수표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서울대 불합격. 재수를 면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서울대에 못 갔다는 처절한 패배감이 밀려왔다. 연대 정외과와 한양대 건축과. 남들이 보면 성공한 입시라며 절을 하고 들어갈 학교였지만, 당시의 나는 자아가 너무나 비대했다. 서울대가 아니면 실패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에너지로 의대를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후회도 스친다. 학생부는 온통 건축으로 도배해 놓고선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스무 번 째 해. 비록 원하던 타이틀은 아니었지만, '한양대 공대'와 '건축'이 주는 뽕에 취하기엔 충분했다. 나의 스무 살은 말 그대로 충만했다. 날씨가 좋으면 출튀(출석 튀기)를 하고 서울숲으로 달려갔다. "대학은 즐기는 곳"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치열했던 고교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였는지, 순도 100%로 경쟁심이 사라진 나날들이었다.


노력 대비 성적은 중간은 갔다. 공대에서 유일하게 텍스트북 없이 수업하는 '건축과'의 특성 덕분이었을까. 그러다 과에서 제일 잘생긴 선배 형의 권유로, 단순히 "멋있어 보여서" ROTC를 시작했다. 직감적으로 군대를 다녀오면 이 낭만적인 학교생활이 끝날 거라는 걸 알았던 걸까. 나는 입대 전까지 캠퍼스의 낭만을 유예하며, 그렇게 무사히 소위로 임관했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건축 도면 위에 선을 긋던 그 손으로, 훗날 병원 원무과에서 영수증을 끊고 밤에는 아이돌 노래 가사를 쓰게 될 줄은.


하지만 돌아보면, 그때 선택한 '건축'이라는 낭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구조를 이해하고 아름다움을 좇던 그 기질은 지금, 3분짜리 노래 속에 세계를 짓는 '작사'라는 새로운 집 짓기로 이어지고 있으니까. 나는 여전히 그 시절, 전교 1등의 오기보다는 범생이의 낭만을 믿는다.